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2화 〉 친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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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 친우 #3
막사 안에 들어서자 온화한 장미향이 훅 끼쳐왔다.
보글보글 편안하게 끓는 주전자 소리, 그리고 좀전의 위기감도 잊을 만큼 향기로운 방훈 뒤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무더기로 쌓인 양피지와 언제나처럼 격무에 시달리는 적발의 미녀였다.
나는 재빨리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아니스 단장님! 오늘도 언제나처럼 아름다우십...!”
“나 예쁜 건 많이 들어서 아니까 됐고, 거추장스럽게 인사할 필요 없어. 그리고 너 아직 우리 길드원 아니거든? 누가 단장님이야.”
“에이 뭐 어때요 단장님. 그래서 오늘은 어떤 일로 부르신 거예요? 길드 행동 강령? 규율 숙지?”
“아니, 그런 고리타분한 건 아닌데... 왜, 듣고 싶어?”
거리낌 없이 다가가 바로 옆자리에 의자를 빼고 앉자 아니스가 눈썹을 살짝 움찔했지만, 딱히 내 경솔한 행동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녀가 정면에 놓인 서류철을 살짝 들어 구석으로 치우더니 이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 별일은 아니고 그냥 물어볼 것도 있고 안부차 부른 거야. 아, 그리고 네가 준 와인은 잘 마셨어. 장난 아니던데? 나도 이제껏 좋다는 술은 질리도록 먹어봤지만 네가 가져온 건 급이 다르더라. 그 많은 술이 대체 어디서 난 거야?”
“흐흐... 괜찮았죠? 저도 조금 마셔봤는데 한 모금만 마셔도 피로가 싸악 풀리더라니까요. 그건 2계층에 있는 고대 유적에서 난 거예요. 술을 구하려면 언데드와 함정이 득시글하게 깔린 미로를 통과해야 하긴 하지만, 잘 찾아보면 아마 여분이 남아있을 거예요.”
“미궁 딸린 고대 유적이라... 어마어마한 정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네. 일단 알겠어. 그리고... 네가 가져왔던 보고서 말인데...”
아니스가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사이에서 한 문서를 꺼내들었다.
내가 그녀와 담판을 지을 때 교섭 조건으로 내세웠던 항목 중 하나. 영주성에 쳐들어갔을 당시 니아가 격퇴했던 위베르라는 이름의 부 기사단장에 대한 정보가 적힌 문서다.
그는 붉은 매 길드가 쫓던 범죄자 집단의 수뇌부 중 하나였을 터.
그녀가 화제를 트기 전, 곤란하게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아 근데... 죄송하지만 저도 그 보고서에 적힌 내용 말고는 아무것도 몰라요. 저도 그 위베르란 남자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건 아니라서...”
“그래, 그건 기대도 안 했어. 그쪽으로는 이미 우리가 정보원을 파견했으니 알아서 조사해볼 거야. 그보다 내가 궁금하던 건 다른 쪽인데...”
“다른 쪽이요?”
“그래.”
아니스가 두 손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너희 일행은 어쩌다가 한밤중에 영주성으로 돌입하게 된 거야? 베라스틴에서 일어난 촉수 소동에 대해서는 들었지만, 당사자인 네게 조금 더 자세한 경위를 듣고 싶어.”
“아, 그거...”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어차피 거짓말해봐야 씨알도 안 먹힐 터, 솔직히 털어놓았다.
“...영주가 시민들을 괴물로 만들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제 동료 중 한 명이 지하 실험실에 사로잡혀서 숙주가 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곧바로 쳐들어가 구해왔죠.”
“네 동료 중 한 명이라면... 그 묘인족 소녀? 너처럼 흑발인, 맞지?”
“어...? 어떻게 아셨어요?”
“네 일행 중에서 신원 파악이 안 된 사람이 걔 말고 더 있어? 그리고 우리도 나름 조사를 해 봤는데 그 묘인족 소녀에 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전혀 없더라고. 그러면 답은 하나뿐이지.”
“하기야...”
실비는 줄곧 슬럼가에서 살아왔으니까.
막상 실비를 직접 마주한 적은 없을 텐데도, 정보 매체가 발달하지 않은 이 세계에서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녀석이 검은 머리에 고양이 수인이란 것까지 알아낸 모양.
‘던전 입구에서 인적 사항을 기입한 걸 바탕으로 알아낸 건가...?’
붉은 매 길드의 정보력에 내심 놀라고 있자니 아니스가 괴었던 손을 떼며 말했다.
“그래서... 걔 지금 밖에 있지?”
“네, 란이... 그러니까 운디네랑 같이 있는데... 불러올까요?”
“그래, 나도 얼굴 좀 보자. 네 동료라고 하니 궁금하기도 하고, 나중에 네 능력을 증명하러 하위 계층을 탐색할 때도 우리 길드랑 같이 활동할 거 아냐.”
“잠시만요. 그러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입구로 향했다.
가림천을 젖히고선 천막 입구 근처에서 대기하던 실비와 란이를 불러들이자 녀석들은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실비와 란이는 길쭉한 원목 테이블 상석에 앉은 아니스를 목도하자 긴장한 듯 목을 꼴깍 울렸고...
“...안녕하십니까. 미천한 몸이 붉은 매 길드의 단장, 아실리아 공작 가문의 영애님을 뵙습니다. 이렇게 존안을 마주할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됴란...? 됴란!! 아, 안뇽...하세요...?
“.....”
그간 길거리를 전전해온 것치고는 상당히 예의 바르고 격식 있는 실비의 인사에 내심 놀라고 있자니, 아니스는 무릎을 꿇으려는 실비를 가볍게 제지하고는 눈앞의 두 소녀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너구나? 그 실비라는 애가. 과연 도란이 점찍은 애답게 엄청 예쁘장하게 생겼네. 그리고 운디네 넌... 란이라고 했었나? 저번엔 꽤 살기등등했는데 이렇게 보니 새롭네? 이리 와볼래?”
됴, 됴란...
란이가 안절부절못하며 내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저번에는 내 명령에 따라 아니스에게 수창을 겨누긴 했지만, 한결 여유로워진 지금은 눈앞의 여자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상대인지 깨달은 모양.
란이가 잔뜩 기가 죽은 채 아니스를 가리키자 나는 녀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며 말했다.
“괜찮아. 조금 무섭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야. 한번 가봐.”
됴...란...?
“괜찮다니까.”
.....
란이가 조심스럽게 상석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아니스는 날렵하고 부드럽게 란이를 낚아채 무릎 위에 앉혀놓고선 영화 속 귀부인이 애완 표범을 쓰다듬듯 여유롭게 녀석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말캉말캉하네... 서늘하고... 하급 운디네는 어떻게 몸이 구성되어 있을까 궁금했는데 덕분에 호기심이 풀렸어. 얜 어디서 홀라당 유기해온 거야?”
“유기라니... 얘가 절 따라온 거예요. 도시 근처 호수에서 촉수에 뒤덮여 있던 걸 제가 구해줬고요. ...근데 붉은 매 길드에도 정령술사가 있지 않아요? 아마 엘프 님이었나...”
“맞아. 근데 걔가 데리고 다니는 정령은 다 살벌하거든. 반면 얘는 엄청 귀엽네... 다 네 사랑을 받은 영향인 걸까? 뭐, 그건 그렇고...”
아니스가 쭈욱 늘어나는 란이의 볼따귀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더니 붉은 기운이 남실거리는 눈동자로 실비를 응시하며 고했다.
“너도 안디라 님께 축복을 받았구나?”
““....!!””
순간, 느슨했던 막사 안 공기에 팽팽한 긴장이 실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한마디.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쿵쿵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반쯤 넘겨짚은 거였는데 맞나 보네.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반응해.”
“.....”
“뭐... 네가 안디라 님께 축복을 받았다고 했을 때부터 너 말고도 축복을 받은 사람이 또 있을 가능성은 염두하고 있었어. 그리고 이전에 내가 네 능력은 위험하다고 했던 거 기억하지? 그때와 비슷한 느낌을 최근에 또 받았거든. 정확히는 히드라와 키메라를 소환할 때.”
“그건...”
“솔직히 말해봐. 그 둘은 네 능력이 아니지?”
아니스가 만물을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로운 시선으로 날 응시했다.
나는 그녀의 입꼬리에 맺힌 웃음을 목도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순순히 인정했다.
“...역시 아니스 님은 못 속이겠네요. 맞아요. 실비도 안디라 님의 축복을 받았거든요. 히드라와 키메라의 소유권은 실비한테 있지만, 저희 둘 모두 자유롭게 부릴 수 있고요. ...혹시 실비가 안디라 님의 가호를 받았다는 게 문제가 될까요?”
“아니, 딱히 문제는 없어. 우리 길드쯤 되면 축복이 없는 사람이 더 드물거든. 안디라 님의 가호는 희소하다 못해 전례가 없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면 딱히 트러블이 생길 만한 것도 아니고.”
“그런가요...? 뭐 세간의 인식이 안 좋기는 하지만 사교로 지정된 것도 아니니까...”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서 그냥 무진장 센 신의 축복을 받았다 정도로 치부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내심 안도하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자 아니스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서, 요점은 지금부터인데... 실비가 감염될 뻔했다던 촉수 말이야, 너 그 촉수 소동이 베라스틴 근처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아니요. 근데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어요. 저주받은 성물이 있다면 어디서든 숙주가 생겨날 수 있는데다가 간단한 접촉만으로도 감염될 만큼 전염성도 높으니까요.”
“감염의 원인도 알고 있다면 얘기가 빠르겠네. ...그래, 국내뿐만 아니라 제국 쪽에서도 잇따라 피해가 보고되고 있어. 그리고 우리가 추격하는 일당이 의도적으로 성물을 퍼트리고 있다는 유력한 정황도 있고.
”...그런가요.”
하기야... 위베르라고 했었던 그 사내가 실험실로 향하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만 해도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아마 실험을 저지하려는 우리를 방해하고 감염체를 퍼트리려는 목적이었겠지.
나름대로 수긍하고 있자니 아니스가 진지하게 언성을 낮추며 말했다.
“그래, 그리고 이건 아까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대목인데... 안디라 님이 3대 주신인 건 당연히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어요.”
“나머지 두 신이 누군지도 알아?”
“...혹시 유도 심문이에요? 왜 그런 당연한 질문을...”
“묻는 말에만 답해.”
“...베그디아랑 아수르 님이요.”
베그디아는 빛과 생명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통틀어 가장 막강한 존재고, 아수르는 무와 전쟁을 관조하는 3위계 신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중 아수르 님은...
아니스가 입을 열었다.
“우리도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네가 말한 그 저주받은 성물. 감염체를 만들어내는 붉은 보석에서 아수르 님의 신성력이 발견됐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
저주받은 보석에서 아수르 신의 신성력이 발견됐다.
그 말은 즉, 이번 촉수 소동의 배후에는 아수르 신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도적단이 의도적으로 성물을 퍼트리고 있다는 건...
‘그때 그 젠조라는 도적단 리더와 아수르 신 사이에 모종의 연결 고리가 있다는 건가?’
예컨대 아수르 신이 놈의 뒷배를 봐주고 있다던가...
놀랍기는 하지만 기절초풍할 정도는 아니다. 도적단과 아수르 신 사이에 연줄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지만, 고블린 부락에서 아수르 신의 미완성 신전을 발견한 우리로서는 그분이 촉수 소동의 배후에 서 있을 가능성을 이미 염두에 둔 상황이니까.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아수르 신이 니아에게 축복을 내려준 신이기도 하다는 것.
사고를 마치고 막 입을 열려던 차, 아니스가 검지를 세워 내 뒷말을 가로막았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녀가 천천히 손을 내리며 말했다.
“신성 모독으로 간주 될 수 있으니까 그 이상은 말하지 마. 그리고 일단 니아한테는 오늘 들은 내용은 비밀로 하고. ...대신 명심해둬. 혹시 만에 하나라도 그분이 니아에게 직접 접촉해올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뭐야... 별로 안 놀란 눈치네?”
“어느 정도는 알고 있던 내용이라서요. 다만 아니스 님이 강조해주신 만큼 꼭 유념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이것도 알고 있었다라... 우리 길드 정보원 수십이 달라붙어서 간신히 알아낸 건데 말이지... 네 평가를 조금 더 후하게 쳐줘도 될 것 같네.”
“...감사합니다. 혹시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할 말이라... 아, 맞아. 너 니아 막사에서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네?”
순간 허를 찌르는 질문에 당황하자 아니스가 힐난하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길드원 중 한 명이 그쪽 근처에서 배수로를 파다가 들었다던데. 무슨 비명 소리가 사흘 동안 끊이질 않았다고. 대체 무슨 플레이를 하면 그 터프한 니아가 소리를 지를 정도로 몰아붙인 거야?”
“.....”
그야 교육이 조금 거칠긴 했었죠.
안대는 기본에, 신체 강화를 쓰지 못하도록 미다스 금속제 수갑으로 구속해두고, 와인플레이까지...
이에 그치지 않고 첫 경험에 앞뒤를 모두 개통해버렸으니.
난감하게 관자놀이를 긁으며 침묵하고 있자니 아니스가 수상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쏘아봤다.
“너... 설마 니아한테 못된 짓을 한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전부 상호 동의하에 이뤄졌습니다. 니아도 좋아했고요. ...그건 그렇고 절 부르신 용건은 이게 전부입니까?”
“아니, 마지막으로 딱 하나 남았어. 널 찾아온 사람이 있거든.”
“절 찾아온 사람이요?”
순간 재빨리 머리를 굴려봤지만, 이곳에서 날 찾아올 만한 사람은 별로 없다.
구태여 나열하자면 시장에서 시비가 붙었던 배불뚝이 귀족 중년이나 홀연히 사라진 음유시인, 한가하게 주위를 기웃거리고 다니는 디론 님 정도.
어느 하나 특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니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네 친구 말이야 인마.”
“친구? 친구라면 혹시...”
찰나─
녹음을 품은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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