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0화 〉 친우 #1
* * *
[370] 친우 #1
쿵쿵!!
.....
쿵쿵쿵!!
“네... 나가요...”
시끄러운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한가로이 귓바퀴에 내려앉고, 열린 창 틈으로 새어들어온 시원한 공기가 커튼을 휘날린다.
몸 위에 대충 가운을 걸친 뒤, 침대 귀퉁이에 널브러진 슬리퍼를 신고 거실로 나오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느릿느릿하게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자 내 눈에 들어온 건, 가죽 작업복 차림에 허리춤에는 짤랑거리는 연장 다발을 매단 피곤한 인상의 갈색 머리 남성이었다.
나와 라디가 처음 이 암시장에 당도했을 때 편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인물.
찢어지는 하품을 내쉬며 인사했다.
“...여 트라함. 꼭두새벽부터 무슨 일이야. 하음...”
“윽... 너 이게 무슨 냄새야. 안 씻었어? 그리고 지금 새벽은커녕 해가 중천이거든?”
“아... 씻긴 씻었는데... 어젯밤에 땀을 잔뜩 흘려서 그래... 벌써 오후구나...?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너희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어. 그동안 연락 한 번 없이 코빼기도 안 보이니 죽었나 싶어서 확인차 온 거지.”
“그래...? 벌써 일주일이나 흘렀어? 요즘 밤낮 구별 없이 지내가지고 전혀 몰랐네...”
“...즐기는 건 좋은데 적당히 조절해가면서 해. 햇볕도 좀 쐬고.”
트라함이 피로에 절은 갈색 눈동자로 날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분위기를 보고 그간 내가 보냈던 방탕한 나날을 짐작한 모양.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면... 오늘은 안부를 확인하러 온 거야?”
“그것도 있고, 단장님이 너 좀 보자더라.”
“...아니스 님이 왜.”
“직접 가서 물어봐. 듣기로는 전할 말이 있다던데. 천천히 와도 된다고 했으니 심각한 건 아닐 거야. 아마 우리 길드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려는 거겠지.”
“그래...?”
하긴 나도 이제 예비 길드원이니까 길드 행동 강령이나 규율 등 숙지할 게 산더미다.
저번에 막사에서 그렇게 깽판을 쳐놓고도 일주일이나 아무 말 없이 푹 쉬게 해 줬으면 충분하지.
나는 새삼 그때로부터 일주일이나 흘렀음을 자각하고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알았어. 그럼 조금 이따가 한번 보러 갈게. 그거 말고 또 전할 거 있어?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하고 갈래?”
“...나도 염치라는 게 있거든? 신혼집에 대뜸 들어와서 차나 얻어 마시고 갈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아. ...내 용건은 전부 말했어. 아, 그리고...”
트라함이 머리 위에서 침을 줄줄 늘어뜨리며 흥미롭게 쳐다봐오는 해일이와 메라를 퉁명스럽게 눈짓했다.
“이 히드라랑 키메라 좀 어떻게 해봐. 좀 멀찍이 떨어져 있으라고 하던가. 소름 끼치잖아.”
“왜, 귀엽지 않아? 보니까 네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인데. 이틀 전인가 한 상인이 길을 잃고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데 그때는 얘네들이 엄청 겁줘서 쫓아냈거든. 근데 봐봐, 지금은 얌전하잖아.”
“...내가 사육하는 옐로우 리자드 냄새 때문에 그런 거 아냐? 너 다음번에 우리 주둔지에 올 때는 절대로 얘네 데리고 오지 마. 우리 길드 도마뱀을 다 잡아먹으면 어쩌려고 그래.”
“걱정도 팔자네... 알았어. 주의할게.”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라디와 붉은 매 막사에서 옐로우 리자드가 출산하는 모습도 구경했었지...
용건을 마치자 트라함은 미련 없이 떠나갔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내게 들러붙어 재롱을 피우는 해일이와 메라를 한껏 쓰다듬어주고는 다시 오두막 안으로 들어서자 막 일어나 비몽사몽한 라디가 얇은 잠옷 차림으로 다가왔다.
“으음... 방금 뭐였어요 도란님...? 누가 왔어요...?”
“응, 트라함이 잠깐 왔다 갔어.”
“아, 트라함 씨... 무슨 용건이었는데요...?”
“아니스 님이 내게 전할 말이 있다나 봐. 그동안 푹 쉬었으니 이제 한번 부를 때도 됐지. ...지금 바로 씻고 다녀올 건데 라디 너도 같이 갈래?”
“으으... 전 피곤해서 그냥 집에 있을게요. 요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너무 피곤해서...”
“그래, 알았어. 아리엘은 아직 곤히 자고 있을 테니 깨우지 말고... 니아한테나 한번 물어볼까 하는데...”
끼익...
“아, 마침 오셨네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침실 문이 열리고 니아가 눈꺼풀을 비비며 등장했다.
나는 잠에서 덜 깬 상태로 엉기적엉기적 내게 안겨들어 어리광을 부리는 니아의 엉덩이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이런... 아래쪽까지 훤히 까놓고... 알몸으로 돌아다니면 어떡해요. 혹시 누가 보면 어쩌려고.”
“우음... 이런 숲속 오두막에 우리 말고 또 누가 온다고...”
“방금도 트라함이 왔다 갔거든요?”
“응? 트라함이...? 왜, 무슨 일로?”
“아니스 님이 절 찾고 있다네요. 전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진지한 얘기는 아닌 것 같아요. ...아리엘은 아직 안 일어났고 라디는 집에서 쉴 거라는데 혹시 저랑 둘이서 가실래요?”
붉은 매 길드 주둔지에는 아니스 단장님뿐만 아니라 니아의 절친인 아델 누님도 계시니까.
한데 니아는 웬일인지 얼굴을 시퍼렇게 물들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 못 걸어! 니아 아파!!”
“네...? 그럼 그냥 안 간다고 하면 되는데 왜...”
“또 둘만 가면 내 막사에서 마구마구 박아댈 거잖아! 다 알아!! 니아 아프다구!!”
“.....”
아무래도 조교가 너무 잘 먹혔던 모양인데...
앞뒤 구멍을 손으로 가린 채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치는 꼴을 보니 조금 심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하기야... 일주일간 이것저것 안 가리고 정말 불어터질 지경으로 해댔으니...
나는 살짝 짓궂게 입꼬리를 올리며 다가가 속삭였다.
“...야, 아르제.”
“나, 나... 낭군님...?”
“각오하고 있어. 갔다 와서 또 귀여워해줄 테니까.”
“히끅!”
니아가 뻐근... 한 아랫도리를 부여잡고 뽀얀 궁둥이를 드러낸 채 후다닥 방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쿡쿡 실소하며 상체를 일으키자 라디가 나지막이 침음했다.
“대체 얼마나 해댔으면 그 튼튼한 니아 님께서 몸살이...”
“뭐... 그동안 그렇게 도발했으면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그리고 저걸 찬 상태에서는 일반인이랑 다를 바가 없기도 하고.”
나는 문틈을 붙잡고 불안한 눈동자로 힐끔 내 동태를 살피는 니아의 손목에 채워진 금빛 액세서리를 턱짓하며 말했다.
미다스 금속제 수갑. 마력을 차단하는 란이의 수통과 같은 재질.
초야를 치르기 전 니아가 라디와 함께 오필리아 상단에서 구입한 저 장신구 덕에 지금 그녀는 신체강화를 전혀 못 쓰는 상태다.
그저 조금 튼실한 수인 꼬맹이와 다를 바 없다는 말.
나는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서 사라지는 금색 눈동자에서 고개를 돌리고는 라디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슬슬 씻고 나갈까 하는데... 혹시 수레에 술독 몇 개 좀 챙겨줄 수 있어?”
“술? 술은 왜요?”
“이왕 가는 김에 비아투스 어르신이랑 아델 누나한테 선물하고 오게. 저번에는 시간이 없어서 못 드렸잖아. 디론 님한테도 도움받은 게 있으니까 한 병 정도 드릴까 하는데...”
“잘 생각했어요! 그럼 냇가에서 미역을 감고 오는 동안 준비해놓을 테니 어서 다녀오세요. 아, 오랜만이니 나갈 때 란이도 데리고 나가시고요.”
“그래, 고마워.”
“아,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는데...”
막 현관문을 열고 나서려는 찰나 라디가 살며시 내 가운을 붙잡았다.
의아하게 돌아보니 녀석이 희미하게 부끄러움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랑 아리엘 언니는 오늘부터 그 날이니까 며칠 동안은 그... 못해요.”
“그 날이라니...?”
“...달거리요.”
“아...”
생리 말이구나.
나도 모르게 힐끔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하자 라디가 살짝 뺨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그... 정 원하신다면 입이나 가슴으로 해드릴 순 있긴 한데...”
“아냐 괜찮아, 나도 며칠 쯤이야 참을 수 있으니까. ...혹시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돌아오면서 암시장에 들를 예정인데.”
“음... 괜찮아요. 베라스틴에서 나올 때 다 챙겨왔거든요. 식료품이나 조금 보충해두면 좋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러면 장 보고 단 과일이랑 과자나 몇 개 사 올 테니까 집에서 푹 쉬고 있어.”
“네, 잘 다녀오세요 도란님.”
나는 웃으며 배웅해주는 라디와 짧게 입맞춤을 나누고는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따스한 햇볕을 쐬며 낮잠 삼매경에 빠져있는 해일이와 메라, 개미를 흘겨보고는 재빨리 냇가에서 란이와 함께 목욕하고 나오자 오두막 앞에는 술독이 담긴 수레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대로 붉은 매 길드까지 끌고 가기만 하면 될 터.
하지만...
‘혼자 가는 건 조금 심심한데...’
애인들과의 동거 생활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이젠 혼자서 외출하는 게 어색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오늘 나가서 붉은 매 길드에 들렀다가 암시장에서 이것저것 사고 하다 보면 저녁때쯤에서야 오두막에 돌아올 테니.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지.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오두막 옆 별채로 발길을 돌렸다. 일주일간 실비가 기거하던 곳.
아무래도 오두막에는 침실이 하나뿐이다 보니, 나와 라디 일행이 사랑을 나누는 사이 실비를 거실에 앉혀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요 일주일 동안은 녀석과 다른 공간에서 생활했었다.
그렇게 현관 앞에 도착해 노크하자
똑똑...
“...실비야, 깨어 있어?”
똑똑똑...
“실비야?”
.....
“.....”
자는 건가?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벌컥! 문이 열리고 실비가 나타났다.
“까, 깜짝이야...! 잘 지냈어 실비야?”
“예, 주인님... 오랜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뭐... 나야 잘 지냈지. 한 이틀 동안은 못 본 것 같네... 그런데 너 어디 아파? 왜 숨이 그렇게 거칠어?”
실비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
얼굴은 붉고, 시선은 갈팡질팡 흔들리는 데다가 뭔가 마음에 걸리는지 꼬리가 안절부절못한다.
자다가 황급히 일어났는지 늘 단정하던 머리칼도 조금 헝클어져 있는 데다가 옷자락도 말려있고.
혹시 감기에 걸린 건 아닐까 싶어 이마에 손을 대보자...
“으읏...?! 저, 전 완전히 정상입니댜!”
“아니, 누가 봐도 상태가 안 좋잖아. 혹시 안에 뭐 있어?”
일단 열은 없다.
그렇다면 뭔가 걸리는 게 있는 걸까?
나는 슬쩍 고개를 뻗어 오두막 내부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반쯤 열린 침실 문 너머로 시야에 들어온 건...
“저건... 내 셔츠...? 저게 왜 여기에...”
“세, 세.. 세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언제라도 주인님이 청결하게 생활하실 수 있도록...”
“응? 우리 빨래할 땐 모아뒀다가 란이한테 부탁해서 한 번에 세탁하잖아. 근데 왜 네가 가지고 있어?”
“그, 그러니까... 그게... 어, 얼룩! 빨랫거리를 옮기다가 큰 얼룩이 진 걸 발견해서... 직접 손세탁을 하는 게 나을 거라 판단해 가져왔습니다!”
“...그래?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말하지. 말해줬으면 내가 직접 했을 텐데.”
“그... 주인님의 노예로서 당연한 일을 할 뿐입니다!”
“뭐... 알았어. 그래도 다음부턴 그냥 놔둬. 가사일은 분담해서 하는 편이 나으니까. ...그건 그렇고 나 이제부터 외출할 갈 건데 혹시 같이 갈래?”
“외출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니스 님이 전할 말이 있으니 오래. 그 김에 암시장에 들러서 장도 보고 올까 하는데 겸사겸사 데이트 어때? 둘이서 돌아다니는 것도 오랜만이지 않아?”
일주일간 라디와 아리엘, 니아랑만 붙어있었던 탓에 많이 외로울 테니.
머쓱하게 웃으며 고하자 실비의 호박색 눈동자가 크게 벌어지더니 미소가 만발했다.
“저, 저야 좋습니다!! 꼭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로...! 지금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푸근하게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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