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100일의 요람 (2)
암살검가 로이넨 저택의 ‘어스름홀’.
이 비밀스러운 연회장에 로이넨 일족이 한데 모였다. 널찍한 식탁 위론 온갖 산해진미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소집되었을 때, 가족들은 여유로운 식사에 대한 기대를 일찌감치 저버려야 한다.
오랜 전통에 따르면, 이곳은 대개 가주의 분노가 쏟아지는 장소였으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퍼스트와 세컨드는 쉽사리 포크와 나이프를 쥘 수 없었다.
큰형 도리언과 작은형 매피스도 압도적인 분위기에 짓눌려 호화로운 식사를 누리지 못했다. 모두 혀를 굴리기보다 눈알을 돌리기 바빴다.
하지만 그건 저들 사정이고.
나는 군침을 흘렸다.
기름기 가득한 닭고기에 핏기가 배어 있는 스테이크라니.
정말로 그림의 떡이군.
회귀한 뒤로 저런 음식다운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다. 그리고 이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다.
암살검가의 일원으로 육성되는 동안에는 철저하게 계산된 식단에 따라야 하므로. 이런 만찬은 성장이 완전히 끝나는 열아홉 살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달그락달그락.
이러한 이유들로, 지금 어스름홀에 퍼지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는 오로지 가주만의 것이다.
어머니는 말없이 식사를 이어나갔다. 어머니 앞에 놓인 음식만 조금씩 줄어들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이다.
“유모를 죽일까 고민했다.”
그러다 갑자기 깨지는 침묵.
나는 어머니 옆, 유모 퓌레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어머니의 한마디에 퓌레가 온몸을 달달 떨기 시작했다.
암살검가에서 ‘죽음’은 일상적인 단어다. 어머니가 저 한마디를 내뱉고 실행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면 퍼스트와 세컨드 중 하나를 죽일까 고민했다.”
오, 너무나 통쾌한 한마디.
내 이부형제의 아버지들 얼굴이 그들 앞에 놓인 음식처럼 시퍼레지는 것도 볼만한 광경이었다.
어머니의 시선이 남편들 쪽으로 향했다.
암살검가 가주의 서늘한 눈빛.
아무리 남편들일지라도 살기를 느끼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로이넨 가문의 가주는 암살자이지, 학살자는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마냥 관대하지도 않지.”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그 눈빛에는 따뜻함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우리 가문의 전통대로라면, 이 아이는 ‘100일의 요람’에서 나온 다음에야 공개된다. 그런데 그대들이 겁 없이 저지른 일 때문에 전통이 무색해졌어.”
그리고 이어지는 한마디.
“도리언, 매피스. 너희들의 동생을 두 번째로 보는 소감이 어떠냐.”
큰형 도리언은 저 물음의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에, 작은형 매피스는 압도적인 분위기 때문에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두 아이의 아버지들이 가주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제 불찰입니다.”
나는 갓난아기답게 까르르 웃었다.
지난밤에 맛보았던 멸시가 이토록 즐거운 장면으로 뒤바뀌다니. 쌓였던 응어리가 눈처럼 녹아내린다.
“두 번의 경고는 없다. 또다시 루빈의 유모를 겁박하여 뭔가를 벌인다면, 가문 역사에 재밌는 이야깃거리 하나가 추가될 거야.”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가 가볍게 턱짓했다. 그만 나가보라는 뜻이었다. 자비를 얻은 두 남자는 어정쩡한 자세로 연회장에서 벗어났다.
이제 식탁 앞에 남은 것은 도리언과 매피스뿐. 둘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오줌을 지릴 것 같은 얼굴로.
그때.
땡그랑.
갑작스러운 소음에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가주가 식탁 위로 툭 던진 것은, 매피스가 요람에서 흘린 금속 단추였다.
매피스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집어 들었다. 멍청한 놈. 내가 뜯어냈으리라곤 상상도 못 하겠지.
그런 매피스에게 어머니의 날 선 목소리가 떨어졌다.
“매피스. 날 보아라.”
“…네넷, 가주님!”
“넌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이게 네게 주어진 임무였다면 넌 절대 살지 못했을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겁에 질린 아이는 모른다는 대답조차 내뱉지 못했다. 가주가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도리언.”
“…다, 단추를 흘린 것입니다.”
그러고는 슬쩍 가주를 올려다본다.
열세 살. 아직 어린 나이다. 도리언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정답을 맞혔으니 인정받을 수 있으리란 의중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가주가 침묵하자 용기를 얻었는지 도리언이 이어 말했다.
“암살검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제 동생의 실수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멍청한 녀석의 대답치곤 제법 논리적이기도 하고.
하지만.
“틀렸다.”
저건 어머니로서 원하는 대답일 수는 있겠으나, 암살검가 로이넨의 가주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세이렌 로이넨은, 이 상황에서 다른 대답을 원했을 것이다.
“도리언 로이넨.”
“…예, 어머니?”
좀 더 패도적이고 날것에 가까운.
대륙 최고의 암살검가다운 대답.
“네가 진정 로이넨의 핏줄이라면-”
단 한 번도 표적을 놓친 적 없는, 가장 로이넨다운 대답을.
“-그때 이 아이를 죽였어야지.”
나를 안은 퓌레의 살갗 위로 소름이 번졌다. 도리언의 바지춤이 흥건해지는 꼴을 보니, 두 녀석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 말을 끝으로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가는 세이렌 로이넨.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의 만찬은 오롯이 그녀만을 위한 것인 듯.
“나가보아라.”
그래. 바로 이게 암살검가 로이넨의 방식이지.
두 아이는 하인들의 부축을 받고서야 겨우 연회장을 떠날 수 있었다. 잠시 동안 연회장에 고요가 가득 찼다.
식사를 마친 어머니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나와서 이야기해도 좋다.”
가주의 한마디에, 도리언과 매피스가 앉아 있던 자리 뒤편 그림자 속에서 은신하고 있던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도리언과 매피스의 로이넨서로군.’
로이넨서.
로이넨 가문 자제들의 가짜 아버지이자 스승.
암살검가의 아이들은 열한 살이 되면, 가문 저택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나가 살아야 했다.
위장된 별채에서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며 암살검가의 비수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가문의 호출이 있을 때나 행사가 있을 때만 저택에 올 수 있었다.
로이넨서 역할을 맡은 이들 역시 암살검가의 일원. 로이넨 가문의 아이들을 호위하며 가르치는 선생이자 보호자인 셈이다.
가문의 여러 요원들 중 실력이 출중하고 경험이 풍부한 자들만이 로이넨서가 될 수 있었다.
“오랜만이군. 아이들의 근황을 듣고 싶은데.”
가주의 말에 로이넨서들이 자신들이 준비해 온 보고서를 펼쳤다.
작은형 매피스의 로이넨서가 먼저 나섰다.
“매피스 공자님은 현재 대장장이의 아들로 위장해 지내고 있습니다. 연기와 무기 이론에 대한 수업 위주로 진행 중이고, 암연 개화는 아직 기미가 없습니다. 예상 개화 시기는 열네 살입니다.”
“처참하군. 눈에 띄는 점은?”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습니다. 겁이 많고 형 도리언을 추종하며 다소 권위적입니다.”
가주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크게 낙담하진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 본래 천재의 자식들은 유난히 모자라 보이는 법이다.
이는 역대 암살검가의 계보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가주가 출중하면, 후대 가주는 평범하거나 모자란다는 평가를 받았다.
“도리언은 어떤가?”
“작년 봄, 12세 60일의 기록으로 암연을 개화했습니다. 현재 암연을 다스리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2세 60일의 암연 개화 기록은, 역대 로이넨 자제들 기준으로 평균을 약간 밑도는 것입니다.”
“매피스보다는 나은 편이라는 거군.”
나는 까르르 웃으며 아기처럼 굴면서도, 로이넨서의 보고에 집중했다.
로이넨 가문의 육성 과정은 모두 기록된다.
도리언과 매피스는, 로이넨 가문의 역사에 평균치를 밑도는 수치로 기록될 것이다.
“더 들어봐야 좋은 이야기는 없겠군.”
세이렌의 실망스러운 반응에 로이넨서들은 보고서를 접었다. 가주의 혹평을 들었으니 내일부턴 혹독한 훈련이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손짓으로 로이넨서들도 물러나게 했다.
이제 연회장은 텅 비었다.
어머니는 적막한 연회장을 쭉 둘러봤다.
지금 어머니는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가주로서의 책임감? 아들들에 대한 실망감? 자식을 마음껏 아낄 수 없다는 답답함?
어머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가만히 나를 쳐다보는 그 눈빛이 좋았다.
“…….”
그때 어머니의 고요한 표정에 파문이 일었다.
어머니는 왼쪽 팔뚝을 부여잡으며 아픔을 참았다. 그 작은 틈새로 얼핏 상처가 보였다.
지난밤의 결투가 남긴 상처일 것이다.
만만치 않은 상대였으리라고는 예상했지만, 암살검가 로이넨의 주인을 다치게 할 줄은.
‘이때 얻은 상처였구나.’
왼쪽 팔뚝의 긴 흉터. 회귀 전에도 있었던 상처다. 저게 이 무렵 생긴 상처라는 건, 지금 처음 알았다.
상대가 누구였을까.
누구였기에 평생의 흉터를 남긴 걸까.
잘 모르지만 이 두 가지는 확실하다.
어머니의 실력에 버금가는 최소 7성 이상의 실력자라는 점.
그리고 그게 누구든,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