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4화 〉 휴식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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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 휴식 #7
“이야, 저기 봐봐! 구애하려나 본데?!”
“어디 어디?! 또 이런 볼거리를 놓칠 순 없지!”
“.....”
북적거리는 인파를 제치고 다가가자 자매처럼 사이좋게 노점에서 물건을 고르는 라디와 아리엘이 시야에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녀석들의 옆에서는 질 좋은 양복을 입은 뚱뚱보 중년 한 명이 막 이벤트를 벌이려던 참이었고.
남자는 시종이 손수건을 깔아주자 엉거주춤하게 한쪽 무릎을 꿇더니, 오페라 배우처럼 과장된 몸짓과 억양으로 외쳤다.
“크흠... 흠! 아아! 나는 아밀롱 자작가의 차남, 볼루뉴라고 하오!! 내 비록 마흔에 접어든 불혹의 나이지만 춘부들에게 이십 대 못지않게 절륜하다는 평을 받는 바, 내 그대들을 아내로 맞이하면 평생 돈 걱정 없이 펑펑 놀고먹게 하리라!”
“오오 자작 가문이면 꽤 높잖아! 거기다 차남이면 계승권은 없어도 나름 권력가고!”
“그러게... 가문명은 들어본 적 없어도 꽤나 솔깃한데... 제법 강해 보이는 호위까지 대동하고 있는 걸 보니 돈도 좀 있는 모양이고...”
“과연 받아들일까?”
모험가들이 수군거리며 라디와 아리엘을 응시했다.
나도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궁금해 몰래 지켜보자...
“...언니, 이중 어떤 양말이 도란님한테 더 어울릴까요?”
“음... 난 검은색이 더 나아 보이는데? 머리색이 같잖아!”
“그러게요... 하지만 이건 종아리까지 덮는 형식이라 도란님한테는 조금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 그러네... 그럼 그냥 둘 다 살까? 남녀 공용이니까 남는 건 우리가 신거나 니아 님 드려도 되잖아.”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
깔끔한 외면.
남자가 온갖 폼을 잡은 채 고백했지만 라디와 아리엘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마저 물건을 고르는 데 열중했다.
그러자 무안해진 중년 남성이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손짓했다.
이내 하인 두 명이 묵직한 목함을 낑낑거리며 들고 와 귀족이 건넨 황금 열쇠로 뚜껑을 열었고...
“우와아아아!!! 저거 봐봐!! 저기 저 안에 담긴 것 진짜 황금이야?!”
“진짜 장난 아닌데...!? 저 정도 금은보화면 평생 놀고먹고도 남겠어!”
“그, 그럼 이건 어떠냐?! 이번엔 넘어갈까?!”
중년 귀족이 보란 듯이 금화와 보석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며 과시하자 주변에서 술렁이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대망의 라디와 아리엘은...
“언니, 그럼 이건요? 도란님이 잠옷으로 입기에 딱이지 않아요? 저번에 메라가 실수로 도란님 잠옷을 물어뜯는 바람에 하나 모자라잖아요.”
“응... 좋은 생각이야! 근데 이건 기장이 조금 짧아 보이네... 도란은 키가 크니까 좀 더 큰 사이즈로 없으려나...?”
“.....”
두 녀석은 귀족의 고백 따위 안중에도 없이 가판대에 진열된 상품을 둘러보았다.
이쯤 되면 살짝 불쌍해질 지경.
이에 중년 귀족은 두꺼비 같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뒤뚱뒤뚱 자리에서 일어나는가 싶더니...
“이, 이 몸이 무릎까지 꿇었는데...! 감히 일언반구도 없이 무시해?! 얼굴이 반반해서 내 친히 관심을 가져주었더니 이 싹바가지 없는 년들이...!”
“.....”
“네년들이 아밀롱 가문을 무시하고서도 이 왕국에서 무사할 것 같아!!!”
“....”
“으윽...!! 이래도 안 돌아보다니!! 천것처럼 목걸이랑 팔찌는 무슨 길바닥에서 굴러다니던 싸구려를 그대로 주워와서는...!”
“....!”
아.
화났다.
내가 선물해준 장신구를 폄하한 게 심기를 건드렸는지 라디와 아리엘의 미간이 희미하게 찡그려졌다.
눈치도 없는데 집요하기까지 한 귀족 남성이 손짓하자 그의 등 뒤에서 대기하던 기사 두 명이 강압적으로 창대를 두드리며 라디와 아리엘에게 다가갔지만─
“...성가시네요. 버러지만도 못한 새끼들이...”
“으윽...?!”
“커허헉...!”
라디가 왼쪽 손목을 비틀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픽픽 쓰러졌다.
귀족 중년이 당황하며 외쳤다.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이 새끼들은 왜 갑자기 졸고 자빠졌어?! 야, 늬들 당장 안 일어나?! 짤리고 싶어!?”
“.....”
“제기랄... 이래서 천것들은 믿을 만한 게 안 된다니까...! 이렇게 된 거 내가 직접 사로잡아서 침소로 끌고 가겠다...!!”
채앵!
남자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칼자루에 보석이 주렁주렁 박힌 장검. 외견에만 너무 치중한 나머지 무게중심도 맞지 않아 실전용보단 실내 장식에 어울리는 칼이다.
마치 주인의 허영심 가득한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한 듯한 검.
아무리 그래도 이대로 방치했다간 일이 커질 것 같아 나는 군중들을 제치며 살며시 그녀들의 옆으로 다가갔고
“꺅?!”
“읏...!?”
배후에서 라디와 아리엘의 허리를 끌어안자 새된 음성이 새어나왔다.
두 녀석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돌아봤지만 스킨쉽의 상대가 나인 걸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놀랐어?”
“네, 당연하죠... 하마터면 쏠 뻔했잖아요. 평소에는 냄새나 기척으로 알아챘을 텐데 이곳은 워낙 사람이 복작거리니까...”
“깜짝 놀랐잖아 도란...”
“미안미안, 방금 왔는데 끼어들 타이밍을 보고 있었지. ...저 기사들은 숨통을 끊은 거야?”
“아뇨, 그냥 잠깐 수면제로 재운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죽였다간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아서요.”
“잘했어.”
라디가 슬며시 왼팔을 내리자 장전된 쇠뇌 끝에 번들거리는 액체가 발라져 있는 게 보였다.
저 특유의 우유 빛깔은 아마 열대성 독초에서 추출한 마취약일 터, 정맥에 정확히 주입해야 효력이 나타나는 걸로 알고 있다.
녀석이랑 꽤 오랜 기간을 함께하다 보니 이젠 나도 겉모습만 보고도 얼추 무슨 독인지 판별할 수 있을 지경.
신들린 저격 솜씨에 감탄하며 살며시 내게 어깨를 기대는 라디의 연색 머리칼을 쓸어주고 있자니 중년 남성이 시뻘겋게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너, 넌 뭐야?!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왜 내 여자들이랑 친근하게...!”
“뭐? 내 여자? 라디랑 아리엘이 언제부터 네 여자였어. 얘넨 내 아내들이니까 구경 다 했으면 이제 꺼져.”
“뭣...?! 지, 지금 뭐라...!”
“꼽사리면 꼽사리답게 구석에 짜져 있으라고. 기왕이면 얼굴에 좔좔 흐르는 기름도 좀 닦고. 덤으로 그 중고 장터에서 떨이로 구해 온 것 같은 옷도 좀 갈아입고.”
“이, 이 무슨 치욕을...!!”
중년이 눈에 핏대를 세우고 노발대발하며 검 손잡이를 쥐락펴락했다.
반면 나는 여유 있는 스탠스를 유지하며 언제든지 맞받아칠 요량으로 미소지었고.
한데...
인파 속, 한 남자가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자, 잠깐...! 저기 남자 옆에 황색 후드... 혹시 니아 님 아니야?!”
“에이 그럴 리가... 듣자하니 니아 님은 지금 휴가 중이라며. 아예 던전 밖에 있다던데.”
“아냐!! 내 지인의 지인이 붉은 매 길드원이라서 아는데 어제 다시 복귀했데!!”
“그게 정말이야?!”
“그래!! 그리고 이건 아직 확실하지는 않은데 니아 님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내부 소식이...”
““말도 안 돼!!””
“그 순수하고 여린 니아 양에게 애인이라고?!”
“.....”
나는 멋쩍게 니아를 끌어당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베라스틴 밖에서 이런 반응을 보니까 꽤 신선할 따름.
이에 니아가 천천히 후드를 벗자 따스한 오후의 햇살 아래 아름다운 금발이 유여하게 드러나고, 장난스러운 빛조각이 그녀의 눈꺼풀과 콧날에 선명한 윤곽을 드리웠다.
길을 잃은 아기 천사가 지상에 도달한 듯 숨막히게 어여쁜 자태에 관중들이 입을 쩍 벌린 채 얼어붙자 니아가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허리춤에 안겨들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검을 늘어뜨린 채 니아의 외모에 홀려 있던 귀족 중년은 그제야 제정신을 되찾고 눈초리를 매섭게 뜨며 읊조렸다.
“니아 양... 지금은 휴가 중이라고 들었는데... 그보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붉은 매 길드로서 당장 나서서 저들을 징벌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 하찮은 평민 따위가 아밀롱 자작가의 차남, 저 볼루뉴에게 기어오르는...!!”
“응? 내가 왜?”
“왜라니...! 그야 붉은 매 길드에서 이 암시장의 치안을 담당...”
“난 붉은 매 길드에서 나왔는데?”
“네...? 그, 그게 무슨...”
“나 대신 낭군님이 길드에 들어가기로 했어. 이제 여기 내 낭군님이 붉은 매 길드 전투원이야..”
““뭐?!! 낭군님!?!””
“게, 게다가 니아 님이 붉은 매 길드에서 나왔다니...!”
사방에서 경악성이 들끓었다.
파리가 드나들 기세로 입을 벌린 채 꼼짝할 엄두도 못 내는 사내, 내게 다소곳이 안겨 있는 니아를 보고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좌절하는 남자, 특종이다 특종이야!! 를 연신 남발하며 사방으로 뛰쳐나가는 사람들.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보란 듯이 니아의 귀를 어루만지자 한 모험가가 삿대질하며 외쳤다.
“자, 잠깐...! 그렇다면 저 남자가 바로 그 사람 아냐?! 그 화제의...!”
“장신에 마른 근육질 체형. 검은색 로브. 맞는 것 같은데...?”
“베라스틴의 영웅이다!! 영주를 두들겨 패서 끌어내렸다던 귀족 킬러!!”
“듣자 하니 여성 편력이 어마어마하다던데...!! 무려 후작도 하렘 멤버로 만들었데!!”
“그, 그렇다면 저들 중 하나가...”
“.....”
조용히 사태를 주시하던 아리엘이 후드를 벗자 미모에 놀란 인파로부터 탄성이 새어나왔다.
반면 이중 한 남성은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안면을 푸르죽죽하게 물들였고.
귀족 중년이 아연실색하며 중얼거렸다.
“그, 그... 비단실처럼 고운 은발에 푸른 벽안은... 에르티넬라 후작 가문의 상징... 서, 설마...”
“.....”
“히익...!”
귀족 중년이 황급히 엎드리자 아리엘이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고했다.
“아밀롱 자작, 아니 볼루뉴 차남이라고 했나요?”
“으, 으윽...! 그, 그렇습니다 에르티넬라 양...! 제, 제가 죽을 죄를...”
“에르티넬라 양이 아니라 에르티넬라 후작입니다. 당신이 이곳에서 범한 무례를 알고 있나요.”
“허흑!! 그, 그게... 공교롭게도 에르티넬라 후작님의 천사 같은 미모에 눈이 먼 나머지 제가 잠시 이성을 놨나 봅니다!! 이는 반드시 후작님이 만족하실 수 있도록 충분히 배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최고급 주류와 안주가 완비된 제 마차에서...!”
“거절하겠습니다. 제 약혼자와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군요. 이번 일은 저희 가문을 통해 아밀롱 자작가에 정식으로 항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네?! 그, 그것만은 절대로...!! 제, 제발 무슨 짓이든 하겠으니...!!”
“두 번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눈앞에서 사라져 다시는 낯짝을 보이지 마세요. 만약 이에 불복하면 그대에게 불경죄를 물어 저희 에르티넬라 가문에서 아밀롱 자작가의 모든 재산과 영지를 압류하도록 하겠습니다.”
“.....”
“못 들었습니까. 썩 물러나세요.”
“으, 으윽...!”
남자는 엉금엉금 바닥을 기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나 실비의 어깨를 쿵! 치고는 군중 사이로 녹아들었다.
놈의 마지막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보니 괜히 이상한 일을 벌이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데...
귀족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하고 난 뒤, 나는 살며시 아리엘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괜찮아? 많이 놀랐지...? 혹시 어디 다치거나 한 곳은 없어?”
한쪽 무릎을 구부려 눈높이를 맞추고 그녀를 살펴보자
“어, 어떡하지 도란...?”
“응?”
“나 혹시 이상하지 않았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압적으로 나서는 건 처음이라... 막 횡설수설했다거나...!”
“언니 진짜 멋졌어요!! 진짜 귀족의 아우라가 뿜어나오는 느낌이에요!”
“그, 그래?”
“응! 엄청 멋있었어! 아리엘도 이런 면모가 있었구나? 그 뚱땡이 얼굴 봤어?! 완전 시퍼레졌던데?”
“뭐... 그놈처럼 배경만 믿고 설치는 놈들은 자신보다 더 높은 신분으로 찍어누르는 게 쥐약이니까... 아, 그러니까 여기서 쥐약은 진짜 쥐를 잡는 게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으로...”
“...알거든요? 그보다... 실비야 괜찮아? 혹시 다치지는 않았어? ...잠깐, 근데 너 손에 그거 뭐야?”
황급히 말실수를 무마하려는 차, 라디는 태연하게 흘려보내곤 실비에게 다가갔다.
하필이면 도망치는 귀족의 진로에 서 있던 까닭에 어깨를 부딪친 실비가 다친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자니 녀석이 천천히 손아귀를 펴며 대답했다.
“저... 그게... 저도 모르게...”
“...어? 황금 열쇠? 너 그거 설마...!”
“그... 죄송합니다! 귀족이 갑자기 이쪽으로 달려들어서 무심코...”
“.....”
그러고 보니 실비의 특기 중 하나가 소매치기였지.
나는 씨익 잔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실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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