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371화 (371/375)

〈 371화 〉 친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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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 친우 #2

오랜만에 본 실비는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 안달이 난 듯했다.

“주인님! 저기 좀 봐요!! 샛보란 제비꽃이 만발해 있어요!! 너무 예쁘다...”

“.....”

“저기도...! 구름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게 꼭 해일이 같아요!! 안 그래요?!”

평소라면 가벼이 지나쳤을 광경에도 일일이 감탄하며 행복해하는 모습.

통상시의 무표정한 가면은 어느새 벗어던지고 똥꼬발랄한 아깽이처럼 방방 뛰는 모습이 귀여워 조용히 지켜보자 문뜩 실비가 내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들떴나 봅니다. 수레는 제가 끌 테니 손잡이를 제게 주시면...”

“괜찮아. 이거 꽤 무겁거든. 어차피 이제 다 도착했고. 저기 봐봐.”

“이곳은...”

붉은 매 막사 주둔지.

화려한 홍색 깃발이 웅장하게 나부끼고, 매 그림이 그려진 대형 간판이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홍수가 몰아쳐도 끄떡없을 만큼 굳건한 목책 사이로 시퍼런 창날을 반짝이며 서 있는 위병들을 보면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 지경.

지난번 한밤중에 들렀을 때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다.

내 얼굴을 알고 있는지 아무런 제제 없이 통과시켜주는 경비원들에게 가볍게 묵례해 안쪽으로 들어서고 난 뒤, 실비를 다독이며 말했다.

“실비는 저번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니까 막상 이곳에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지? 어때?”

“뭔가... 압도당하는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나 넓은데 잔디와 가로수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집채만 한 천막이 주르륵 줄지어 있어서... 게다가 일원 한 명 한 명이 모두 상당한 실력자 같습니다.”

“그치? 어마어마한 강자들이 몰려있는 대형 길드니까. 붉은 매 길드는 비전투원도 최소 C랭크 이상이거나 특정 분야에서 아주 특출난 실력을 갖춰야만 입단할 수 있대. 그리고...”

­됴란?

수통에서 란이를 꺼내주자 녀석은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간 몇몇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이렇게나 인적이 많은 곳에서 녀석을 소환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나는 녀석을 한 손으로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와보는 건 거의 처음이지? 여기선 다 아는 사이니까 눈치 보지 않아도 괜찮아.”

­됴란...

란이는 인간들 앞에서 당당하게 걷는 게 어색한지 주위를 둘러보며 쭈뼛거렸지만, 자신감 넘치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 안심했는지 곧 수레에 걸터앉아 느긋하게 주위를 구경했다.

그렇게 셋이서 붉은 매 야영지를 거닐자 다양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사신이 들 법한 대형 낫으로 슥­ 슥­ 잔디를 베는 반라의 남성과, 던전에서 막 공수했는지 아직도 펄떡거리는 싱싱한 대형 물고기를 안아들고 한시바삐 달려가는 고양이 수인, 곧 폭우가 예정되어 있는지 삽을 어깨에 짊어지고 배수로를 점검하는 건장한 사내 집단.

석 달 전, 야영지를 왕래하며 일면식이 있는 탓에 반갑게 손을 흔들어오는 길드원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자 실비가 신기하게 후드 아래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이게 대형 길드... 다들 상당한 관록이 느껴집니다. 꼭 한 몸처럼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이런 곳에 주인님이 입단하시는 겁니까?”

“뭐... 일단은 그렇지. 왜,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네... 그야 길드에 입단하시면 주인님을 볼 시간이 줄어들 테니... 길드 안에는 다른 하인도 있고, 저를 대신해서 주인님을 보좌할 사람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하긴... 그런 불안감을 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마 말은 안 해도 라디와 아리엘 모두 비슷한 심정이겠지.

나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녀석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도 입단이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니까 벌써부터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들어가고 싶다고 해도 아니스 님의 최종 승낙이 없으면 불가능한 데다가 아직 세부적인 건 하나도 안 정해졌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실비와 함께할 시간은 보장할 수 있도록 해볼게.”

“...알겠습니다.”

“아니면... 실비는 그렇게 주인님이랑 떨어지는 게 싫었어?”

“네.”

“그래, 그러니까 조금만... 응...? 지금 뭐라고...?”

흠칫 놀라 녀석을 돌아보았다.

실비라면 당연히 ‘노, 노예로서 주인님의 보좌하는 건 당연한 의무입니다..’ 라고 부끄러워할 줄 알았건만, 녀석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뜻밖의 대답이었기에.

실비가 형형한 이채가 남실거리는 등색 눈동자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주인님이랑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같이 있어 주세요. 그럴 수만 있다면 뭐든 할게요.”

“그... 실비야...?”

“정말로 원하시는 건 뭐든지 할 테니... 안 될까요...?”

“.....”

너무 오랫동안 홀로 방치했나...?

애인들과 사랑을 나누던 일주일 동안 실비만 혼자 별채에서 지내게 했던 게 생각보다도 더 영향이 컸는지 지나치게 솔직해진 모습이다.

나는 내 옷자락을 부여잡고 당장에라도 품에 안겨 입을 맞출 것만 같은 실비를 내려다봤다.

이에 막 벌어지는 복숭아꽃의 꽃봉오리처럼 수줍은 입술. 내가 사준 로브 너머로 살며시 밀착해오는 몸. 꿈속을 헤메이는 듯 살짝 촉촉하게 젖어들어 내 흑안을 고이 담는 눈동자를 보니...

“...우리 길드 한복판에서 니아를 놔두고 딴 여자랑 연애질이라니 배짱도 좋다 너?”

“으악!!”

등 뒤에서 들려온 서늘한 음성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그곳에는 익숙한 묘령의 미녀가 서 있었다.

진한 다홍색 중단발을 자연스럽게 어깨로 늘어뜨린 쿨­뷰티 타입의 창술사.

나는 곧바로 반색하며 안겨들 기세로 인사했다.

“아델 누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제대로 인사드리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누군가 했더니 한밤중에 길드를 발칵 뒤집어놓고 우리 중진을 홀라당 빼간 걸로도 모자라 일주일이나 코빼기 한 번 안보인 놈 아냐? 여기에는 무슨 일로 왔어.”

“무슨 일로 왔긴요, 당연히 누나 보러 왔죠! 어...? 그러고 보니 머리 기르셨네요? 지난번에는 단발 레이어드 컷이었는데 이제는 쇄골까지 내려오는 걸 보니...”

“...용케 알아봤네? 맞아, 그동안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빠서 머리를 자를 엄두도 못 냈거든. 난 원래 장발을 더 선호하기도 하고.”

“아 그랬어요?! 머리를 기른 아델 누나도 꼭 보고 싶네요! 엄청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예쁘신데...”

“정말... 너란 남자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칭찬을 건네자 아델은 불퉁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걸로 보아 썩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아 보였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빙글빙글 꼬더니 한결 누그러진 음색으로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는데? 뭐, 귀하신 몸이 오랜만에 행차하신 걸 보니 보나 마나 아실리가 불러서 왔겠지만...”

“네, 근데 누나가 보고 싶어서 온 것도 사실이에요. 이거 받으실래요?”

“이건...”

낑낑거리며 수레에서 사람 몸통만 한 술독을 꺼내 건네자 아델은 A랭크답게 가뿐히 받아들었다.

이게 뭘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특유의 봉인 씰을 보고 정체를 짐작했는지 그녀의 다홍색 눈동자가 서서히 벌어지며 멍하니 날 올려다보았다.

나는 웃으며 고했다.

“맞아요. 유적에서 구한 술이 아직 남아있었거든요. 아델 누나 드리려고 남겨뒀어요. 조금 낮부끄럽지만... 선물이에요.”

“.....”

아델은 똑 부러지는 외견에 어울리지 않게 한참이나 입을 다물지 못하더니 살짝 힐난하는 듯 뾰족한 눈매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 이렇게 귀한 걸 어디서 또 잔뜩... 이게 얼마짜린지는 알고 주는 거야?”

“당연하죠. 저번에 비아투스 님께 팔았던 술이 웃돈을 포함해 13골드였는데 이건 훨씬 양이 더 많으니 한 20골드는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걸 그냥 공짜로 준다는 거야?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네.”

나는 선선히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아예 아깝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아델 누나는 내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니까. 라디와 함께 막 암시장에 도달했을 당시 내 흑발에 얽힌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지대한 도움을 줬던 고마운 인물이다.

아니스 때처럼 지금 이 호의가 모종의 형태로 되돌아오리라 라는 것도 알고.

아델이 술독과 내 얼굴을 힐끔거리더니 미심쩍은 어조로 물었다.

“너... 이젠 나까지 꼬시게?”

“아뇨, 그렇게 말씀하실까 봐 비아투스 님이랑 디론 님에게 드릴 것도 준비했어요. 아, 그래도 누나한테 드릴 건 일부러 특별한 걸로 골랐으니 맛있게 드셔주세요.”

“흐음...”

아델은 술독을 눈앞에 두고 한참이나 ‘이걸 받아도 돼?’라는 듯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고대 유적산 술의 유혹을 이기지는 못했는지 순순히 술독을 받아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이건 고맙게 받아둘게. 비아투스랑 디론한테도 선물한다고 했지? 그 둘은 지금 암시장 순찰 중이니까 돌아오면 내가 전해줄게, 어때?”

“그래 준다면 저야 고맙죠! 마침 어디서 찾아야 하나 막막했는데 잘됐네요. 여기 좀 더 큰 쪽이 비아투스 님께 드릴 거고, 이 고급져 보이는 병에 담긴 게 디론님 거예요.”

“그래, 꼭 전해줄 테니 걱정 마. 아, 그리고 이건 내가 물품 구매하고 남은 건데 그냥 네 용돈 해. 야영지 안에서 열어보진 말고.”

­짤랑!

막 수레를 아델에게 넘기려는 찰나, 그녀가 내 손에 아기자기한 복주머니를 놓아주었다.

복주머니에 그려진 귀여운 토끼와 호랑이를 멀뚱멀뚱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그녀가 강제로 주머니를 내 품속에 넣어주며 말했다.

“그...! 이, 이 그림은 내 취향이 아니라 그냥 우연히 있던 거니까...! 신경쓰지 마!”

“아... 예...”

“...그래, 그리고 니아 관련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건 나중에 당사자 있을 때 하자. 나도 바빠서 오늘은 이만 가볼게. 그럼...”

아델이 손을 흔들더니 수레를 끌고 홀연히 사라졌다.

뭔가 부끄러워서 서둘러 자리를 피한 것 같은데...

‘쩝... 그냥 귀여운 게 취향이라고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데...’

안타까운 눈길로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지적이고 차가운 인상에도 불구하고 실은 다정다감하고 귀여운 걸 좋아하는 갭이 아델 님의 매력이란 말이지.

한데...

분위기가 이상해 내려다보니 실비와 란이가 묘­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흐음...”

­.....

“그... 실비야?”

침묵이 어색해 겸연쩍게 말을 이었다.

“저... 실비야, 왜 그런 눈으로...”

“...혹시 방금 전 여성분과 주인님이 무슨 관계인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아, 아델 님 말이야? 아델 님하고는 그냥 아는 사이...”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친근해 보이셨는데... 저쪽 아델 님?도 주인님께 꽤 호감이 있으신 것 같고...”

­바럄... 둥이!

“그, 그럴 리가! 아델 누나하고는 정말로 그냥 아는 사이야! 그, 그리고 란이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안 돼! 나쁜 말 지지!!”

­쳇...!

“너, 너...! 혀 차는 건 또 어디서...!”

­.....

란이가 홱! 고개를 틀었다.

설마 벌써 반항기가 찾아온 건가 노심초사하고 있자니 실비가 집요한 눈동자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델 님과 어떤 관계인지, 상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상황에 따라서는 안주인님께 보고드릴 내용으로서...”

­됴란... 됴란됴란...!

“그, 그러니까... 그게...”

“그러고 보니... 아델 님은 니아 님의 친구분이라고 하셨지요. 설마 니아 님에 그치시지 않고...”

­됴란... 바럄둥이...! 나뺘!

“지, 진짜 그런 게 아니라...! 저, 저기가 바로 아니스 님의 막사거든?! 난 빨리 볼일 좀 보고 올게!!”

사태가 불리하게 흘러가자 나는 저만치 펄럭이던 붉은 천막 안으로 도망치듯 후다닥 달려갔다.

곧 그 안에서 어떠한 재회가 기다릴지는 꿈에도 모른 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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