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7화 〉 휴식 #10
* * *
[367] 휴식 #10
“아니, 또 이러네...”
결국, 광장의 모든 상인에게 물어봤지만 홀연히 사라진 음유시인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남루한 남색 로브와 한 손에 든 리라, 화려한 사랑앵무까지 어깨에 대동한 탓에 한 번이라도 봤다면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외모인데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으로는...
“신... 인가...”
그래, 마치 농업의 신 티바르 님의 목장에서 나왔을 때와 비슷한 상황.
나는 광장 탐문을 마치고 쓰러지듯 벤치에 주저앉으며 아리엘을 돌아보았다.
“...아리엘, 아까 그 음유시인... 아니, 신이 누군지 알겠어?”
“으음... 솔직히 잘 모르겠어... 고깔모자에 가려서 얼굴을 잘 못 봤거든. 설마 그분이 신일 줄은 몰라서 유심히 안 살펴보기도 했고... 미안해..”
“미안하긴... 우리도 다 똑같은데 이런 일로 책임감 느낄 필요 없어. 그건 그렇고 너도 모른다라...”
“근데... 단서가 하나 있어.”
“...단서?”
눈썹을 추켜세우며 쳐다보자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그분이 음악의 신 아파니안 님의 거룩하신 축복이라는 말을 했잖아. 혹시 기억해?”
“응, 그것 때문에 굳이 노래로 이야기했으니까.”
“그래, 하지만 현재 음악의 신은 아파니안이 아니라 에우테르페야.”
“그건... 무슨 의미야? 신을 틀리게 말했다는 거야?”
“아니면... 현재라고 했으니 옛 신이라거나...?”
라디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리엘이 긍정했다.
“라디의 말이 맞아. 아파니안은 음악이나 시를 관조하던 신이야. 과거형인 건 말 그대로 과거기 때문이고. 음악을 담당하는 신은 대전쟁 이후, 그러니까 오래전에 에우테르페 신으로 바뀌었거든.”
“그렇다는 건... 지금 신이 아파니안을 밀어내고 음악의 신 자리를 꿰찼다는 말인데 그게 가능한 거야? 신이 아닌 존재가 신 자리를 찬탈했다고?”
“응... 역사를 뒤져보면 그런 전례가 생각보다 꽤 있어. 신도 완벽하기만 한 건 아니니까. 우리가 신학을 공부할 때 가장 제일 먼저 배우는 것도 ‘신은 전지하되, 전능하지 않다’라는 말이거든. 각자 전문 분야에 있어서는 통달한 분들이지만 그 밖에는 조금 특별한 인간에 지나지 않기도 하고, 신도가 얼마 남지 않거나 점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지면 늙기도 해.”
“...그래? 그건 좀 의외네... 신 하면 뭐든 가능할 것만 같은 이미지였는데...”
“그랬더라면 신 간의 위계도 존재하지 않았겠지. 극단적으로 예를 들면 비전투계열의 약소 신을 상대로는 도란이 무력으로 이기는 것도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야. 물론 상대 신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지만. 예를 들어 강력한 저주를 내린다던가, 다른 동료 신을 불러온다던가.”
“동료 신을 불러온다니.. 뭔가 엄청 현실적이네... 근데 그러면 우리가 만났던 분이 옛 음악의 신을 거론했다는 건 무슨 의미야?”
아리엘이 단서라고 했으니 이에도 분명 음유시인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을 법한 실마리가 숨어있을 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묻자 아리엘이 테이블에 놓인 과실음료를 들이켜며 말했다.
“...우리가 만났던 음유시인이 현세대의 신이었다면 음악의 신을 거론할 때 아파니안 대신 에우테르페 님이라고 말했을 거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건...”
“옛날 신... 그러니까 고대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네요... 아파니안 님과 동시대에 활동하던...”
“...그렇지.”
테이블 위에 묵직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우리가 방금 만났던 인물이 고대신, 그러니까 신 중에서도 특히 원로한 구시대의 잔재였을 줄이야...
“고대신이라... 보통 고대신 하면 크툴루 아니, 괴물처럼 섬뜩하게 생겼거나 특출나게 강할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닌가 보네?”
“물론 그런 신도 있어. 너무 강해서 다른 신들에 의해 봉인당했다던가... 대전쟁 이전에는 비인간 형태의 신도 꽤 많았고. 심지어는 스스로를 괴물로 만든 분도 계셨다나 봐. 그들에게 있어 인간의 육신은 짐이 될 뿐이니까.”
“으음... 뭔가 심오한 이야기네요...”
“...그럼 그 음유시인이 고대신 중 누구인지도 알겠어?”
“아니... 나도 거기까진... 음악에 관련된 하위 신 중 한 명이거나 어쩌면 아파니안 본인일 수도 있지만...”
아리엘이 말을 흐리며 수심에 잠긴 얼굴로 테이블을 응시했다.
표정이 꽤 어두웠기에 나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맞잡아주며 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아니 그냥... 뭔가 기분이 심란해서. 주제넘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만약 정말로 그분이 아파니안 님이었다면 조금 측은하잖아. 한때는 정말 대단하고 인기 많았던 신님이 지금은 남루한 차림으로 현세를 돌아다니시다니... 물론 일부러 그렇게 위장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
그야 (구)신이니 마음만 먹으면 가진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겠지마는...
내가 준 은화 세 닢에 진심으로 동요한 듯했던 모습을 보면 단순 위장뿐만은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든다.
잠시 찾아온 딱한 분위기에 대화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라디가 살며시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저희가 이번 일로 한 가지 더 알아낸 게 있는데...”
“...뭔데?”
녀석이 당연하다는 듯 날 돌아보며 대답했다.
“카야 님이요. 국내에서 활동 중인 몇 안 되는 S랭크 중 한 분이시잖아요. 대체 어떤 S랭크가 이 던전에 와 있을지 궁금했는데... 안 그래요 언니?”
“그러게... 나도 카야라는 이름은 종종 들어봤어. 하지만 그분은 유독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극도로 꺼려서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그분이라면 S랭크인데도 불구하고 목격담이 안 돌아다니는 것도 이해가 가네...”
“....”
“...뭐야, 도란은 안 놀랐어?”
“그, 그야 놀라운 소식이기는 하지만...”
전 진작에 그 사람이랑 만났는데요...?
그것도 두 번이나.
새삼 내 길드패가 그녀의 손에 들려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덤으로 카야는 라디가 존경하는 인물이라는 것도.
‘같은 성별인데다가 활을 잘 다뤄서 대단하게 생각한다고 했었나...’
이전에 라디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 S랭크 달성 조건을 묻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 언급된 적이 있었다.
S랭크는 모험가들의 우상인 만큼, 라디도 예외는 아닌지라 언젠가 카야처럼 멋지게 활을 다뤄보고 싶다고 했었고.
내심 복잡한 심경으로 집을 나설 때보다 확연히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니아가 턱을 짚으며 사뭇 진지한 태도로 중얼거렸다.
“으음... 그럼 이건 계획에 조금 차질이 생길 수도 있겠네... 큰일이야.”
“네? 뭐가요?”
“S랭크 카야가 이 던전에 와 있다는 거 말야. 우리 길드도 한가락 하지만 S랭크랑 접촉하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 보자는 주의거든. 그쪽은 진짜 통제할 수단이 없어서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으음... 니아 언니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하긴, S랭크가 무섭긴 하죠. 실은 워낙 희소해서 어지간해서는 평생 마주칠 일도 없긴 하지만...”
“제가 근무하던 치료원에서도 하이랭커를 대할 땐 조금 더 주의하라는 지침이 있었어요. 니아 언니처럼 밝고 친절한 사람만 있으면 좋겠지만 몇몇 하이랭커 중에는 난폭하고 다혈질인 사람도 많으니까요. 한데 그의 정점인 S랭크라면 얼마나 더 심할지...”
“하긴... 카야가 국내에서 문제를 일으켰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 없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주인님,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야...!”
실비가 조용하게 대화를 경청하던 내 안색을 살피며 묻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어색한 미소를 자아냈다.
솔직히 내가 봤던 그녀라면 무턱대고 사람을 죽이고 다닐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아예 없느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니까.
그 왜, 내가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자 실수로 활시위를 놓쳐서 날 죽일 뻔한 적도 있었고.
“저... 니아 님, 혹시 붉은 매 길드랑 카야랑 싸우면 누가 이겨요...?”
“음...? 그야 당연히 우리가 지지. 대판 깨질걸?”
“...그렇게 바로 대답할 정도로 차이가 나요?”
“응. 각 랭크 간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존재하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상위 랭크랑 맞먹으려 드는 소년이 이상한 거라구... 게다가 우리는 단체다 보니 보급대며 비전투원이며 약점이 여럿 존재하는데 반면 상대는 혼자잖아. 만약 밀림 같은 데 숨어서 활로 하나하나 초장거리 저격이라도 한다면...”
“...끔찍하네요.”
“그래, 게다가 그 S랭크 수인은 알려진 정보가 워낙 없으니까 더 그래. 조용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꺼린다는 정보 외에는 성격을 유추할 수 없어서 피하는 게 상책이야. 어쩌다가 지뢰를 밟아서 심기를 자극할지 모르니까. 그간 우리 길드와 접점도 전혀 없었고.”
“그렇구나... 한데... 앵무새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 있잖아요. 카야를 잘 부탁한다니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혹시 짚이는 거 있으세요 도란님?”
“으응?! 그,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뭘 그렇게 당황해요. 앵무새가 도란 님에게 말했으니 당연히 도란 님에게 묻죠.”
“그, 글쎄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에~”
“흐음...”
라디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살펴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테이블에 놓인 과실 주스를 단숨에 들이켰다.
몰래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차,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옷매무새를 단정히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면 이 얘기는 나중에 이어서 하고... 이제 슬슬 시간이 됐네요. 다들 가실까요?”
“으, 으응...”
“알았어!”
“알겠습니다.”
“....?”
라디가 말을 마치자 나머지 세 여인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쭈뼛거리는 듯한 니아와 온화하게 미소 짓는 아리엘, 담담한 표정의 실비까지 묘하게 단합력이 느껴지는 분위기에 미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보자 라디가 니아의 손을 붙잡으며 고했다.
“그럼... 저는 오늘 하루 동안 니아 님이랑 어디 좀 다녀올 테니 도란님은 아리엘 언니하고 실비랑 함께 계세요. 저녁도 저희끼리 알아서 해결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시고요.”
“가, 갑자기...? 어디 가는데?”
“그냥... 암시장에서 둘러볼 가게가 있어서요. 너무 자세히 묻지 마세요.”
“뭐...? 잠깐만! 적어도 언제 오는지는 얘길 해 줘야...! 라디! 니아 님!!”
재빨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손을 뻗었지만 라디는 니아를 데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나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