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5화 〉 친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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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 친우 #6
“이야... 암시장에 이런 곳도 있었네.”
화려한 장식이 내걸린 거리. 골목마다 알록달록 흩날리는 깃발.
개성 있는 간판으로 행인의 발길을 잡아끄는 노점에선 다양한 볼거리가 펼쳐지고, 좁지만 흥겨운 고샅길을 쏘다니는 모험가들의 입가엔 웃음꽃이 만발해 있다.
마치 한여름 축제에 온 것만 같은 분위기.
다양한 노점들을 구경하다가 우연히 들어선 거리에서 한창 금붕어 건지기에 열중하던 중, 잠깐 시원한 과실 음료를 마시며 열을 식히고 있자니 자그마한 종이 뜰망을 손에 쥔 채 쪼그리고 앉아 오락에 몰두한 실비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꼬리가 로브 아래로 삐죽 흘러나온 것도 모르고 종이 뜰망이 찢어지지 않도록 아슬아슬하게 수조 안에 든 금붕어를 건져올리고자 고군분투하는 실비.
녀석을 보며 피식 웃자 노점 주인이 슬쩍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저 아이는 노예인가? 꽤나 귀여움받고 있구먼... 좋은 주인을 만난 모양이야.”
“어? 노예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그야 딱 보면 알지. 내가 이곳에서 손님들을 얼마나 봐왔다고 생각하나. 예를 들면... 저기 돌아다니는 모험가 두 명 보이지? 저들은 불륜 관계야.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일부러 거리를 두고 걷지 않나. 그 밖에도 저기 한 쌍은 결혼한지 얼마 안 된 신혼이고.”
“그런가요...”
신기한 눈초리로 사람들을 구경했다.
원래 모험가는 개성이 넘치는 편이라지만, 던전이 발견되고 전국에서 몰려든 영향으로 더욱 차이점이 두드러져 보이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검색대를 통과하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공항 직원과 실랑이를 벌여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온몸에 주렁주렁 피어싱을 단 호랑이 수인과 그런 그녀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초등학생 뻘 소년 몸종, 땀을 뻘뻘 흘리며 엉기적엉기적 행인을 거스르는 중갑의 노인과 무지갯빛 망토를 어깨에 걸친 마법사 등.
다들 한가락 해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뭔가 친숙하네...’
세 달 전에 방문했을 때는 다들 말을 걸 엄두조차 안 날 정도로 강해 보였는데 이젠 정면으로 맞붙어도 이 중에서 날 이길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다.
한데 그건 그렇고 암시장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물담배 체험 가게나 온몸에 푹신한 보호장구를 착용한 인간 샌드백 등 길가를 따라서 늘어선 오락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좀 의외네요. 제가 있던 도시의 모험가들은 실용을 중시하는 분위기여서 그런지 던전 한복판에서 이런 오락 시설이 성행할 줄은 몰랐는데...”
“전국 각지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몰려오지 않았는가? 돈이 넘쳐나는 모험가도 있고, 파티를 맺다 눈이 맞아서 이곳 암시장에서 느긋하게 연애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지.”
“하기야... 던전에서 마음 놓고 쉴 만한 곳은 이곳뿐이니까요.”
“그렇지. 게다가 어떻게든 젊고 탄탄한 수인 한번 꾀어보겠다고 돈을 펑펑 써대는 사내들도 있어서 손님이 넘쳐나는 실정이라네. 저기서 다트 던지는 궁수 커플 보이나? 저쪽 남자는 사흘이 멀다고 여자를 바꿔서 오더군. 그런 놈들이 이 거리에 널리고 널렸어. 얼마나 문란한 작자들인지...”
“하하...”
문란하다기엔 본능에 충실하다고 해야겠지만...
베라스틴 인근에는 강력한 몬스터가 나오지 않는 만큼 모험가들이 의뢰 중 목숨을 잃는 경우가 드물어 다들 흥청망청 돈을 쓰기보단 절약하는 분위기였지만, 이곳에선 언제 마물에게 죽을지 모르는 만큼 무작정 아끼는 것보단 지금 즐기는 게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
환경의 변화가 소비 양식에도 드러난 모양.
내일의 근심 따위 제쳐두고 행복한 얼굴로 거리를 쏘다니는 면면들을 살펴보고 있자니 문뜩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아, 다 끝냈어 실비야? 어디 보자... 열두 마리?! 엄청 많이 잡았네? 잘했어!!”
“...감사합니다.”
“첫 시도에 열두 마리라... 대단하군. 보통은 대여섯 마리만 잡아도 많이 잡은 편인데 말이지. 상당한 동체 시력과 순발력, 무엇보다 뛰어난 손재주가 없으면 이렇게 많이 잡는 건 불가능하다네.”
“동체 시력과 순발력, 손재주라...”
고양이 수인이니 앞선 둘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내 단도를 강탈하거나 돼지 중년 귀족의 보석함 열쇠를 훔치는 둥 어둠의 손기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행보를 보였으니까.
그렇다면 이 재능을 살려 단검술을 가르치면 잘 써먹을 것 같은데...
지금껏 던전에 들어오고 마물과 맞닥뜨리면 소환수를 부리거나 나와 니아가 솔선해서 해치웠던 바, 실비의 잠재력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녀석이 금붕어가 담긴 대야를 두 손에 든 채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저... 주인님...”
“왜 실비야?”
“그... 이 물고기들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계속 꼬물거리는데...”
“아, 그러네... 팻말에는 잡은 사람 차지라고 적혀있지만 이대로 숙소에 가지고 가기도 곤란하고... 이건 어떻게 되는 거죠?”
노점 주인을 돌아보며 묻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원칙상 한번 낚은 물고기는 손님의 소유지만, 처치가 곤란하신 경우에는 다시 반환해주면 물고기 대신 소정의 상품을 주고 있다네.”
“음... 그럼 그편이 낫겠네요. 어차피 가져가봤자 키우지도 못하고 개울에 방류해야 할 처지니... 어때, 괜찮지 실비야?”
“...주인님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자, 받게나! 달콤쌉쌀한 당밀 사탕이야! 원래는 금붕어 한 마리당 하나씩이지만 워낙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특별히 더 챙겨줬어!”
“고마워요.”
나는 조그마한 당밀 사탕이 가득 든 주머니를 건네받고는 밝게 인사한 뒤 노점을 나와 실비와 나란히 골목을 거닐었다.
그렇게 목적지 없이 암시장을 걷자 주변에서 활기찬 소음이 들려온다.
점포마다 와글와글한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크게 울려퍼지면, 저만치 투기장이 마련된 야외에서는 배팅에 성공한 모험가들의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다.
쾌청한 하늘에서는 태양을 대신해 따스한 발광 이끼의 조광이 내리쬐고, 저 멀리 새하얀 새 무리가 파닥파닥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풋풋한 연인과 데이트를 하기에는 최고의 날씨.
던전과 오락이라는 다소 이색적인 조합을 구경하며 달콤한 냄새가 풍겨오는 거리를 걷고 있자니...
“...아쉬웠어?”
“네, 네...?!”
“금붕어 말이야. 마지막 노점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시선을 못 뗐잖아.”
“...아닙니다. 저는 단지 주인님과 좋은 추억을 남긴 걸로 만족...”
“솔직하게 말해도 돼.”
“으...”
실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망설이더니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네, 조금은... 가져가서 안주인님들과 탕을 끓여 먹으면 맛있었을 텐데...”
“...관상용도 아니라 금붕어 탕이라니... 실비는 생선을 진짜 좋아하네. 그래도 물고기는 마음만 먹으면 시장에서 구할 수 있으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마. 그리고 그거 알아? 금붕어는 사실 팔뚝만 한 크기까지 자란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걔네는 환경만 갖춰지면 30살도 넘게 살 수 있거든, 신기하지?”
“그랬군요... 시에서 북쪽 광장 분수대에 금붕어를 풀어놓으면 밤마다 몰래 가서 잡아먹곤 했는데 전부 사이즈가 작아서 원래 송사리처럼 자그마한 물고기인 줄 알았습니다.”
“.....”
못 들은 걸로 칠까.
나는 그 작은 물고기 어디에 먹을 부분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차치해두고선 상인이 건넨 주머니에서 당밀 사탕을 꺼내 주변을 둘러보느라 살짝 벌어진 실비의 입 안에 넣어주었다.
“읍?!”
“이상한 거 아냐. 당밀 사탕이니까 먹어도 돼.”
“아으... 깜짝 놀라서...”
“....”
실비는 갑작스러운 이물감에 놀란 눈치였지만 입안에 들어온 물체의 정체가 사탕이란 걸 깨닫자 얌전히 음미했다.
살살 침으로 녹이고, 구석으로 굴려 어금니로 살짝 깨물어도 보고, 실수로 혀를 씹었는지 눈물을 글썽이다가도 행복하게 입을 오물거리는 고양이 소녀를 보니...
“...맛있어?”
“네, 빨면 빨수록 단맛이 느껴져서... 정말 행복합니다. 이것도 길거리에서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사주는 걸 보고 엄청 부러워했던 음식인데...”
“...여기 주머니 통째로 줄 테니까 마음껏 먹어. 다 먹으면 얼마든지 다시 사줄 테니까 아끼지 말고.”
“하, 하지만 이걸 전부 주시면 주인님 몫은...”
“난 단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아, 그래도 이따가 양치질은 꼭 해야 한다?”
“...감사합니다.”
꾸러미 채로 당밀 사탕을 건네주자 실비가 황송하게 받아들었다.
당밀 사탕이면 그리 고급 음식도 아니고 제법 양이 있음에도 실비는 빨리 먹기가 아까운지 입술에 반짝반짝 침을 묻혀가며 조심스럽게 사탕을 빨아먹었다.
그렇게 녀석의 머리를 토닥여주곤 다시 발길을 옮기려던 차 아래쪽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쉽습니다...”
“응? 아쉽다니 뭐가?”
“주인님께서 단 음식을 싫어하신다는 것 말입니다. 같이 먹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 그럼 살짝 맛만 보지 뭐.”
나는 부드럽게 실비의 양 뺨을 붙잡고는 고개를 기울여 연분홍색 입술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당밀을 혀로 핥았다.
살짝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맛. 강한 카라멜향 뒤에 느껴지는 사탕수수 특유의 옅은 신맛과 은은한 당도.
색이 훨씬 진하지만, 생김새가 호박엿하고 비슷한 탓에 희미하게나마 호박 맛이 감도는 것 같기도 하다. 이미 고급 음식과 제과에 길들여진 내 입맛에는 약간 모자라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한 수준.
입술에 남은 부드러운 감촉과 체온을 실감하며 혀로 훔친 당밀을 분석하고 있자니 옆에서 오작동하는 기계에서나 들릴 법한 소음이 들려왔다.
“아으... 아.. 으으..”
의아하게 돌아보자 놀라서 휘둥그레진 호박색 눈동자와 곧 터질 듯 한계까지 새빨갛게 변해버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실비는 입술을 매만지며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고장 난 고양이처럼 이상한 신음만 반복할 뿐.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왜 그래? 뽀뽀야 이전에도 종종 했잖아.”
“.....”
“그렇게 놀랄 일인가?”
“....”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을 돌아보았다. 하긴, 생각해 보니 혀가 입술에 닿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사탕의 끈적함이 더해지니 순수한 우리 실비한테는 자극이 너무 심했으려나?
나는 피식 웃으며 마저 발길을 옮겼다.
들썩들썩 자연스레 입꼬리를 비집고 나오는 미소를 숨기고자 애쓰는 실비와 손을 맞잡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