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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검가 로이넨-4화 (4/258)

제4화. 100일의 요람 (3)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방문 너머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가주님, 미르니코입니다.”

백발이 성성한 이 남자는 우리 가문의 의사다.

로이넨 저택에 머무르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암연을 다루지 못하는 자다. 그럼에도 상주가 허락되는 이유는 단 하나, 천재적인 의술 실력이다.

미르니코는 물리적인 수술뿐만 아니라 치유 마법까지 가능한 인물로, 가주를 비롯한 암살검가 혈통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었다.

“늦었네.”

어머니가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미르니코는 아무런 변명 없이, 고개를 푹 숙이며 가주의 명령을 기다렸다.

“들어와. 살펴볼 곳이 있어.”

침대에 걸터앉은 어머니는 왼쪽 팔뚝을 드러내 보였다.

며칠 전의 결투가 남긴 상처가 드러났다.

일반적인 상처가 아니었다. 검에 베인 상처처럼 보이지만, 은은하게 푸른빛이 감돌았다. 불처럼 뜨거운 기운도 함께였다.

“흐음.”

미르니코는 자신의 외눈 안경을 바로잡으며 심각한 얼굴로 상처를 살폈다.

“여기, 부러진 검날이 박혀 있군요.”

미르니코는 치유 마법을 이용해, 검지 크기의 검날 조각을 빼내었다. 팔뚝에서 빠져나온 검날은 잠시 공중에 머무르다, 침대 옆 가구 위에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어머니 상처에서 나오는 푸른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흐음.”

“뭔지 알겠어?”

미르니코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가문 최고의 의사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처라.

“상처에서 저항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혹시 마법에 당하셨습니까?”

“마법은 아냐.”

“기이하군요. 평범한 검상이라기엔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고, 또 알 수 없는 힘의 흔적도 보입니다. 다행히 가주님의 암연이 완전히 보호하고 있으니, 시간이 꽤 걸리긴 해도 자연적으로 소멸될 듯합니다.”

“내 생각도 그래. 점점 옅어지고 있으니까.”

계속해서 상처를 살피던 미르니코는 뭔가 짚이는 걸 찾아낸 것처럼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건 어쩌면… 검혼(劍魂)일지도?”

그러면서도 제 생각을 확신하지는 못했다.

“검혼은 5성 이상의 오러에 의해 발현되는 것인데… 좀 이상하네요. 이런 건 저도 처음 접해봅니다.”

5성의 경지. 그것이 암연이든 오러든 마나든.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다.

하지만 세이렌은 7성 경지에 오른 암살자. 고작 5성 따위에게 팔을 내어줄 애송이가 아니다. 이 검혼은 분명 7성에 버금가는 실력자의 흔적이리라.

7성이라니. 그게 얼마나 높은 경지인지 가늠조차 못 하는 미르니코에겐, 그저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미르니코는 두려움과 존경심이 뒤섞인 눈빛으로 가주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의식했는지, 어머니는 내보였던 팔뚝의 상처를 다시 감쌌다.

“세상에 강자는 많으니까.”

“그래도 가주님께서 돌아오셨으니, 그자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겠지요.”

미르니코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상대를 알아내면 이 상처에 대한 연구도 진행해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아무리 가문의 의사일지라도, 가주에게 암살의 표적을 물어볼 수는 없다.

암살검가에 내려진 황제의 칙명은 암살검가 사람들끼리도 비밀. 형제든 부모 자식 간이든 사제지간이든 상관없다.

암살검가의 사람들은 각자의 표적이 누구인지 알아선 안 되었다.

“돌아가라. 그 정도면 충분해.”

“실례했습니다.”

어머니가 미르니코를 서둘러 내보내는 이유엔, 아마 나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번 100일의 요람에는 유난히 다른 사람을 많이 들였다는 생각을 했을 테다.

‘내 암연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는 걸 걱정하고 계시겠지. 평균에도 못 미치는 도리언과 매피스보다도 한참 뒤떨어진다면, 분명 가문의 불명예일 테니까.’

내 생각이 맞았는지, 어머니는 내게 슬쩍 눈길을 주었다. 곧 침대 위로 올라와 내 곁에 누운 어머니는, 서둘러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후, 나는 밀폐된 방 안에서 어머니의 암연을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하고 웅장한 산, 드넓은 밀림.

그리고 광폭한 바다를 정면으로 마주한 기분.

‘어머니의 암연은… 정말이지 압도적이다.’

암살검가의 아기들은 오직 100일의 요람에서만 가주의 암연을 주입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100일의 요람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거대한 암연에 스르르 빠져들었다.

‘……!’

내 전생의 환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회귀 전 내 몸에 내재되어 있던, 지난 생의 암연이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용암처럼.

그와 동시에, 텅 빈 두 번째 환에 어머니의 암연이 점차 차오르기 시작한다.

‘굉장한 농도다.’

첫 번째 환은 의도적으로 감추었다. 아직 완전히 다루지도 못할뿐더러, 환이 두 개라는 걸 들킨다면 앞으로의 날들이 피곤해질 테니까.

당장은 이 조그마한 ‘두 번째 환’으로도 충분하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도리언이나 매피스 따위는 금방 뛰어넘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때.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머니의 암연 속에서 떠도는 전혀 다른 기운이었다.

아, 검혼이라고 했나. 그게 있었지.

바로 어머니의 팔뚝에 새겨진, 강적의 검혼이었다.

검혼이란 말 그대로, 무인의 영혼이 담긴 상흔. 무인 중에서도 죽음을 각오한 자만이 남길 수 있는 상처다.

물론 아무나 남길 수 있는 상처는 아니다.

‘미르니코의 말처럼, 5성 경지 이상의 오러를 가진 실력자여야 하지.’

그러나 어머니 팔뚝에 새겨진 검혼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미르니코는 긴가민가했겠지만, 나는 전생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저것이 7성 이상의 상대가 남긴 검혼이라는 것을, 5성의 검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하고 난폭한 검혼임을 말이다.

그러니까 저토록 치열하게 어머니를 꿰뚫으려 발버둥 치는 거다. 물론 어머니의 압도적인 암연 때문에 흠집도 낼 수 없겠지만.

‘나는 다르다. 위험해.’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어머니의 암연을 받아들이고 있는 이 순간, 저 검혼은 날 해할 수도 있다.

무려 7성 경지에 다다른 검혼이다. 회귀 전의 나조차 고작 5성까지밖에 다다르지 못했으니, 현재로선 감당할 수 없는 힘.

게다가 지금은 연약한 아기의 몸이다.

저 정도 오러가 담긴 검혼이 나를 노린다면… 내 암연은 흔적도 없이 갈기갈기 찢기겠지.

‘회귀하자마자 불구가 되는 건가.’

아니나 다를까. 검혼이 방향을 트는 게 느껴진다. 침입 불가능한 어머니의 몸에서, 작고 말랑말랑한 내 몸 안으로.

빌어먹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나한테 빨려 들어올 게 빤하다.

‘회귀 전 암연이라도 풀어내야 하나?’

하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첫 번째 환에 담긴 암연은 아기의 몸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거대한 힘이다. 통제하지 못하는 힘은 아군이 아닌 적, 죽음만 재촉할 뿐이다.

그렇다고 두 번째 환에 담긴 암연을 쓰기엔 너무나 미약하다. 아직 개화하지도 않은 암연, 1성 경지에도 미치지 못한다. 몇 방울도 채 안 되는 이 정도 암연으론 저 거대한 힘을 막을 수 없다.

절망감이 엄습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른 채, 검혼이 섞인 암연을 내 몸에 주입하고 있다. 어머니를 원망할 수도 없다. 아직 검혼이란 개념이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시절이니까.

‘어떻게 한다?’

생각이 복잡해진다. 곧, 살기를 품은 검혼이 내 몸속으로 흘러들기 시작한다.

이대로 내가 죽는다면?

내 회귀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그리고 미래는 다시 반복되겠지.

황제는 오랫동안 부리던 사냥개가 자신을 물어버릴 게 불안해서, 어떻게든 우릴 처리하려 들 거다.

임무 수행 중인 암살검가 가신들이 하나둘씩 사라진다. 황제는 말도 안 되는 반란죄를 물어 군대를 집결시킨다. 황제가 내건 가짜 명분에, 수많은 가문이 동조한다…….

그 얼굴.

죽기 직전의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황제의 얼굴.

휘황찬란한 금빛 가면 너머에 숨겨져 있던 그 표정.

어머니와 내 숨통을 끊는 순간, 가면 뒤로 퍼졌을 비릿한 미소가 스멀스멀 떠올랐다.

“루빈?”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어머니가 나를 부른다. 갑자기 내 몸이 불안정해졌음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검혼은 이미 내 몸에 침투했고,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검혼에 굴복해, 두 개의 환을 내어주고 불구가 될 것인가.

아니면, 검혼을 굴복시켜 그의 주인이 될 것인가.

나는 결정했다.

‘피하지도 막아내지도 못한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마.’

가능할까?

모른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다.

검혼을 밀어내려는 원래 계획을 뒤집고, 거꾸로 검혼에게 다가간다. 굴복도 방어도 아닌, ‘수용’인 셈이다.

“…음?”

무언가를 느낀 어머니가,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 평정심을 깨트리며 당황했다.

어머니 팔뚝에 있는 검혼에서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방출되고 있었다. 한순간, 번개가 눈앞에서 번쩍이는 것처럼 거대한 빛이 퍼진다.

그 강렬한 빛 속에서, 나는 주사위를 던졌다.

검혼 쪽으로, 팔을 뻗었다.

* * *

이런 제길, 정신을 잃었다.

또다시 죽어버린 건가?

어쩌면 너무 욕심을 부린 건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팔뚝에 있는 검혼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 놓인 부러진 검날 조각에도 손을 댄 것은, 분명 과욕이었다.

그걸 쥐는 순간, 의식이 가위에 잘려 나간 것처럼 끊어진 것이다. 분명 나를 더 강하게 할 거라는 직감이 있었는데. 도리어 나를 강하게 밀어낸 것 같다.

결과적으로 지금 나는 이상한 공간에 있다. 어둡고 끈적거리고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공간. 늪 속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어떻게 된 거지? 이건 죽기 전의 내 모습인데.’

새까맣고 질퍽한 늪에 비친 건, 회귀 전의 내 모습이었다. 서른 살, 한없이 나약했던 그때의 나.

나는 얼굴을 만져보려 손을 들어 올렸다. 손이 내 얼굴을 그대로 통과했다.

“역시 죽은 건가?”

내 침울한 한마디가 동굴 속처럼 울려 퍼졌다.

그런데 그 순간,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럴 리가.

하늘 쪽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푸른빛에 휩싸인 한 노인이,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거야?

“당신은 누구지?”

-그건 내가 묻고 싶네만.

“난 루빈 로이넨이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어디 자세히 좀 보지.

푸른빛의 노인이 다가와 내 몸을 살폈다. 순간 나를 공격하려는 줄 알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가, 노인의 웃음을 샀다.

-허허, 걱정 말게. 아직 아기의 숨은 붙어 있어. 몸에 열이 들끓고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무슨 말이지?”

-그것도 내가 먼저 묻고 싶은데. 어째서 아기의 몸에, 자네가 들어 있는 건가?

그러면서 노인은 내 맞은편에 우뚝 섰다. 단호하면서도 웅장한 기백이 느껴졌다.

상대가 내 존재를 알고 있다면, 더 숨길 필요가 없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보는 그대로. 난 회귀자다.”

-회귀자? 오호. 자네만의 특전인가? 내겐 그런 행운이 주어지지 않던데, 부럽구만.

“놀라지 않는군.”

-허허, 이 세상엔 밝혀지지 않은 비밀들이 많지. 그중 하나를 발견했을 뿐이야. 난 그렇게 믿는다네.

“이제 노인장이 대답할 차례다. 당신은 누구지? 여긴 어디고, 다시 돌아갈 방법은…….”

-진정하게, 젊은이.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정도(正道)를 거스르면 안 되는 법. 내 소개부터 하겠네.

노인이 한 걸음 다가왔다. 푸른빛이 옅어지며 노인의 얼굴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깐, 저 얼굴은……?’

-내 이름은 하네케 브리온. 황제 텔마흐의 오른팔이자, 제국 대장군을 지냈던 사람이지. 자네의 어미 손에 죽기 전까지는 말일세. 어찌, 날 알아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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