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362화 (362/375)

〈 362화 〉 휴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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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휴식 #5

“...도란님, 그래서 그건 왜 그러신 거예요?”

“응? 뭐가?”

“솔선해서 길드에 들어가겠다고 한 것 말이에요. 물론 붉은 매 길드는 누구나 선망하는 꿈의 파티 중 하나지만... 도란님은 계속 입단 제의를 거절해 오셨잖아요.”

“아, 그거?”

나는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라디를 돌아보았다.

“다 생각이 있어. 어차피 아직 정식으로 입단한 것도 아니니까 벌써부터 이것저것 고민할 것도 없고.”

내가 붉은 매 길드원이 되면 라디와 아리엘을 비롯해 소중한 사람들과 보낼 시간이 줄어들 텐데 선뜻 받아들일 리가 없지.

입꼬리에 묘한 미소를 자아내자 라디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전방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대단하네요... 정말로 아니스 님과 결판을 짓고 오다니... 사실 독대할 기회를 얻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결국 도란님이 원하던 결과를 이끌어냈잖아요. 주제가 주제다 보니 마냥 가볍게 대화를 나눌 수만도 없었을 텐데...”

“그래, 진짜 포스가 장난 아니더라. 솔직히 조금 쫄렸어. 최상위 귀족에다가 정치 쪽으로도 이골이 난 사람이라서 그런지 교섭 능력도 장난 아니고.”

상대의 페이스를 무너뜨려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가져오는 화술도 상당하지만, 나중에 상세한 전말을 전해 듣고 나서야 그녀가 얼마나 치밀한 사람인지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분노한 척 연출하며 터트렸던 마나 파동의 이면에는 날 시험하려는 목적 외에도 마력 적성이 없었던 내가 그간 마나를 각성했는지 확인하려는 의도가 섞여 있었다던가.

영주성 소동에 니아가 가담했다는 걸 듣자마자 발빠르게 정보원을 파견해 사태를 파악한 뒤, 우리 일행이 던전에 도착할 시간을 예측해 준비하고 니아의 처우부터 나를 포섭할 계획까지 전부 마쳐놓았다던가...

물론 종국엔 내가 아니스의 예상 범주를 뛰어넘는 힘으로 한 방 먹여주긴 했지만.

결코 방심할 수 없으면서도 참 감사한 사람이다.

애초에 나와 라디의 생명의 은인이 아니던가?

철두철미하고 냉철함과 동시에 따스하고 인격적이었던 그녀의 면모를 떠올리고 있자니 아리엘이 뺨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래도 그건 좀 의외였어. 유적에서 구한 술을 선물한 것 말야. 도란은 언제라도 술을 팔아서 거액을 챙길 것처럼 말하곤 했으니까.”

“아, 그거? 확실히 내다 팔면 좋긴 하지...”

하지만 어차피 밖까지 가져가면 처분하기도 곤란할뿐더러 유적의 존재를 외부에 밝혀야 하니까.

그리고 아니스에게 헌상하면 반드시 모종의 형태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전혀 아깝지 않다.

아직 우리가 소비할 양은 잔뜩 남아있기도 하고.

게다가...

‘...꽤 통쾌했지 그거.’

술독을 짊어진 개미가 줄줄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의 표정은 참 압권이었다.

그 천하의 아니스가 입을 쩍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을 정도니.

아무리 그래도 불현듯 입꼬리를 올리며 ‘뭐야, 도란 너 이젠 나까지 꼬시려는 거야?’라고 뱉었을 땐 조금 당황했지만.

‘조만간 비아투스 어르신과 아델 누나한테도 드릴 술을 골라볼까...’

체형부터가 오크통과 판박이인 드워프 종족이라서 그런지 주류에 환장하는 비아투스 님은 두말할 것도 없고, 아델 누님도 꽤나 음주를 즐기시는 것 같았으니까.

깜짝 선물을 받았을 때의 뺨을 붉히고 당황하면서도 기뻐할 아델 누나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리자 라디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저희는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예요? 숲에 들어온 지도 꽤 지난 것 같은데...”

“아, 거의 다 도착했어. 중간중간 사유지라고 적힌 팻말도 지나쳤으니까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아, 저기 봐봐!”

빽빽하게 하늘을 채운 나무들을 지나치던 중, 시원한 밤바람이 머리를 간질이고 널찍한 개활지가 나왔다.

푸릇푸릇한 목초와 들꽃이 수려하게 돋아난 숲속의 공터. 달빛이 기울어져 은은한 광채를 머금은 잔디 주위로는 야트막한 울타리가 둘러져 있고, 졸졸 흐르는 개울 근처로 자그마한 통나무집 두 채가 보였다.

울타리에는 지금껏 이 숲에 발을 들이고 수없이 마주쳤던 붉은 도료가 칠해진 목판과 함께 ‘붉은 매 길드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경고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다.

‘붉은 매 길드원만 출입 가능이라...’

나도 이제 붉은 매 길드(진) 이니 괜찮겠지.

피식 실없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당당하게 울타리 쪽문을 젖히고 부지 안으로 들어섰다. 제법 안락해 보이는 흔들의자와 해먹, 숯과 부집게 따위가 완비된 바비큐 그릴을 지나쳐 통나무집 현관에 도달하자 향기로운 나무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잠시 랜턴을 랜턴 걸이에 걸어둔 뒤, 아니스가 준 열쇠 뭉치로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늑한 실내가 시야에 들어온다.

“오... 생각보다 훨씬 좋은데? 관리도 꾸준히 잘한 모양이고...”

“그러네요... 가구도 있을 만한 건 다 있어요. 식탁이랑 의자랑... 간이 소파도..”

“와...! 양탄자 엄청 두껍고 푹신푹신하다...! 던전에 이런 양질의 물건을 가지고 오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찬장에 다도구와 식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걸로 차를 끓여 마시거나 조리도 마음껏 할 수 있겠습니다.”

­됴란!

천천히 실내를 둘러보았다. 집 전체에서 침엽수 특유의 은은한 솔잎 향기가 풍기는 데다, 환기도 잘 되고 창틀마다 꽂아둔 타린 잎사귀 덕분에 벌레도 없고 청결하다.

마치 신혼부부가 조용하고 오붓하게 신혼을 즐기거나 여름 별장으로 쓰기 적절한 장소.

‘...그래도 저건 조만간 치워둬야겠네.’

타린 잎사귀는 개다래나무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만큼 자칫하다간 니아와 실비가 발정할 수도 있으니까.

검지로 쓸어도 먼지 하나 묻어나오지 않는 가구들의 관리 상태에 감탄하며 거실 한켠에 배낭을 쌓아두던 차, 아리엘이 방 안쪽에서 손짓했다.

“도란! 이거 좀 봐봐! 여기만 나무 재질이 조금 다른데 이거 혹시...”

“잠깐만, 이것만 마저 하고... 어디 보자, 음... 맞는 것 같은데?”

이 특유의 옹이 흔적과 은은한 핑크빛이 감도는 색상, 치밀한 목질과 나뭇결은 편백나무에서 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편백나무는 습기에 강한 걸로 유명하고.

또 커다란 대야가 마련되어 있고, 바닥에 배수구로 보이는 구멍이 뚫려 있는 걸로 보아...

“욕실인가 본데? 이야... 솔직히 던전에서 욕실 딸린 집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우와! 너무 잘됐다!! 혹시 씻기 불편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게다가 이 쪽문을 열고 나서면 야외 사우나와도 연결된 모양이에요. 붉은 매는 대형 길드답게 직원 복지가 확실하네요...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러게...”

하기야, 굳이 비유하자면 지구의 대기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집단이니까.

물론 이는 길드원을 위해선 지원을 아끼지 않는 아니스의 털털한 성격이 크게 한몫했겠지만.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근처에 개울이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란이의 도움을 받아서 손쉽게 온욕을 즐길 수 있을 터, 욕조 크기가 작아서 여섯 명 전원이 동시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해도 나눠서 입욕하는 건 충분히 가능할 거다.

“좋은 곳이네... 그러니까 이곳을 오필리아 상단이 건설했다고 했었나?”

또 오필리아 상단이라면 나와 아주 긴밀한 인연이 있는 곳이지 않던가.

저번에 니아로부터 암시장 근처에 통나무집을 짓고 살아가는 모험가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우리가 그 당사자가 될 줄이야.

여섯 명이 지내기엔 조금 좁을 수 있어도 그 북적거림이 묘미이리라.

여차하면 옆에도 별채가 하나 더 있으니 왔다갔다 하면서 두 채를 써도 되고.

적당히 욕실을 둘러보고 나오자 라디가 내 외투를 벗겨주며 물었다.

“...그럼 이제 도란님은 어떡하실 거예요? 이대로 야식을 해 먹을 수도 있고, 씻어도 되는데...”

“뭐... 오늘은 그냥 대충 짐만 풀고 자자. 엄청 피곤하거든. 아니스 님하고 얘기하다 보니 진이 다 빠져서...”

무엇보다 여기서 더 뭔가를 했다간 아침까지 잠들지 못하고 쪼옥 빨릴 것 같으니까.

아까부터 힐끔힐끔 이쪽을 의식하며 뺨을 붉히는 아리엘이나 쉬지 않고 꼬리 끄트머리를 흔들거리는 라디, 붉은 매 길드 막사에서의 담판을 마치고 난 뒤로 말없이 내 주변을 빙빙 맴도는 니아도 신경 쓰이고...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몸보신에 좋은 음식으로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겠는데...

“...그럼 다들 잘 자.”

나는 대충 짐을 마저 정리한 후,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비몽사몽 한 눈꺼풀을 깜뻑거리며 상체를 일으키자 산새의 지저귐이 귓가에 울려퍼지고, 창밖으로 살랑거리며 수풀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창가를 지나 실내에 격자무늬를 드리우는 햇살의 밝기로 보아 벌써 오후에 접어든 모양.

느즈막한 숲속의 공기에 기침하며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칼로 침실을 나서자 부엌에서 식기를 정리하는 실비가 보였다.

한데...

‘저건 또 언제 가져온 거야...’

하늘하늘 치마 밑단을 장식한 귀여운 프릴과 고양이 귀 사이에 걸린 새하얀 카츄사, 가터벨트 사이로 삐져나와 묘한 욕정을 자극하는 허벅지까지.

메이드복 풀세트에다가 앞치마까지 차려입은 모습.

그야 의류는 부피가 작고 가벼우니 가져오려면 얼마든 가져올 수 있었을 테지만...

내가 뒤에서 보고 있는 건 꿈에도 모른 채 무방비하게 가사에 열중하는 실비를 보자 장난기가 샘솟았다.

나는 집안에서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녀석의 뒤로 다가가─

“꺅­?!”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메이드복은 또 언제 가져왔어.”

“그, 그...! 노예로서 어디에서든 주인님께 봉사하기 위해...! 혹시 시끄러우셨습니까?”

“아니, 마침 딱 좋을 때 깼어. 애들은 어딨어?”

“라디 님은 생필품을 구매하시기 위해 한 시간 전에 외출하셨고, 아리엘 님도 암시장이 궁금하다며 따라 나가셨습니다.”

“...란이랑 니아는?”

“란이 님 또한 라디 님이 데려가신 듯하고... 니아 님은 밖에 계십니다.”

“그래?”

나는 그제야 실비의 몸을 끌어안은 두 팔에서 힘을 뺐다.

녀석을 쓰다듬어주고 돌아서서 대문 밖으로 나서자 너른 잔디 위에 서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니아가 눈에 들어온다.

따스한 햇살을 한껏 머금어 찬란하게 반짝거리는 금발과 바람에 맞춰 살랑이는 얼룩무늬 꼬리.

나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다가가 나란히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니아가 천천히 이쪽을 돌아보자 상냥하게 어깨를 짚으며 물었다.

“뭐 하고 계셨어요?”

“.....”

니아가 어른스럽게 미소짓더니 도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그냥... 여러모로 복잡해서... 앞으로의 일도 그렇고, 반갑게 맞이해주는 길드원들이나... 길드에서 나온 거나... 그냥 그런 거...”

“...제가 괜한 짓을 한 걸까요?”

“아니, 말했잖아. 나는 소년과 함께라면 뭐든 좋아. 길드도 그저 머리를 비우고 어딘가에 속해 있을 곳이 필요했던 건데 이제는 도란의 옆자리가 내가 있을 장소니까.”

“...저도 그래요.”

니아의 손을 꼬옥 맞잡아주었다.

그렇게 서로 손을 맞잡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그녀가 살며시 내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오늘은 뭐 할 거야?”

“음... 우선 암시장에 나가보려고요. 최소 이 주에서 길게는 한 달까지 이곳에서 지낼 예정이니까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잖아요. 침대보도 새 걸로 갈고, 먹거리도 미리 사두고, 어제 차마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만나서 인사하고...”

“그 다음엔?”

“뭐... 암시장에서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배불리 먹고.. 해일이랑 메라랑 놀아주기도 하고.. 란이랑 목욕도 하고...”

“그리고... 그 다음엔...?”

“....”

나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니아를 끌어안았다.

니아는 그것만으로 알아듣고 달그레 뺨을 붉히며 내 품에 안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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