〈 358화 〉 휴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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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 휴식 #1
“드디어 도착했다...”
반나절에 가까운 시간 동안 긴 터널을 통과하고 난 뒤, 늦은 밤이 되어서야 3계층에 도달했다.
깊은 잠에 빠진 평원과 간헐적으로 반짝이며 푸른 불빛을 토해내는 밤하늘, 신선하게 폐부로 들이차는 서늘한 바람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꼭 오랜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기분이다.
라디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으음...! 어떻게든 도착했네요...! 여기 터널은 정말... 왜 이렇게 유독 긴 것처럼 느껴질까요?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올 기미가 안 보이니...”
“뭐... 던전 높이를 생각해 보면 사실 방금 지나온 정도가 적당하지만... 공간 왜곡이 안 걸려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으음... 공간 왜곡이라... 그럴듯하네요.”
“완전히 지쳤어... 그나마 노래기를 타고 와서 다행이지 도란이 아니었더라면 하루를 꼬박 새워도 모자랐을 거야. 근데... 생각보다 조용하네? 바로 암시장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아리엘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니아가 이때다 싶어 신난 기색으로 설명했다.
“여긴 냇가가 없거든! 그래서 강물이 흐르는 중앙 부근에 사람들이 모여 있어. 게다가 지금은 붉은 매 길드의 수장인 아니스 가문에서 관리하지만 원래는 ‘암시장’이잖아? 세금도 내지 않고 비밀리에 장사하려다 보니 깊숙이 숨어들었던 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야!”
“아하... 그런 이유가... 그건 저도 몰랐네요. 살짝 궁금했는데.”
“그렇구나... 그리고 아니스 가문이라... 아실리아 데 아니스 님 말씀하시는 거죠 언니? 조만간 인사를 드려야 할 텐데...”
“아 맞다...! 아리엘 너도 이 왕국의 귀족이라고 했었지? 그러니까 분명...”
니아가 이마를 짚으며 고심하자 아리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에르티넬라 후작 가문이에요. 아니스 공작 가문의 영애님하고는 어렸을 때 사교회에서 간혹 만나서 사담을 나누곤 했어요. 굉장히 어른스럽고 멋진 여성분이셨는데...”
“뭐? 아실리가 어른스럽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그리고 후작이라니... 깜빡하고 있었는데 아리엘도 엄청 고귀한 혈통이었지...? 그러니까 비스마르크 왕국의 8대 대귀족 중 하나라고 했었나?”
“우후훗... 그냥 평범한 집안이에요. 그리고 니아 언니도 제국의 귀족이잖아요. 안 그래요 아르제 님?”
“우음... 그, 그 호칭은 조금 그런데...”
니아가 복잡미묘하면서도 쑥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과거에 가문과 엮인 안 좋은 일 때문에 성씨로 불리는 걸 꺼릴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
나는 살며시 니아를 끌어안고 토닥이며 말했다.
“...잘했어요 니아 님. 아리엘하고 실비도 이 계층에서는 몬스터가 안 나오니까 마음 놓고 푹 쉬어.”
“응, 마물이 안 나온다니 참 다행이네... 근데 이젠 마물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것 같기도...”
“하기야... 지금까지 오는 내내 다른 모험가들에게 안 들키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니까요. 개미에 노래기에 각종 짐이며 뭐며...”
“하긴...”
내 능력에 관한 내용이 퍼져나가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터, 이 정도 수고스러움은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제는 갑갑한 그림자 속에서 지내는 것도 꽤 익숙해졌는지, 잠수정의 잠망경처럼 내 발치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거리며 눈빛을 교환하는 해일이와 메라를 보자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나온다.
이젠 S급 마물이고 뭐고 그냥 귀여운 말라뮤트와 메인쿤 고양이를 보는 것 같다.
한데...
“저... 주인님, 주제넘지만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응, 편하게 물어봐. 무슨 일인데 실비야?”
“그게... 저희가 지낼 숙소 말입니다만... 이곳에서 적어도 이 주 정도 느긋하게 휴식하다가 갈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동안 해일이와 메라를 계속 그림자 속에 넣어 둘 수도 없을 텐데... 저희가 거처할 만한 장소가...”
“아, 그건 걱정하지 마. 다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일단...”
나는 일행들을 둘러보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노래기를 손등으로 두드렸다.
“다들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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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자, 거의 다 도착했어. 이제 다들 내리자. 손 잡아줄 테니 발목 안 삐게 조심하고.”
“읏차... 고마워 도란. 근데... 여긴 어디야? 저기 조그마한 점포가 잔뜩 있는 걸로 봐서는...”
“그래, 암시장이야. 여긴 밤이 되면 다 문을 닫으니까 구경은 내일 하는 걸로 하자. 그리고... 여기 맞죠 니아 님?”
“응!! 혹시 달라졌을까 봐 걱정했는데 전부 그대로네! 왠지 집에 온 듯한 기분이야!”
붉은 매 길드 주둔지.
금빛 매가 새겨진 거대한 붉은 깃발이 밤바람에 느릿하게 나부꼈다.
부지에 내려앉은 엄숙한 공기. 왕족의 별장처럼 짧고 가지런하게 정돈된 잔디. 시야 저편으로 얼핏얼핏 엿보이는 거대한 천막들...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넓은 부지를 둘러싼 목책은 견고하고, 입구 또한 끄트머리를 뾰족하게 깎은 나무 울타리로 막혀있었다.
임시 거처임에도 묘한 중압감이 느껴지는 광경에 침을 삼키자 라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이곳으로 왔다는 건... 아니스 님과 대면하시게요?”
“그래, 자고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 깨어있으면 슬쩍 만나고 오지 뭐. 그 김에 잠시 지낼 만한 숙소가 있는지도 좀 물어보고, 아니면 혹시 이곳에 남는 천막이 있으면 급한 대로 하루 자도 되니까.”
잠들어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왠지 그 아니스 님이라면 이 시간에도 깨어있을 거란 예감이 든다.
휘날리는 깃발 아래로 발길을 옮기려는 차, 나는 문뜩 뒤를 돌아보고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여기선 다들 잠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줄 수 있겠어?”
“네...? 어째서...”
“아니스 님이랑 니아 님 관련해서 따로 얘기할 게 있거든.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는데 예고도 없이 한 번에 찾아가는 건 조금 아니다 싶어서. 너희도 여러모로 피곤할 테고.”
“으음... 그건 그렇지만...”
나한테 모조리 맡기는 게 미안했는지 라디가 말끝을 흐리자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다들 맘 편히 기다리고 있어. 나중에 기회가 되면, 특히 아리엘은 언젠가 따로 자리를 마련해볼 테니까 그때 얼굴 보고. 그럼... 니아 님은 잠시 쉴 만한 장소를 안내해줄 수 있겠어요?”
“알았어!! 나한테 맡겨! 다들 이쪽으로 와!!”
니아가 활기차게 대답했다.
나는 솔선해서 일행을 데리고 어디론가 향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는 옅게 미소지으며 발길을 옮겼다.
야트막한 울타리를 넘어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붉은 매 길드 야영지에 들어서자 멀리서 고즈넉한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에 저벅저벅 고요하게 울려퍼지는 발소리, 살갗에 불어와 흔들거리는 서늘한 공기와 바지 밑단을 스치는 물기 어린 들풀...
저 멀리 거대한 천막이 줄지어 있다는 점을 빼고는 여느 야영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풍경.
한데...
‘뭔가 좀 이상한데...’
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희미한 연기를 피어올리는 등유 랜턴을 보자 뒷덜미에서 찌릿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순간,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자ㅡ
“거기까지다 침입자.”
푸확─!!
매서운 기세로 치달은 은빛 섬광이 발치에 구덩이를 만들었다.
이어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멀리서부터 요상한 마력이 느껴지더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디론 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지.”
소리가 들려온 곳을 올려다보자 그곳엔 어슴푸레한 구름 사이로 드리운 달빛이 공터에 자라난 은방울꽃에 생기를 부여하고, 나무 위에 걸터앉은 한 사내를 비추었다.
묵직한 대궁, 상의 아래로 탄탄하게 튀어나온 근육과 훌훌 벗겨져 은은한 광채를 뿜어내는 이마.
음...?
저 낯익은 중증 복합 탈모 대머리는...
“디론... 님?”
“날 알고 있나. 그런데도 이곳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하다니 용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군...”
“아니, 그... 저는 이상한 짓을 하러 온 게 아니라...”
“문답 무용. 변명은 취조실에서 듣겠다.”
파앙!
자그마한 파열음이 발발하고, 은빛 섬광이 피어났다.
급소를 빗겨 가지만, 충분히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일격.
디론의 손을 떠난 화살이 가공할 만한 속도로 날아들었으나ㅡ
‘우하단...!’
카아앙─!!!
나는 반사적으로 흑도를 소환해 살수(?手)를 튕겨내었다.
그의 시선을 정확히 주시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묘기.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랄 행위에 검을 뽑아 든 채로 어중간하게 서 있자니 디론의 입에서 경황스러운 음성이 터져나왔다.
“뭐, 뭐라?! 내 화살을 이 거리에서 튕겨냈다고!? 심지어 회피한 것도 아니라 칼날로 튕겨내?!!”
“저기... 디론 님? 저는 싸우러 온 게 아니라 잠깐 아니스 님과 대화...”
“너, 어중이떠중이가 아니군... 내가 너무 얕본 모양이야.”
넌 반드시 잡아야겠어 라고 뇌까린 디론이 훌쩍 뛰어 물러나더니 바위 위에 안착했다.
동시에 막대한 마력이 활시위로 몰려들고 대기가 떨리기 시작한다.
명실상부한 A랭크의 위엄.
‘이거... 까딱했다간 정말로 죽겠는데...’
첫발은 운 좋게도 막아냈다지만 두 번째도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마력을 볼 수 있으니 이렇게나 현저하게 전력 차가 실감 날 줄이야.
하이랭커의 전의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자니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린다.
일단 해명은 나중에 하고 잠시 후 이어질 공격에 대비해 서둘러 덩굴을 소환하려는 차ㅡ
“지금 내 낭군님한테 뭐 하는 거야─?!!”
“윽?!”
“엇...?!”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야밤의 공터에 울려퍼졌다.
당황하며 돌아보자 뒤쪽에서 익숙한 아무르 표범 소녀가 걸어나왔다.
바짝 부풀고 선 귀와 꼬리, 악귀처럼 험악한 표정의 니아를 보자 적잖이 당혹감이 밀려들었으나 나보다 더 놀란 인물이 있었으니ㅡ
“으힉?! 힉!? 니, 니아?! 녜, 녜가 왜 여기예...?!”
디론이 귀신이라도 본 표정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내 그는 끼기긱.. 소리가 날 기세로 이쪽을 돌아보더니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혼소했다.
“그, 그리고 낭군!? 그럼 설마 저 남자가...!”
“...오랜만입니다 디론 님.”
“허억...! 뭐, 뭐야...?! 정말로 도란 군이야?! 고작해야 한두 달 사이에 완전히 딴사람이 돼서 돌아왔잖아...! 아, 아니 그보다 히익?!”
“.....”
디론이 발자취에서 흉흉한 금빛 파문을 자아내는 니아를 보고 식겁했다.
그는 재빨리 도망치려 했으나 폭발적으로 거리를 좁힌 니아에게 덜미를 붙잡히고야 말았고
“...디론.”
“니, 니아...!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
“이 개새끼야. 얼마 남지 않은 머리털까지 죄다 뜯기고 싶어?”
“아, 안 돼 그것만은!! 그, 그리고 니아 너 그사이 꽤 솔직 끄아아아악!!”
소름 끼치는 소음이 울려퍼졌다.
달빛을 등지고 여리여리한 금발 소녀가 근육 마초 남성의 구레나룻을 쫙쫙 뜯어내는 초현실적인 광경에 아연실색하고 있자니 잠시 후, 분풀이를 마친 니아가 디론의 귀를 쥐고 흔들며 속삭였다.
“...잘 들어 디론.”
끄덕!
“다음번에 또 내 낭군님을 건들면 온몸의 털이란 털은 죄다 뽑아서 콧구멍에 쑤셔넣어 줄 거야. 알겠어?”
“.....”
“알겠냐고.”
...끄덕끄덕!
“그래, 그럼 그건 됐고...”
니아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아실리 지금 어디 있어. 당장 안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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