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9화 〉 휴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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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 휴식 #2
“이야... 이거 진짜 미안하네... 혹시 안 다쳤어...?”
“예, 전 괜찮습니다 디론 님.”
“그, 그래...? 그거 참 다행...”
찌릿!
“크흠... 흠..!! 미안하네 도란 군. 솔직히 자네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 했어... 당직을 서고 있는데 3계층 입구에서부터 강력하고 소름끼치는 존재가 빠르게 다가오는 게 느껴지지 않던가? 그래서 당연히 마물이거나 무지막지한 적수일 줄 알았는데... 그건 대체 뭐였나?!”
“아하... 그거 말이죠...”
노래기와 술독을 운반하던 개미 무리, 히드라와 키메라까지 짐작 가는 대상이 너무 많아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처하게 미소지으며 뒷말을 고르고 있자니 디론이 알아서 넘겨짚고는 중얼거렸다.
“으음... 기업 비밀이라는 건가? 하긴... 베라스틴에도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만...”
“야, 디론. 내 낭군한테 귀찮게 이것저것 묻지 마.”
“윽... 아, 알았네 니아. 아니 근데 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성격이 완전히 뒤바뀌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군... 지금이 더 솔직해서 보기 좋지만...”
“.....”
니아가 눈빛으로 ‘입 닥치고 걷기나 해’라는 시그널을 보내자 디론이 깨갱 시선을 내리깔고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부지런히 앞서나갔다.
하기야... 첫 만남 당시 니아는 마냥 맑고 순수할뿐더러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 같은 인상이었으니까.
그게 다 방어 기제에서 나온 가짜 성격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 조금 더 나중 일이지만.
나는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여러 일이 있었어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너무 오래 걸리니까 아니스 님 앞에서 한 번에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전 상처 없이 멀쩡하니까 니아 님도 화 풀어요.”
“하지만...! 소년이 크게 다칠 뻔했단 말이야!! 디론의 일격을 정통으로 맞았으면 정말로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결국 무사했으니 된 거잖아요. 말도 없이 무단으로 야영지에 들어온 건 제 잘못이고, 디론 님도 바로 사살하려던 건 아니었을 거예요. 무엇보다도 니아 님은 해맑게 웃는 모습이 더 보기 좋으니까요.”
“우, 우음... 그, 그래? 으... 아무리 나라도 이건 좀 부끄러운데...”
같은 길드원 앞이라 민망한지 니아가 디론을 의식하며 시선을 피했다.
다정하게 웃으며 꼬리 주변을 톡톡 두드려주자 다소곳이 뺨을 붉히며 내 팔에 살며시 기댔지만.
디론은 혼절할 기세로 입을 쩍 벌렸고.
그는 휘둥그레 뜬 눈동자로 나와 니아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휑한 정수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으음... 진짜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구먼... 그보다 이제 다 도착했어. 바로 이 막사야. 오늘은 밤새 잔업을 처리한다고 했으니 깨어있을 테고.”
“친절한 안내 감사드립니다. 혹시 디론 님도 같이 들어가실 겁니까?”
“나? 그야 당연히 나도...”
“.....”
“커흠...! 아, 아니 난 괜찮아! 계속 당직을 서야 하거든. 요즘은 타지에서 용병이나 하이랭커도 종종 몰려들다 보니... 혹시 모르잖아?”
디론이 서슴없는 걸음걸이로 천막을 향해 다가가다가 니아와 눈이 딱 마주치더니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쳤다.
한데 그가 막 우리를 지나쳐 물러나려는 찰나,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고맙다.”
“네...?”
“앞으로도 니아를 잘 부탁해 도란 군. 이렇게 즐거워 보이는 니아는 처음으아아아악!!”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빨랑 가라?”
“아, 알았어!! 그러니까 제발 그마아아악!!”
니아가 옆머리를 잡아당기자 디론이 필사의 호소를 내뱉으며 발버둥쳤다.
잠시 손아귀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디론이 몇 가닥 안 남은 구레나룻을 필사적으로 사수한 채 허둥지둥 도망치자 니아가 짐짓 헛기침하며 부끄러운 듯이 내 시선을 피했다.
“정말... 쓸데없는 말만 늘여놓고...”
“...다 니아 님을 아껴서 그런 거죠. 살짝 성급한 감이 있긴 하지만...”
좋은 사람이다.
이전에 니아가 길드원하고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고백해 내심 걱정했는데 다들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었던 모양.
나는 부드러운 눈길로 니아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럼... 갈까요?”
“응...”
니아와 손을 맞잡은 채 고개를 들어 눈앞의 막사를 올려다봤다.
붉은 매의 상징이자 아니스 가문을 상징하는 적색의 휘장, 두꺼운 붉은색 천으로 뒤덮인 천막.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입구로 다가가 가림천을 짚자...
“들어와.”
나긋나긋하고 우아한 음성이 울려퍼졌다.
*
길게 늘어진 천을 젖히고 막사 내부로 들어서자 우릴 맞이한 건 미온한 공기와 은근한 장미 향이었다.
조금만 맡아도 머리가 아파지는 싸구려 방향 따위가 아니라, 갓 재배해 싱싱한 장미 수천 잎을 프레스기에 압착해 일류 장인이 최적의 비율로 희석해낸 듯한...
여성적이면서도 진취적이고, 로멘틱한 공기를 피워 올리는 장미 향초. 타닥거리며 구석에서 온기를 내뿜는 소형 화로. 길쭉한 원목 테이블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그에 파묻힌 살짝 피로한 기색의 적발 미녀.
아실리아 데 아니스.
대형 하이랭커 길드의 단장인 그녀는 우리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공작새의 화려한 꽁지가 달린 깃펜으로 양피지에 글귀를 휘갈기는 데 열중했다.
보기 드물게 살짝 긴장한 기색의 니아를 곁눈질하고 손을 맞잡아주며 잠시 기다리자, 아니스는 서류 하단에 날인을 찍고 우리를 흘겨보더니 씨익 고방한 입매를 올리며 명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게 누구야, 아주 귀한 손님이 오셨네? 소년이 보고 싶어! 라면서 길드 업무도 몽땅 때려치우고 야반도주를 떠난 꼬맹이랑 소문의 주인 아냐?”
“.....”
“복귀 기한이 지나도록 연락 하나 없이 코빼기도 보이질 않고, 네 소식을 상인들 입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땐 얼마나 식겁했는지 알아? 뭐, 영주를 폐위해?”
말에 뼈가 있다.
나는 코웃음치는 아니스에게 니아 대신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준비했던 사과를 입에 담...
“아, 됐고. 딱히 탓하는 건 아니니까 들어와서 앉아.”
“.....”
“왜, 냉큼 꺼지라고 해줬으면 좋겠어?”
“아니... 아닙니다. 아니스 님.”
정중하게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눈치껏 아니스가 앉은 상석의 정 반대편,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조용히 의자를 빼내 앉자 니아도 얌전하게 의자를 가져와 내 옆에 앉았다.
착석을 마치자 아니스가 아름다운 얼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입술을 뗐다.
“나 고리타분하고 형식적인 건 질색하는 거 알지?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꿀꺽.
“너희 섹스했어?”
“네, 네?!”
화들짝 놀라 반쯤 기립했지만, 아니스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 도란 너 숫총각도 아니잖아. 라디라는 사낭 쥐 수인 전여친도 있었고.”
“.....”
아니 그게 지금 무슨 상관....
유심히 들여다보자 나는 손등에 가린 그녀의 입술 사이로 능글맞은 미소가 맺혀 있는 걸 눈치챘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안 했어요. 그리고 라디는 전 여자친구가 아니라 지금도 잘 만나고 있고요. 그보다 그게 지금 상황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뭐라고? 무슨 상관이 있냐고? 도란, 너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모양인데─.”
“윽─?!!”
찰나, 아니스부터 암사자의 포효처럼 사나운 마력이 터져나왔다.
질량이 느껴질 만치 거칠게 막사를 휩쓴 마나의 파동. 노기를 피해 사그라든 화롯불. 당장에라도 꺼질 듯 불안하게 일렁이는 촛불.
섬뜩한 마력에 주춤하며 물러나자 아니스가 힐끗 날 흘겨보더니 다리를 꼰 채 깃펜을 까닥까닥 위아래로 흔들며 말을 이었다.
“이건 중요한 문제야. 너는 표면상으로 우리의 주요 전력 중 한 명을 빼내 간 남성이야. 단순 불장난으로 끝나는 정도면 다행이지만 만약 2세가 태어나기라도 하면, 니아가 임신한 동안의 우리 측 전력 손실은, 출산하고 나서 바로 전선에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아?”
“.....”
“그리고 육아 문제도. 아기는 누가 데리고 키울 건데. 이곳이 보육원도 아니고 우리 길드에서 받아줄 것 같아? 도란 너는 칭얼거리는 젖먹이를 데리고 잘도 사냥하러 다닐 수 있겠어? 그러다 만약 네가 죽으면 아기는 어떡할 건데.”
“자, 잠깐...! 아실리! 소년을 만나러 간 건 내가 독단으로 한 거야! 소년은 잘못 없...!”
“니아, 넌 조용히 해. 일 더 키우기 싫으면. 잘못했다는 자각은 있지?”
“하, 하지만 아실리...”
“네가 입을 열수록 이자의 죄는 무거워질 거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변호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불경죄로 처벌할 수도 있었어.”
불경죄란 말에 니아가 벌떡 자리를 박차다 말고 멈칫하며 절망적인 표정으로 아니스를 응시했다.
나는 그제야 눈앞의 인물이 누구인지를 실감했다.
아실리아 데 아니스. 왕가의 피가 섞였다는 가장 높은 계급인 공작 가문이자, 현 비스마르크 왕국의 8대 대귀족 중 하나라는 아니스 가문의 여식.
젊은 나이부터 두각을 드러내 차기 당주 후보 중 하나로 거론되는 인물이며, 각 분야에서 최고들만 모인 하이랭커 집단을 이끄는 걸출한 무골.
지난번에는 조건 없는 호의를 베풀었다지만 내가 신의를 저버린 이상 이번에도 똑같이 반갑게 맞이해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나는 아니스를 대면하기에 앞서 나름 단단하게 굳혔던 각오가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는지 실감하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니아 님과의 관계는... 아직 없었습니다.”
“아직? 그러면 곧 할 마음은 있다는 뜻이네? 유사 성행위는. 입으로 서로의 성기를 애무해줬다던가, 그런 것도 없었어?”
“...없었습니다. 대신 입맞춤은 있었지만...”
“입맞춤? 몇 번, 하루를 기준으로 빈도수는 어떻게 되지? 누가 먼저 했고, 강도부터 첫 키스 장소까지 상세하게.”
“지금까지는 단순히 뽀뽀 정도에 그쳤고, 진하게 입술을 맞댄 적은 없... 아니, 딱 한 번 있었습니다. 영주성에서 강적을 상대하느라 도중에 헤어졌던 니아 님과 다시 만났을 때였는데... 니아 님이 먼저 절 덮쳐서...”
“어땠어?”
“솔직히... 좋았습니다. 외람되지만 상세히 말씀드리자면 매끈하면서도 고양잇과 수인답게 살짝 까슬한 혓바늘이 느껴져서... 하지만 오래 입맞춤을 이어나간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잠시... 아니스 님...?”
말을 하다 문뜩 나는 그녀의 어깨가 움찔움찔 떨리고 있는 걸 자각했다.
마치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듯한...
의아한 눈초리로 물끄러미 쳐다보자 돌연 아니스가 폭소를 터트렸다.
지금까지의 진지한 분위기를 호쾌하게 날려버리는 웃음에 어안이 벙벙한 눈길로 멀뚱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조금 진정된 기색의 그녀가 찔끔 배어 나온 눈물을 훔치며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푸핫...! 푸흐... 정말이지.. 도란 넌 최고야..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크읏...! 흐읏...”
“...혹시 지금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 정말 모르겠어?”
아니스가 웃음기를 거두지 못한 얼굴로 턱짓했다.
그녀가 가리키는 데로 옆을 돌아보자 그곳엔 니아가 폭삭 익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야.”
“네...?”
“아실리가 널 시험한 거라고..”
“.....”
네?
“뭐, 뭐야?! 그럼 알면서 왜 안 말해줬어요!!?”
“나, 나도 아실리가 웃는 걸 보고 방금 알았단 말야!! 저 능구렁이 같은 년이...!”
“니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또 두 시간 동안 벽만 보고 서 있고 싶어?”
“윽...!”
아실리가 어여쁜 입술을 깃펜으로 톡톡 두드리며 윙크하자 니아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조련사에게 조련당하는 짐승처럼 고분고분한 모습.
생소한 니아의 일면에 놀랍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나는 아니스를 올려다보며 원망 반, 아직도 긴가민가한 심정 반으로 물었다.
“...왜 절 떠본 겁니까?”
“응? 남녀 간의 연애사만큼 재밌는 것도 없잖아? 나는 차기 공작 후보라 연애를 할 수 없는 처지니 이렇게라도 대리만족하는 거지. 악감정은 없지만 내 귀염둥이 니아를 확 채간 게 살짝 괘씸해서 골려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렇습니까?”
“그래, 근데... 벌써 볼 장 다 봤을 줄 알았는데 우리의 ‘소년’은 꽤나 성실한가 보네? 내 동의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준 거지?”
“....”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니스가 부드럽게 눈매를 휘며 말했다.
“고마워 도란. 니아를 소중하게 대해줘서. 녀석은 내 가족보다도 더 진짜 가족 같은 동생이거든. 지나친 오지랖이라는 건 알지만 도란이 만약 정말로 니아에게 손을 댔으면 솔직히 속으로는 조금 실망했을 거야. 쟤는 한번 꽂히면 뿔난 멧돼지처럼 이것저것 안 가리고 달려들다 보니 네가 쉽게 이용해 먹을 수 있었을 테니까.”
“...멧돼지가 아니라 아무르 표범이거든?”
“그래 그래, 아무개 고양이 니아 양.”
“고양이 아니야!! 그리고 아무개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아무르 표범이라고...!!”
“그래, 이무기 표범 니아 양.”
“이무기도 아니라니까!!”
니아가 자리를 박차더니 아니스 곁으로 달려가 외견에 걸맞은 소녀처럼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깨달았다.
아니스가 얼마나 니아의 속앓이를 꿰뚫어 보고 있었는지.
단순 길드원 따위가 아니라 인생의 선배로서, 참된 언니로서 니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전해져왔다.
“아, 그래도 피임은 꼭 해라? 니아 얘는 너라면 뭐든 좋다고 앞뒤 안 가리고 해댈 것 같거든. 말 그대로 앞뿐만 아니라 뒤로 한다던가. 몸에 무리가 가는 행위도.”
...가끔 재밌는 장난감으로 여길 때도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고 보란 듯이 묘한 손장난을 치는 아니스를 난감하게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니아 님 몸에 무리가 가는 행위는 일절 하지 않을 겁니다. 말씀대로 피임도 확실하게 할 거고요. 니아 님은 제게도 소중하니까요.”
“그래, 백 점짜리 대답이야.”
“.....”
“오백 점이 만점이라면.”
“네...?”
“뭘 그렇게 어벙한 표정을 짓고 그래. 네가 여기 찾아온 건 그것 때문이 아니잖아. 이야기의 본질을 잊었어? 그렇다면 조금 실망인데...”
“아...”
이야기의 본질.
앞으로 니아의 처우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피처럼 새빨간 적안 내부로부터 차갑게 타오르는 불길을 보고 소리 없이 경악했다. 아니스의 ‘시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으며.
사실 처음부터 니아가 자유롭게 활동할 권리를 얻어낼 심산이었지만, 격정적으로 타오르다가도 싸늘하게 돌변하는 아니스의 화술에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겨버렸다.
밑천을 다 드러내고 포커에 응하는 기분.
아니스의 올곧은 시선으로부터 상대의 노림수를 전부 꿰뚫고, 손해 보지 않는 교섭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냉철한 이지가 전해져왔다.
이제껏 장난스럽게 툭툭 던진 것도 전부 내 손패를 확인하려는 의도였을 터. 살랑살랑 흔들리는 깃펜 끝부터 입술에 머금은 미소 한 점까지 사소한 몸짓 하나에도 상대의 마음을 쥐락펴락하고자 하는 날카로운 살수가 녹아들어 있었다는 걸 깨닫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로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되는 상대.
정치와 교섭에 이골이 난 구렁이를 대상으로 난 원하는 걸 쟁취할 수 있을까.
‘...기세에서 밀리면 안 돼.’
강하게 나서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차갑게 호흡을 가다듬고, 눈빛을 갈무리하며 아니스에게 고했다.
“순순히 니아를 내놓으시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