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374화 (374/375)

〈 374화 〉 친우 #5

* * *

[374] 친우 #5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키론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를 전했다.

그가 변절했던 행위의 배후에는 정체불명의 신이 있고, 그 존재가 건 저주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다소 어두운 이야기지만 예상외로 말톤은 담담하게 받아들었다.

녀석이 고개를 돌리고 술을 들이켜더니 한탄하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런 일이 있었어... 그 바보같은 놈이...”

“...기사단장하고 아는 사이야?”

“음... 아는 사이긴 하지만 가깝다고 할 정도는 아니라네. 알다시피 나는 자네보다 조금 더 오래 살지 않았는가? 이전에 전쟁터에서 잠깐 함께 싸운 적이 있었지. ...내게 전할 말은 그게 전부인가.”

“뭐... 그렇지. 그 밖에도 따로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는데 막상 만나니 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

구체적으로는 녀석이 보유한 정체불명의 가호에 대해서라던가, 2~3년 전 빌헴 마을에서의 햇 보어 퇴치 의뢰로 라디를 만나기 전부터 녀석을 알고 있었던 정황이라던가.

이외에도 몇 가지 자잘한 의문이 많았던 것 같긴 한데 당장 떠오르는 걸 추슬러 보자면 이 정도.

말톤과 기사단장이 어떤 사이였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다른 화제를 꺼내기도 곤란한 바, 힐끔 눈치를 살피자 말톤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이만 해산하도록 하지. 볼일이 있어서 말이네.”

“뭐, 벌써?”

“그렇다네. 막 하위 계층을 수색하고 온 터라 느긋하게 이야기하기엔 형편이 안 좋으니. 아니스한테 제출할 보고서도 작성해야 하고, 나도 조금 쉬어야겠네. 그리고 무엇보다...”

말톤이 자세를 낮추고 실비와 눈높이를 맞추더니 오지랖 많은 할아버지처럼 능글맞은 표정을 자아내며 말했다.

“우리 꼬마 소녀의 데이트를 방해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까부터 자네와 단둘이 있고 싶은 눈치니 불청객은 이만 슬슬 빠져야겠네.”

“앗...! 그, 그...”

“...알았어. 고마워 말톤. 근데 너 술을 그렇게나 마시고도 보고서를 쓸 수는 있는 거야?”

“이리가 범을 걱정하는군. 난 멀쩡하니 걱정 말게나. 내 괜히 비아투스와 술친구를 맺은 게 아닐세. 그보다... 자네는 다음 반 하위 계층 탐사에 지원한다고 했지?”

“어, 맞아. 들었나 보네?”

“당연한 소릴. 길드 내부에서도 자네 얘기로 시끌시끌하더군. 다행히 이번 원정에는 함께 갈 수 있을 것 같네. 오랜만에 서로에게 등을 맡기고 싸울 수 있기를 고대하겠네.”

“진짜? 완전 잘됐다!! 아! 그리고 지금 내 숙소에 해일이랑 메라 있으니까 시간 나면 놀러 와! 어딘지 알아?”

“붉은 매 길드 별장 말인가. 그야 알다마다. 내일이나 모래부터는 당분간 한가하니 한번 찾아가겠네. 오랜만에 두 귀염둥이도 보고 자네와 같이 호숫가에서 낚시라도 하면 좋겠군.”

“그래, 그렇게 하자.”

말톤이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하고 의자를 원상태로 되돌리더니 시원스레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그를 배웅해주고 난 뒤, 아니스의 집무실 안에 한차례 바람이 불고 지나가자 나는 실비의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

“...어땠어? 쟤 잘생겼지? 엘프는 보기 드물잖아.”

“뭔가... 저와는 정반대인 듯한 사람이었습니다. 유쾌하고 붙임성 좋은... 외모도 주인님에겐 못 미치지만 여성분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고...”

“붙임성 좋고 인기가 많을 것 같다라... 평가가 박하네. 보통 처음 만나는 여자들은 쟤 보면 진짜 환장하던데. ...실체를 알면 질겁하면서 물러나지만.”

“...그렇습니까?”

실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보통 말톤을 처음 마주하는 여성들은 녀석의 반반한 얼굴에 혹해 첫눈에 푹 빠지곤 했지만 실비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

그보다 아까부터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귀와 꼬리를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는 걸 보니...

“...내가 아내라고 했던 게 신경 쓰여서 그래?”

“네...?! 우읏...! 그, 그건...”

“뭐야, 진짜였어?”

나는 입가에 잔망스러운 웃음을 띠며 안절부절못하는 실비의 귓가에 속삭였다.

“...실비야.”

“부,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아내가 좋아?”

“다,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첩으로 만족...”

“첩이라... 첩이면 그래도 바라는 게 있다는 거네? 평소라면 ‘저는 주인님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괜찮습니다’라고 했을 텐데.”

“읏...”

“이리 와.”

실비를 끌어당겨 내 무릎 위에 앉혔다.

녀석이 도망갈 수 없도록 허리를 단단하게 붙들고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실비는 어색하게나마 내가 편하도록 자세를 낮췄다.

이에 휘황하게 뜬 보름달처럼 큼지막한 호박색 눈동자. 열병을 앓듯 살짝 달아오른 체온. 흘러내린 후드 아래로 엿보이는 달의 낙인.

내 손길을 민감하게 의식하면서도 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고양이 소녀를 보니...

‘조오끔 나쁜 생각이 드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실비를 건드려도 날 책망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흑심에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더뎌지자 실비도 내 내면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욕망을 감지했는지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 주인님...”

“....”

“저는 주인님의 것이니까... 무슨 짓을 해도 좋습니다.”

“...시험해봐도 돼?”

“.....”

실비가 대답 대신 다소곳이 상체를 기울였다.

나는 그에 호응해 천천히 손을 아래로 내렸다.

매끄러운 목덜미를 쓸어내리고, 희미한 촉수의 흉터가 느껴지는 등허리를 지나, 끝내는 허리선을 넘어서 정숙하면서도 사랑스럽게 흔들리는 검은 꼬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고...

“.....”

실비의 입술 사이로 애틋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실비는 곧바로 손등을 들어올려 잇새로 스며나오는 신음을 틀어막았지만, 내가 은근히 손압을 가해 주무를 때마다 어깨를 바들바들 떨며 눈을 감았다.

역시 꼬리가 약점인 건 수인 공통 사항인 모양.

...어째 라디나 니아보다도 더 민감한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낙인의 효과 중에 감도 증폭도 있었지...’

당시에는 하등 쓸데없는 능력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상기하게 될 줄이야.

천천히 손을 위아래로 쓸어올리자 실비의 꼬리털이 삐쭉 섰다. 부드럽게 뜸을 들여 자극하자 세모난 귀가 움찔한다. 조금 힘을 주어 움켜쥐니 손안 가득 녹녹한 감촉이 느껴지고, 내 허벅지에 걸터앉은 하반신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약간 말랑하면서도 쫀쫀함이 느껴지는, 굳이 비교하자면 니아보단 라디 쪽에 가까운 꼬리 감촉.

‘같은 고양잇과 수인인데도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구나...’

이에 실수인 척 꼬리 밑동 근처를 약지로 쿡 찌르기도 하고, 조금 짓궂게 끄트머리를 살짝 꼬집기도 하며 삼인 삼색의 꼬리 감촉을 즐기고 있자니 녀석이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왜.”

“더... 즐기셔도 됩니다. 제 몸을 써서 주인님을 잠시나마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면...”

실비가 더더욱 밀착했다. 내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 꼬리를 삐죽 세웠다.

마치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는 듯한, 완전히 내게 몸을 맡기는 행위.

꼬리의 위치가 밀려 올라간 탓에 이대로 조금만 더 손을 내리면 몹쓸 부위에 닿겠지만...

“아쉽네...”

“네...?”

“지금은 보는 눈이 있어서 말야.”

“아...”

실비는 내 입꼬리에 걸린 머쓱한 웃음을 목도하고는 고개를 내리더니 똘망똘망한 란이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녀석은 한참이나 멈춰있다가 어, 어떡하죠 주인님? 하는 눈빛으로 날 올려다봤지만...

나는 투명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내려와. 언제 아니스가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더 엉켜있을 수도 없으니까. 그리고 란이 너도 이건 비밀로... 아니, 어차피 다 들켰지... 나서서 말하지만 마.”

­...시러!!

“뭐... 싫다고? 왜...”

­나도...! 꼬리, 만들 슈 있어! 나도...!

란이가 공기중에 떠도는 수분을 모아 엉덩이에 투명한 꼬리를 만들더니 어린이가 율동하듯 귀엽게 뒤돌아서 흔들었다.

자기도 실비처럼 만져달라는 건가?

“...아서라, 란이 넌 최소 백 년은 일러. 네가 언젠가 아리엘처럼 키가 크거나 상급 정령이 되면 그때나 생각해 볼게.”

­샹급 졍령...? 아리엘 언니...? 쭉쭉빵빵?

“....너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그래, 상급 정령이 되면 운디네도 성인이랑 비슷해진다며. 더 자라서 와.”

­샹급 졍령...

란이가 제 몸을 빤히 내려다보더니 낑낑거리며 발돋움해 키를 키우는 듯한 시늉을 했다.

그래봤자 어림도 없지만...

‘...아니, 이러다 갑자기 확 자라서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나이야 우리보다 많은 건 확실하고, 정령은 전신이 마나로 이루어진 존재인 만큼 충분한 마력이 뒷받침되면 언제든 상위 단계로 진화할 수 있으니...

설마 싶은 눈길로 란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실비가 공연히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주인님은 이제부터 뭘 하실 겁니까...? 이대로 계속 아니스 님의 집무실에 있을 수도 없으니...”

“그러게... 뭐, 이제 붉은 매 막사에서 볼 용건도 마쳤으니까 슬슬 나가볼까? 애들한테 사 들고 돌아갈 단 과자도 골라야 하고... 또...”

나는 슬쩍 품속에서 붉은 복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아델 누님이 내게 하사하신 금일봉.

이 안에 얼마가 담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데이트 하자.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