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화 〉 휴식 #8
* * *
[365] 휴식 #8
“자 그럼... 쓰리, 투, 원... 슛!”
퐁당!
농구 선수처럼 자세를 잡고 깔끔한 3점 슛을 선보이자 반짝이는 황금 열쇠가 포물선을 그리며 연못에 빠져들었다.
일렁이는 파문과 함께 수면 아래로 녹아드는 금빛 잔상에서 등을 돌리고 손바닥을 탁탁 털어내고 있노라니 아리엘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으음... 정말로 괜찮은 걸까? 그거 그 귀족한텐 꽤 중요한 걸 텐데... 그 보석함을 여는 열쇠잖아.”
“괜찮다니까. 예비 열쇠쯤이야 가지고 있겠지 뭐. 그리고 저걸 계속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 괜히 성가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자연에 환원했으니 도둑질도 도둑질이 아닌 셈이고.”
“...논리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한 방 먹여준 건 잘했다고 생각해요. 아까 그 두꺼비처럼 음흉한 시선을 떠올리면 속이 메스꺼워서...”
“그래, 다음번에도 수작을 부려오면 아랫도리를 확 걷어차서 뭉개버려. 뒤처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실비도 열쇠 잘 훔쳤어. 원래 범죄자를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건 범죄가 아니거든.”
“그... 주인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감사합니다.”
“그래, 그러니 다음번에 다시 만나면 또 해버려. 이왕 이번에는 더 비싼 걸로. 그 보석 박힌 검이라아아악!!”
“정말... 너무 신났잖아요. 그러다가 들키면 실비가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데... 너무 부추기지 마세요.”
“아, 알았어 항복! 항복!!”
절묘한 아픔이 귓불을 타고 내달려왔다.
재빨리 빌어 라디한테 붙잡혔던 귀를 돌려받고 살살 문지르고 있자니 아리엘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도란도 참... 근데 우리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어떻게 알고 왔긴. 저기서부터 인파가 쫙 깔려 있던데? 어마어마한 미소녀가 나타났다고 다들 떠들어대길래 바로 달려왔지.”
“...겨우 그것만 가지고?”
“겨우 그거라니. 세상에 그렇게 예쁜 사람이 너희 말고 또 누가 있다고. 물론 니아 님하고 실비도 포함해서.”
“으음... 솔직히 빤히 속 보이는 말이긴 하지만.”
“뭐... 기분은 좋네요. 나름 합격점인 걸로 해드릴까요?”
“그거 반가운 소리네. 근데 둘 다 뭐 보고 있었어? 손에 짐이 가득하던데.”
“아, 이거?”
아리엘이 손에 든 물품 꾸러미를 들어올리더니 골든 리트리버처럼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도란이 입을 옷이랑 속옷! 마침 마물 소재를 혼합해서 만든 튼튼한 옷을 팔고 있더라고! 어때,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나? 내가 입을 옷은 충분한데...”
“그러지 말고 이참에 한번 봐두세요. 베라스틴에서 들렀던 의류 매장도 여성 전용이라 도란님 옷은 별로 못 샀잖아요.”
“맞아 맞아. 그리고 도란은 우리한테는 항상 이것저것 다 해주면서 막상 본인한테는 엄격한 경향이 있으니까.”
“...알았어. 나중에 시간 나면. 그보다 옷 말고도 뭐가 잔뜩 있는데... 먹을 거야?”
라디와 아리엘이 든 짐을 살펴보니 양말이나 속옷 외에도 다양한 찬거리가 보였다.
통통하게 살찐 소시지나 고양잇과 수인이 좋아할 법한 북어포, 해일이와 메라에게 주면 좋을 듯한 대형 뼈다귀 등...
한데...
‘뭔가 아래쪽에 더 있는데...?’
굴이랑 부추, 아스파라거스도 있고... 목을 빼꼼 내민 채 죽어있는 자라와 복분자 액기스 등...
어째 식재료가 전부 정력에 좋기로 소문난 것들 아닌가?
멍하니 고개를 들고 쳐다보자 라디가 당당하게 지껄였다.
“앞으로 당분간 여기 암시장에서 머무는 동안 도란님은 공공재에요. 저희가 사이좋게 나눠먹고 돌려먹고 더 이상 안 나올 때까지 뽑아먹을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만약 혼자서 욕구를 해결했다간 가만 안 둘 거예요.”
“내 의사는...?”
“싫어요?”
“아뇨,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간 여러모로 다들 이 순간을 기다렸으니까.
나는 얌전히 종마를 자처하며 대로를 거닐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를 활보하며 애인들과 담소를 나누자 푸른 솔바람이 불어와 사람들의 면면에 생기를 부여하고 홀연히 사라진다.
이제 군것질거리가 식기 전에 배를 채워야 할 터.
적당한 장소가 없나 둘러보고 있자니 니아가 내 옷소매를 툭툭 잡아당기며 말했다.
“음... 밥을 먹을 곳을 찾은 거라면 저기 우물이 있는 공터는 어때? 햇볕도 잘 들고 좋아 보이는데.”
“오... 괜찮은데요? 청소도 잘 돼서 깔끔하고.. 음유시인이 있어서 분위기도 좋고...”
길드 주관으로 개발된 유료 우물이 위치한 공터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솔질하는 구두닦이 장인이나 사냥용 매를 훈련 중인 모험가, 난쟁이 화가 등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공터 구석에는 앉아서 쉴 수 있도록 파라솔 달린 벤치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공터가 아니라 광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
벤치 역시 우물처럼 이용료를 지불해야 앉을 수 있는 모양이지만, 금전에서 자유로운 우리로서는 쾌적하게 쓸 수 있으니 오히려 좋고.
손바닥을 맞비비며 다가온 관리인에게 동화 두 닢을 쥐여준 뒤, 노점에서 사 온 먹거리를 하나둘씩 꺼내서 음미하고 있자니 사르르 퍼지는 만족감에 좀전에 거리에서 겪었던 불쾌함이 지워지는 것만 같다.
한데 제각기 손에 쥔 음식을 서로에게 권유하며 정답게 식사를 이어가던 차, 라디가 복잡한 눈길로 니아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런데... 니아 언니는 오늘도 안 드시는 거예요? 아무리 니아 님이 튼튼하다고 하셔도 그렇게 극단적으로 식사량을 줄이셨다간 탈이 날 텐데...”
“응...? 걱정은 고맙지만... 난 괜찮아! 굶주림을 참는 건 어릴 때부터 익숙하거든! 마력으로 위장을 꽉 졸라매면 덜 배고프기도 하고!”
“아니, 왜 굳이 그렇게까지... 잠깐, 설마 금식하는 이유가...?”
라디가 니아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다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이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잡아당기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거에요?”
“응...? 그거라니...”
“...무슨 말인지 아시잖아요. 그거 말이에요...”
“....맞아.”
“흠...”
“....?”
어쩐지 이쪽에서 살며시 고개를 돌리고 빠르게 눈빛을 교환하는 두 녀석을 살피자 라디가 내 시선을 의식하더니 헛기침을 해 화제를 돌렸다.
“큼... 이 주제는 이따가 저희끼리 있을 때 다시 얘기해요. 그 니아 님도... 걱정되니까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고요. 그보다... 저기 누군가가 오는데요?”
“응...? 저건...”
라디가 턱짓한 방향을 돌아보자 그곳엔 광장 중심으로부터 한 남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루한 고깔모자와 끄트머리가 해진 남색 로브 차림. 넓은 모자챙 아래로는 과묵한 인상의 얼굴이 엿보이고, 손에는 리라를 들고 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어깨에 사랑 앵무를 태우고 있다는 정도.
보아하니 음유시인 같은데...
살짝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노라니 남자가 우리 테이블 앞까지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전 라라라고 해요!
“오오! 새가...!!”
“새가 말을 한다!!”
아니, 남자 대신 그의 어깨에 앉아있던 앵무새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말했다.
눈을 크게 뜬 채 신기하게 남자와 앵무새를 번갈아 보고 있자니 아리엘이 만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가 물었다.
“안녕? 앵무새야? 혹시 어느 쪽이 라라인지 알려줄 수 있겠니?”
내가 라라! 이쪽 모이통 따개는 해럴드라고 불러~♪
“.....”
아무리 그래도 주인한테 모이통 따개라니...
영특한 건지 영악한 건지 범상치 않은 앵무새를 쳐다보고 있노라니 녀석이 아리엘의 어깨로 건너 타 뺨을 부비며 말을 이었다.
있잖아~♩ 나 저기서 노래하고 있었는데 너무~~! 예쁜 소녀들이 보여서 왔어! 네 눈은 정말 보석 같구나~♪ 반짝반짝 옹달샘처럼 파래~!
“우와!! 얘 말하는 것 좀 봐! 너무 귀엽다... 너 혹시 춤도 출 줄 알아?”
물론이지! 잘 봐~ 딴따라~ 딴딴~♩
앵무새가 한 다리로 아리엘의 어깨 위에서 균형을 잡더니 날개를 접었다 폈다, 상체를 숙였다 말았다 하며 재롱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도중에 발을 헛디딘 척 부드럽고 푹신한 가슴골 사이로 안착해 깔깔 웃으며 뒹구는 걸 보니...
“...너 수컷이지.”
삐약?
“아니, 됐다.”
순간 속에서 피어오른 묘한 질투심을 억누르자 라디가 살며시 내 뺨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으이구... 이젠 설마 동물한테도 질투하는 거예요?”
“아니, 쟤 하는 행동 봐. 완전히 사람이잖아.”
“에이... 그래봤자 앵무새...”
누나~♪ 괜찮다면 혹시 나랑 견과류 먹으러 안 갈래~? 아삭아삭한 사과랑 코코 열매도 있어~
“거 봐.”
“그래도 앵무새...”
누나 찌찌 짱~ 푹신해~♪ 짱 부드러워~! 후와후와~~
“...이래도?”
“.....”
라디가 입을 다물자 아리엘이 여유로운 미소지으며 앵무새를 쓰다듬었다.
“어머, 신사 앵무새 씨. 아부가 제법이시네요. 하지만 전 이미 혼약을 약속한 사람이 있어서 데이트는 정중하게 거절할게요.”
으음...♪ 아쉽다! 아쉽다! ...그럼 대신 내 노래 들어줄 수 있어어~?
“노래? 무슨 노래?”
앵무새가 발톱으로 부리를 고르자 조용하게 서 있던 남루한 차림의 음유시인이 허리를 숙였다.
“이 앵무새는 모란앵무라 불리는 종으로, 십 년 넘게 합을 맞춰온 소중한 제 인생의 동반자입니다. 머리가 좋고, 애교도 많아 만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새죠. 어디, 아름다운 오후의 식사에 곁들일 음악이라도 한 곡 주문하시겠습니까.”
“음악이라...”
나는 음유시인이 든 리라를 곁눈질하며 잠시 생각했다.
앵무새의 애교로부터 물 흐르듯 이어진 흐름. 상술이라는 게 훤히 보이지만 다들 좋아하는데 이 정도는 눈 감고 속아줘도 괜찮겠지.
나는 기대에 찬 얼굴로 앵무새를 어루만지는 일행들을 둘러보고는 입꼬리에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어떤 노래가 있는데요?”
“손님이 원하시는 건 뭐든 불러드릴 수 있습니다. 오래된 구전 동요부터 왕도에서 유행하는 최신 가요, 과거 영웅들의 발자취를 찬미하는 서사시도 가능합니다. 또 귀족분이시라면 아리따운 애인들의 앞에서 귀인의 업적을 찬송하는 노래도 흔히 주문하시곤 합니다.”
“찬송이라...”
그런 건 딱히 관심이 없는데...
“...아니면 던전에서 유행하는 최신 정보를 담은 노래도 있습니다. 실속을 중시하는 모험가님들이라면 이쪽을 많이들 선호하는 편입니다.”
“음... 그건 좀 괜찮겠는데요? 혹시 리스트가 있나요?”
하기야, 음유시인이라면 매일 광장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전해 들은 이야기가 많을 터. 새로운 도시에 방문해서 정보를 구하고 싶으면 제일 먼저 음유시인을 찾아가라는 말도 있을 정도니까.
나름 식사 분위기도 살리고 실속도 챙길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긍정적으로 남자를 쳐다보자
“우선... 모험가 님 일행이 3계층보다 아래로 내려갈 거라면 이 노래가 도움이 될 수 있겠군요. 계층별 주요 마물과 지형, 그중에서도 요주의 몬스터를 다룬 노래가 있습니다.”
“오... 그리고 또 있어요?”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유명 대장장이 길드를 비롯해 현 암시장에 주둔해 있는 유용한 가게를 망라해둔 노래, 붉은 매 길드의 새로운 멤버에 대한 소문, 얼마 전 상위 계층에서 모험가들을 구하고 홀연히 사라진 새까만 거미 마물 이야기, 하이랭커들이 목격했다던 거대한 거수의 그림자...”
“어어...?”
“그리고... 이 던전에서 비밀리에 암약하고 있다는 S랭크에 관한 노래입니다.”
“....”
생각보다 뭔가 많은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