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3화 〉 친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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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 친우 #4
“으아씨발말톤!! 존나 오랜만이다!!!”
“흐흐... 그간 잘 지냈나?”
“흐어엉!!! 진짜 이새끼까!!! 살아있었구나!!!”
목제 의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막 천막 안으로 들어온 인물을 얼싸안으며 소리쳤다.
윤기가 흐르는 금발, 깊은 대수림을 연상케 하는 진한 녹색 눈동자, 보는 사람을 저절로 기분 좋게 하는 시원스러운 웃음.
내 기억 속의 친우와 일치하는 모습.
눈앞의 말톤을 부둥켜안고 난리 부르스를 추고 있자니 녀석이 내 등을 토닥이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수색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재밌는 소식이 들려오더군. 자네가 암시장에 도착한 걸로도 모자라 붉은 매 길드에 입단하고자 했다지. 듣기로는 아내도 여러 명 생겼다는 것 같고. ...내 지금 직접 보기 전까진 내가 알던 그 껌둥이가 맞나 싶었네.”
“크... 진짜 무진장 많은 일이 있었거든! 우리가 못 본 지 한 세 달 정도 됐나? 무슨 칠 개월 만에 보는 것 같네. 잘 지냈어? 조금 핼쑥해진 것 같기도 한데...”
“난 무탈하게 잘 지냈다네. 엘프에게 석 달이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 한데 정겨운 자네 얼굴을 못 보니 꽤 적적하더군. 마음의 위안이 되는 벗은 참 소중한 존재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네.”
“키야... 말도 겁나 멋들어지게 하네. 벌집에 좆박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멋쟁이 다 됐어! 하이랭커들하고 조금 어울려 다녔다고 어깨에 힘 좀 들어갔나 봐? 암튼 진짜 반갑다!!”
등을 팡팡 치며 그를 놓아주었다.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고 위아래로 살펴보자 그제야 녀석의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간 고생한 탓인지 훨씬 듬직해진 데다가, 땀내 나던 싸구려 퀼티드 아머는 희귀 마물 가죽 소재의 방어구로 바뀌었고, 근처 대장간 아무 데나 들어가서 떨이로 구해온 듯했던 메이스 대신 묵직한 흑철색 광택이 흐르는 플랜지드 타입 메이스를 장비했다.
이에 말톤 특유의 여유와 관록이 더해지니 정말로 붉은 매 길드의 전투원 중 한 명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실력만큼은 흠잡을 데 없었지...’
기이한 성벽 탓에 몬스터를 상대로 가끔 돌발 행동을 일으키지만, 인간이 대상이라면 과거의 나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정도의 무지막지한 실력자다.
더군다나 붉은 매 길드가 골머리를 썩이던 천하의 악당 젠조를 추격하는 데 도움을 줄 정도로 뛰어난 추적술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새삼 이 녀석이 내 친구라는 데 자부심을 느끼고 있자니, 아니스가 조용히 미소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이제 가볼 테니까 둘이서 회포라도 풀고 있어. 서류를 어지럽히지만 않는다면 내 집무실 안에 있는 건 뭐든 써도 괜찮아. 대신 나갈 땐 깨끗하게 정리해 두고.”
“어? 어디 가시게요?”
“곧 폭우가 예정되어 있어서 진지 배수로 작업을 감독해야 해. 암시장도 한번 순찰해봐야 하고. ...그럼 상세한 수색 보고는 나중에 들을게 말톤.”
“알았네 아니스. 늘 수고하는군.”
아니스가 내게 눈웃음을 지으며 떠나가자 막사 안에는 보글거리는 찻잔의 소음만이 남았다.
쌓인 이야기가 많아 어디서부터 화제를 터야 하나 고민하던 차, 말톤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가림천 사이로 아니스가 떠나간 걸 확인했다.
이내 그는 집무실 구석 저장고에서 위스키며 코냑이며 고급 주류를 주르륵 꺼내들더니...
“일단 술이라도 한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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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배!!
술잔을 드높게 맞부딪히고 위장에 털어넣다 보니 뜨거운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각자의 무용담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며 아니스가 아껴두던 고급 송아지 육포와 염소젖 치즈를 꺼내서 까먹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
이에 열어둔 천막 입구로 솔솔 불어오는 바람,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흥미진진한 입담, 잊을 만하면 건배하며 청량하게 울려퍼지는 은잔의 소음이 겹쳐지니 최고급 호텔의 라운지가 부럽지 않다.
다만 문제는...
“...야, 근데 이거 함부로 꺼내 먹어도 괜찮은 거야? 꽤 비싼 술 같은데...”
고대 유적 출토품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범상치 않은 풍미를 보아하니 이 역시 평소 내 돈벌이로는 엄두조차 못 낼 정도로 비싼 술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어느새 테이블 바닥을 굴러다니는 고급스러운 유리 재질의 공병들을 둘러보며 묻자 말톤이 잔을 채워주며 대답했다.
“괜찮네. 네다섯 병 정도야 한동안은 사라진 줄도 모를 테니. 만약 들킨다고 한들 그녀라면 헤프닝 정도로 쿨하게 넘길 테고 말이네.”
“그래? 하긴... 대형 길드 리더에 공작가 딸 정도 되면 이 정도 지출쯤이야 눈 하나 깜빡 안 하겠지?”
“그렇다네. 우리와는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일세.”
“...근데 넌 지금 뭐 하는데.”
“아, 이것 말인가?”
말톤은 구석에서 조용히 끓던 찻주전자를 가져다가 빈 병에 채워넣으며 대답했다.
일부러 위스키 색과 비슷하도록 차의 농도를 조절하는 용의주도함까지 발휘하며.
녀석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지껄였다.
“헤프닝 정도로 쿨하게 넘긴다고는 했지만 들키지 않으면 더 좋은 거 아닌가? 어차피 당분간은 열어보지도 않을 테니 말일세. 거의 다 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게.”
“....”
“그보다, 그쪽 두 숙녀분은 언제 소개해줄 건가.”
“아...”
말톤의 시선을 따라 옆을 돌아보니 그곳엔 술잔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신기한 눈빛으로 우리를 번갈아 보는 실비와 마찬가지로 눈을 동그랗게 뜬 란이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 셋은 초면이었지.
나는 겸연쩍게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미안, 너무 신나서 소개가 늦었네. 이쪽은 실비라고 하는데 내 정말 소중한 새 동료 중 한 명이야. 이쪽 운디네는 란이라고 하는데 곧 중급 진화를 앞두고 있고.”
“...안녕하십니까. 도란님의 충실한 종, 실비라고 합니다. 주인님의 친우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됴란...! 됴란!!
“...그래, 그리고 이쪽은 말톤이라고 하는데 이름 정도는 들어봤지? 모험가 초창기 때부터 내가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준 소중한 친구야. 검은 머리에 대한 편견도 없고, 내 목숨도 여러 번 구해준 정말 고마운 녀석이고.”
“반갑군. 말톤이라고 한다네. 도란에게 이야기 많이 듣...지는 못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좋은 교류를 쌓아갔으면 좋겠군. 그간 띨띨하고 모자란 우리 도란을 보살펴줘서 진심으로 고맙다네. 그리고 그쪽 꼬마 아가씨는... 숲의 일족이 고귀한 정령님을 뵈어서 영광입니다.”
됴란...!
말톤은 나름 꼴에 자신도 엘프랍시고, 자연을 숭상하는 민족답게 깍듯이 고개를 숙여 정령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다.
의외의 일면에 놀라고 있자니 그가 숙였던 고개를 들고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실비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쪽 부인분은 도란의 몇 번째 아내인가?”
“후, 후읏?! 아, 아내라니 그... 그게 무슨...”
“왜, 아니었나? 내가 보기엔 상당히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지. 아까도 계속해서 도란의 얼굴을 힐끔힐끔 보지 않았나. 또 도란의 견과류 껍질을 은근슬쩍 까 놓기까지 하고. 단순히 종이라서 한 행동이라기엔 다분한 애정이 묻어나오는데... 이런이런, 도란은 복도 많군.”
“그, 그런...”
실비가 홍당무처럼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실비가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자 나는 녀석을 살짝 내 옆구리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맞아. 실비도 내 아내가 될 사람이야. 네 번째로. 어때, 귀엽지?”
“네 번째라... 내가 못 본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나 보구먼. 그중 라디가 첫 번째라고 하면, 나머지 둘은 누군가? 내 들은 바가 있긴 하다만...”
“그래, 니아랑 아리엘이야. 니아는 붉은 매 길드에서 봤으니 알 테고, 아리엘도 본 적 있지? 베라스틴에서 치유소의 여신이라 불리던 바로 그 백은발의 사제 말야.”
“...다 아는 사람들이구먼.”
말톤이 등받이에 등을 젖히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술을 한 모금 들이켜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말해보게 도란.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이리 환골탈태한 겐가? 내가 마지막에 봤을 때만 해도 자네는 사교성이라고는 개미 눈곱만큼도 없고, 머리칼을 숨기고 다니기에 급급하지 않았나.”
“...역시 많이 바뀌었냐?”
“당연한 소릴. 자주 했던 말이지만, 처음 봤을 때의 자네는 막 벼린 칼날 같아서 말을 섞으면 혀가 베이지는 않을까 두려울 정도였다네. 하지만 그랬던 자네가 이렇게 예쁜 아내에, 귀여운 정령님까지 대동하고선 나타났으니 내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나? 꼭 기르던 망아지가 새끼를 친 것만 같군.”
“야, 인마 그래도 사람한테 망아지가 뭐야. 망아지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능청스럽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 녀석과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푸근해져 오는 것만 같다.
마치 그리운 옛 집에 온 것만 같은 느낌.
나는 은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말했잖아. 여러 일이 있었다고. 그동안 나도 꽤 성장했어. 트라우마도 많이 극복했고. 아, 그리고 나 안디라 님한테 축복 받았다.”
“알고 있네.”
“그래, 조금 놀랍지만 사실... 응? 알고 있다고...? 어떻게...”
“.....”
말톤이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도적단이 출몰했던 2계층 벼랑을 기억하나? 폭발의 후유증에서 정신을 차린 뒤 자네가 싸우는 모습을 봤다네. 아주 무시무시하더군. 자네에게 포션을 끼얹을 때만 하더라도 깨어나 날 덮치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했지.”
“...그랬구나. 하긴, 그때 봤다면 알고 있었을 수도... 잠깐...! 그렇다는 건 너 혹시 늑대도 봤어?! 그...! 엄청 커다란 늑대 거수인데...”
“타로 말인가?”
“.....!!”
오늘 몇 번인지 모를 충격에 경악하며 입을 벌리자 말톤이 술잔을 들이켜며 말했다.
“자네를 깨울 때 잠꼬대로 그러더군. ‘타로’라고. 그토록 치고받고 싸우다가도 숨통을 끊지 않고 체취만을 묻혀둔 채 떠났으니 그 늑대와 자네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다만... 내 추측이 맞아떨어진 모양이군.”
“...너 가끔 이럴 때 진짜 소름돋네. 맞아. 그래서 그 늑대를 찾아야 하는데...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알아? 일단은 하위 계층으로 갔을 거라 추측하고 있는데...”
“미안하지만 그것까지는 모르겠군. 다만...”
“다만...?”
말톤이 가까이 귀를 대보라는 듯 천천히 손짓했다.
시종일관 유쾌함이 맴돌던 그의 녹안이 한없이 진지한 기색을 띄었기에, 마른침을 삼키며 다가가자
“그 늑대를 찾는다면... 나와도 한 번 만나게 해 줄 수 있겠나?”
“...찾을 수만 있다면. 근데 왜...?”
“옛끼! 그야 당연히 하룻밤을 함께하고 싶어서가 아니겠나! 그 은빛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거대한 털가죽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리...”
“에라이 이 중증 털박이 새끼야.”
녀석의 이마를 머리로 내리쳤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욕망에 충실할 줄이야...
‘...걱정해서 손해 봤네.’
뭐... 그런 게 말톤의 매력이지만.
이마를 부여잡고 바둥거리는 말톤을 한심스럽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너한테 전해야 할 말이 있어.”
“으윽...! 자네 어쩐지 주먹이 더 매워진 것 같군... 주먹이 아니라 머리지만... 전할 말이라니 뭔가?”
“...너 이번에 베라스틴에서 벌어진 소동에 대해서 알고 있어?”
“약간은 전해들었네. 자네가 아주 혁혁한 공을 세웠다지.”
“...그래, 그리고 그 일이 있기 몇 주 전에 기사단장 키론 경이 죽었는데 너한테 말 좀 전해달래.”
“.....”
말톤은 키론 경이란 이름이 나오자 좀전의 방정맞은 모습에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운 눈빛으로 경청했다.
살짝 섬뜩하게 느껴지는 태도 변화에 내심 놀라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전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 말톤에게 자신의 죽음을 전해달라는 유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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