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9화 〉 휴식 #12
* * *
[369] 휴식 #12
일단 나오긴 나왔는데...
‘뭘 해야 할지 막막하네...’
나도 대충 이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 안다.
근처 개울에서 비누로 깨끗하게 씻었고, 나름 신경 써서 옷도 세련된 로브와 셔츠로 차려입었고, 아리엘에게 향수도 빌려서 표범 수인의 후각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 적당히 도포도 했다.
이제 니아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기만 하면 되는데...
“아니... 선물이라도 하나 들고 가는 편이 낫겠지...”
느즈막한 오후, 황혼마저 검게 물들어버린 암시장을 거닐었다.
해가 지고 난 후의 암시장은 색다른 정취가 흘러 자칫하면 길을 잃곤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기름 냄새 풍기는 랜턴을 손에 쥐고 대로를 오가고, 길거리에는 호롱불 담긴 종이 연등이 내걸렸으며, 사방에서 시끌벅적한 웃음소리와 기름 튀는 소리가 수조에 이는 물거품처럼 들려오면, 밤바람에 유유히 흔들리는 차양막은 컴컴한 바닷속에서 일렁이는 수초를 연상시켰다.
초롱아귀의 불빛에 이끌리는 먹잇감처럼 홀린 듯이 야시장의 조명 사이를 유영하고 있자니 사방에서 풍겨오는 냄새에 출출해진다.
‘간단하게 먹을 거라도 사갈까...’
니아는 요 근래 계속 굶었으니까.
사갈 만한 게 있나 시장을 기웃거리자 다양한 노점이 후보에 들었다.
매콤한 양념에 버무린 양꼬치와 닭 튀김, 감자 후라이 등...
그렇게 막 주류와 간단한 안주를 판매하는 포차 옆을 지나치려던 차
“야, 너 그거 들었어? 니아가 붉은 매 길드에서 나왔다는 소식.”
“아, 맞아. 그것 때문에 요즘 암시장이 시끌시끌하잖아. 듣자 하니 애인도 생겼다던데. 그 애인이라는 작자가 니아 대신 길드에 입단했다는 소문도 돌고.”
“아니스 그 사람도 참 매정하지... 어떻게 몇십 년간 함께 해온 동료를 단번에 갈아치울 수 있어? 아니면... 혹시 니아한테 문제가 생긴 건가?”
“문제? 무슨 문제...?”
“아니, 그 왜 니아는 요 몇 주간 던전 밖에서 휴가를 보내다 왔잖아. 그게 사실은 니아 본인한테 문제가 생겨서 그런 게 아닐까 해서. 모종의 사건으로 마력을 못 쓰게 됐다거나... 아니면 임신했다거나...”
“뭐?! 니아가 임신!?”
“쉿...! 어, 어디까지나 그럴 수 있다는 얘기야...!! 목소리 낮춰!”
“.....”
혹여나 누가 들을세라 모험가 두 명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터무니없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괜히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기에 조용히 지나치려는 차...
“사람들은 참 단순하지. 안 그런가?”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일말의 기척조차 감지하지 못했음에 식겁하며 돌아보자, 소리가 들려온 포차 구석엔 어색한 가발을 머리에 얹은 근육질 남성이 맥주잔을 들이켜고 있었다.
안도하며 대답했다.
“...디론 님이 이곳엔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 어제 새벽까지 당직을 섰잖아. 덕분에 오늘은 비번이니 술이나 마시면서 피로를 풀고 있었지. 어디, 도란 너도 한잔할래?”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그보다 방금 말씀하셨던 건...”
“아, 단순하다고 한 거?”
디론은 맥주를 입에 머금으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잖아. 다들 겉만 보고 평가하고, 떠벌리고 싶은 데로 떠벌리고. 니아가 어떤 마음인지는 안중에도 없이 지껄이고.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
“...디론 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왜. 난 사실 근육만큼이나 배려심도 넘치는 사나이라고.”
디론이 근육을 자랑이라도 하듯 양팔을 구부렸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포차 안으로 들어서자 그가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라더니 앞에 놓인 안주를 권하며 물었다.
“그래서... 도란 군은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그것도 혼자서.”
“아... 잠깐 따로 나왔어요. 마침 니아 님에게 드릴 선물을 고르고 있었는데... 혹시 추천하는 게 있어요?”
“아하, 너희 싸웠구나?”
“.....”
대충 그런 셈 치고 어깨를 으쓱하자 디론이 턱을 짚으며 고민하더니 문뜩 씨익 입꼬리르 올리며 말했다.
“글쎄... 선물이라면 진짜 좋은 게 하나 있긴 한데...”
“...뭐죠?”
“너.”
“....”
아니...
괜히 기대했던 게 무색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디론은 날 힐긋 쳐다보고 맥주를 크게 들이켜더니 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야, 너 지금 내가 농담하는 줄 아나 본데... 걔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아?”
“...심각하다니요?”
“언젠가 아델이 같이 잤는데 걔가 잠꼬대로 그랬대. 애들아 미안해.. 애들아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런 말을 날이 새도록 쉬지 않고 되뇌었다고 하더라고.”
“.....”
“그랬던 애가, 항상 겉으로는 웃는 척, 밝은 척은 다 하면서도 속은 시꺼멓게 곪아서 엉망진창이던 애가, 널 만나고 참해졌어. 난 그놈이 진심으로 웃는 거 이번에 처음 봤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길드원도 전부 마찬가지일걸.”
“.....”
“그러니 잘 보살펴줘. 앞으로도 니아가 계속 웃을 수 있게.”
*
“이쯤이라고 했었나...”
야영지를 헤매다 보니 어느덧 공터 구석의 작은 막사에 도달했다.
식당이나 대장간 등 붉은 매 길드의 주요 시설이 몰려있는 중앙에서 한참 벗어나 인적이 뜸한 외각에 놓인 천막.
천 색이나 무늬 등으로 개성을 표현하는 여타 붉은 매 길드의 개인 병영과는 달리 몹시도 단조롭다.
“그러니까 여기가 바로...”
니아의 막사.
나를 만나기 전까지 니아가 수년간 써오던 개인 숙소.
‘수수하네...’
뭐랄까... 좀 더 화려할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간소하다. 신원을 특정할 만한 장식이나 이름표가 내걸린 것도 아니고, 그토록 자랑하던 호피 무늬 따위도 전무하다.
꼭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걸 극도로 경계하는 듯한 모습.
“...니아 님, 여기 있어요?”
.....
“저예요 니아 님! 혹시 안에 안 계세요?”
.....
“잠깐 화장실에라도 갔나...”
하는 수 없이 가림천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서자 어두컴컴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니아의 숙소 내부는 외견만큼이나 무미건조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혼자서 쓰기에는 넓은 공간. 휑뎅그렁한 천막 내부에는 그저 한 사람이 사용하기 적당한 사이즈의 침대와 새로 가져다 놓은 듯한 이불, 자그마한 수납용 탁자가 하나 덜렁 있을 뿐이었다.
마치 공허했던 니아의 속마음을 나타내는 듯한 풍경.
그리고...
반짝.
이 삭막한 정경 속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는 사물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탁자 위에는 낯익은 물체가 놓여있었다.
“이건...”
자개 조각.
그간 얼마나 여닫았는지 경첩이 해져있는 나무 케이스 안에 무지갯빛 광휘를 발하는 자개가 소중하게 담겨있었다.
내가 선물해준 장신구.
니아는 내가 없을 때면 하릴없이 이 파편을 보고 있던 걸까...
“이거 얼마 하지도 않는데... 그냥 새로 사준다고 할 때 알았다고 하지...”
니아가 이 장신구를 간직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애지중지 여길 줄은 몰랐다. 게다가 상자는 낡았지만, 자개는 손때를 탄 흔적이 없는 걸로 보아 여기서 더 깨질까 봐 건드리는 것조차 자중한 기색이다.
뭐랄까... 이 부서진 자개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아려온다.
미안한 마음과 쓸쓸함, 고마움 따위로 뒤죽박죽 혼재된 채 망연히 자개를 응시하고 있자니 불현듯 입구가 젖혀지고 익숙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용히 돌아보자 니아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어...? 소년...?”
“.....”
차분하고 가지런하게 빗질해 늘어뜨린 금발. 막 목욕을 마친 듯 뽀얀 김이 맺힌 피부. 쌀쌀한 밤 공기에 살짝 상기된 콧망울.
또 맑고 청초한...
천천히 물러나자 내가 자개를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날 바라보는 니아의 금색 눈동자에 애잔한 기운이 머물렀다.
어쩐지 색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니아에 시선을 빼앗긴 채 암시장에서 사 온 선물을 등 뒤로 숨기자 그녀가 목욕 가운을 고쳐매며 다가왔다.
“소년이 여기엔 무슨 일로... 말도 없이...”
“그냥... 니아 님이 보고 싶어서 왔어요.”
“...라디가 보냈구나? 그렇게 배려해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니아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누르더니 투명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노골적인 언행에도 평정을 유지했던 심장이 설렘으로 떨리는 걸 자각하며 침대에 앉자 니아가 나란히 걸터앉아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날 올려다봤다.
나는 짐짓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음... 그간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온 말이 많았는데 막상 상황에 당면하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일단 와인을 좀 챙겨왔는데 같이 드실래요?”
“와인? 이렇게 야심한 밤에 숙녀에게 술을 먹여서 어쩌려는 거야.”
“.....”
“흐음... 뭐... 속는 셈 치고 어울려 줄까나~?”
니아가 짐짓 밝은 체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리 준비해온 잔에 와인을 따르고 니아에게 건넸다.
찡! 소리가 나도록 잔을 맞부딪히고 적색 수면을 음미하자 농밀한 포도의 향기가 비강을 적시고 몸속에 스며들었다.
니아가 감았던 눈을 반개하더니 휘둥그레 잔을 쳐다보며 말했다.
“뭐, 뭐야 이거 무슨 술이야...! 이렇게 맛있는 와인은 처음인데...”
“유적에서 구한 술을 따로 병에 담아서 가지고 온 거예요. 특별한 놈으로요.”
“흐응... 유적산 와인이라... 우리 도란 공 좀 들였네?”
“네, 이럴 때를 위해서 아껴놨죠.”
“정말... 그렇게나 날 따먹고 싶었어?”
“...아니, 굳이 지금 그런 표현을 써야 하는 거예요? 방금까지 분위기 좋았는데.”
“왜, 사실이잖아~ 물론 난 소년이 원한다면 언제든 받아줄 의향이 있었지만! 그동안 그렇게나 어필했는데~”
“그랬다간 이번에 아니스 님한테 불호령을 들었을걸요? 지금까지 참아 온 덕분에 인정을 받은 거고요.”
“우음... 난 상관없는데...”
“제가 상관있다고요.”
아프지 않도록 부드럽게 니아의 볼따귀를 꼬집었다.
그렇게 나란히 걸터앉아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홀로 숲속에서 살아가던 시절 실수로 잠자던 트롤의 엉덩이를 걷어차 깨운 일이나 니아가 스승님에게 무술을 배우며 호되게 얻어터졌던 일, 란이가 구사하는 언어가 점점 더 유창해지고 있다거나, 해일이의 재채기에 텐트가 날아갔던 일 등...
티키타카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무르익히다 보니 불현듯 누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소리가 멎었다.
편안하면서도 지금까지와는 살짝 다른 침묵이 내리깔린 천막에서 존재하는 소음이라고는 간헐적으로 울려퍼지는 목넘김과 희미한 숨소리, 밖에서 들려오는 서정적인 귀뚜라미의 울음뿐.
말없이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자니 오른팔에 희미한 중량감이 느껴졌다.
“...좋다.”
니아가 포근하게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너무 좋아. 이렇게 단둘이 있으니까.”
“.....”
“있잖아 도란. 그거 알아?”
“...말씀하세요.”
“나 성격 나빠.”
“....”
“이전에도 말했듯이 속도 베베 꼬여있고,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착하지도 않고, 싸우는 거랑 먹는 것 말고는 잘하는 것도 없어.”
“.....”
“또 은근 마음도 좁아서 도란이 날 빼놓고 라디와 아리엘하고만 사랑을 나눴을 땐 조금 질투하기도 했어.”
“....”
“이런 나인데... 이런 나라도...”
도란은 날 좋아해?
“.....”
나는 목울대까지 튀어나온 대답을 삼켰다.
대신 벗어둔 로브 아래 감춰두었던 한 물체를 꺼내들었다.
아기자기한 노란색 꽃과 검은색 꽃이 담긴 꽃다발을.
“이건... 이게 뭐야...? 꽃...?”
“...선물. 금매화랑 흑장미에요.”
“아...”
“이 금매화는 니아 님을 의미해요. 꽃말은.. 꿈 많은 소녀에요. 그리고 요 노란 꽃이 니아 님이라면 이 검은색 장미는 저예요. 이건... 당신은 영원히 나의 것이란 뜻을 품고 있어요.”
“도란...”
“니아 님... 사랑해요.. 제 심장을 가져다 바쳐도 모자랄 만큼 사랑해요. 아직 많이 모자라지만... 이런 저라도 받아들여 주실 수 있어요?”
“도란... 도란...!”
니아의 눈동자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내게 안겨들어 키스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