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첫 번째 시험 (2)
그랑버드의 가장자리에 각자 자리를 잡은 아이들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온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랑버드가 머무르는 높이보다 더 높은 상공에서 구름을 뚫고 나타나는 한 무리의 검은 형체들이 보였다.
날개를 퍼덕이며 우리 쪽으로 접근하는 검은 새들은, 하나같이 다 큰 성인을 등에 태우고도 남을 만큼 몸집이 컸다.
로이네크로우.
거대한 새 그랑버드가 황실의 비밀 무기라면, 로이네크로우는 암살검가와 수백 년 역사를 함께해온 반려자다.
탄생과 성장, 그 모든 게 신비에 감싸인 이 영물은 오직 암살검가 혈통의 명령만을 따르며, 암살자들의 임무 수행을 도와 왔다.
비록 지금은 아이들을 땅 위로 내려줄 임무만 갖고 있지만.
한 명의 암살자당 한 마리의 로이네크로우. 이게 암살검가의 유구한 전통이었다. 머지않아 나에게도 로이네크로우를 선택할 날이 오겠지.
‘그랑버드가 긴장했군.’
그럴 수밖에 없다. 이들은 평범한 로이네크로우가 아닌 아홉 암살검가 가주의 파트너들이었으니. 아무리 몸집 차이가 나도, 가주들의 로이네크로우가 지닌 위압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어쩌면 아이들은 운동장만큼 거대한 새 위에 탑승했다는 사실보다, 가주의 까마귀에 올라탈 수 있다는 것에 더 긴장할지 모른다.
푸드드득.
어머니, 세이렌 로이넨의 로이네크로우가 내 앞에서 날갯짓했다. 까마귀의 눈동자가 붉다. 어머니의 머리칼처럼.
“올라타시죠. 부축하겠습니다.”
안내자가 말했지만, 내게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 나는 폴짝 뛰어올라 로이네크로우의 등에 올라탔다.
까아악.
이유 모를 평온이 느껴졌다. 그랑버드 위에서는 느껴볼 수 없없던 편안함이었다.
돌아보니, 다른 아이들 모두 각자의 로이네크로우에 안정적으로 올라타 있었다.
안내자들은 참가자들이 추락하는 사고에 대비해, 로이네크로우와 참가자를 끈으로 연결해 주었지만, 이는 사실 괜한 짓이었다.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더라도, 로이네크로우가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으니.
“꾸물대지 말고 내려가라!”
칙명부의 시험관이 신경질을 부린다.
암살검가를 비호하는 로이네크로우의 등장이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다. 암살검가의 혈통이 아니라면 누구나 위압감을 느낄 테니, 이는 당연한 일이다.
‘좀 놀려주고 싶은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어머니의 로이네크로우가 날개를 퍼덕이며 비행을 시작했다. 그러곤 빠른 속도로 시험관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저 버릇없는 까마귀 새끼!”
시험관의 고함을 뒤로하고, 나는 빠른 속도로 지상을 향해 활강했다.
부우우웅.
귀끝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 소리. 아홉 마리의 로이네크로우는 시작 장소가 겹치지 않도록 넓게 퍼져 나갔다.
내 시작 위치는 동쪽 성벽.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어야 할 성벽 위는 텅 비어 있었다. 트룸벨 시장으로부터 내려온 지시 때문일 것이다.
대신, 기다리고 있던 칙명부 소속 안내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유리병 뚜껑을 열며 말했다.
“시험 절차에 따라 이걸 뿌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유령쥐를 끌어들일 겁니다.”
내 온몸에 짙은 갈색의 특제가루가 고루고루 뿌려진다. 그러곤 마법처럼, 곧장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부터 시작인가.’
곧바로 움직여야 한다. 곧 나를 추격할 유령쥐 다섯 마리가 코를 벌렁거리며 내 흔적을 찾아낼 테니.
막 움직이려는데, 안내자가 나를 불러 세우며 말했다.
“단서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당신은 사라져…….”
“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
처음 듣자마자 곧바로 풀었으니까.
정답은 침묵. 회귀 전 기억조차 필요 없을 만큼 간단한 수수께끼였다.
다만 저 ‘침묵’이, 표적의 어떤 부분을 상징하는 건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했다. 이는 회귀 전에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으니.
* * *
임무를 다한 붉은 눈의 로이네크로우는, 곧장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렇게 지상과 완전히 멀어지기 직전. 새는 부리를 돌려 방금 내려준 소년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소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까아악.
로이네크로우는 미련 없이 트룸벨의 북쪽으로 나아갔다. 북쪽 성벽을 넘자, 다른 까마귀들이 비행에 합류했다.
대형을 유지한 채 날아가던 까마귀들은 트룸벨 북쪽에 위치한 작은 호수를 발견하고 나서야, 지상을 향해 날개를 접었다.
호숫가에는 아담한 크기의 저택이 있었다. 트룸벨의 시장이 별채로 쓰던 이곳은, 오늘 하루 동안 시장의 소유에서 벗어났다.
황실을 상징하는 금빛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병사들과 검은 베일을 쓴 암살검가 가신들. 이들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런 그들 머리 위로, 귀환하는 아홉 마리 로이네크로우가 나타났다.
황실 병사들이 까마귀들을 경계하는 반면, 암살자들은 친근한 눈빛으로 귀환을 반겼다.
까마귀들은 그대로 경계 인원을 지나쳐 별채의 상공을 맴돌다가, 각자 지붕 한쪽을 차지하며 내려앉았다.
다만, 본가의 가주 세이렌 로이넨의 까마귀만은 열린 창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유독 몸집이 커다랬지만, 날카로우면서 유려한 움직임이었다.
제 곁으로 돌아온 로이네크로우를 쳐다보며, 세이렌이 입을 열었다.
“시작됐군요.”
별채의 1층 홀.
커다란 테이블에는 방계 가문의 가주들이 빙 둘러앉아 있었다. 당연히 상석은 세이렌의 차지였다.
그녀 맞은편에는 황제 직속 기관, 칙명부의 수장이 거만한 자세로 모두를 관망하는 중이었다.
그의 이름은 룰포. 그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세이렌의 까마귀를 쳐다보곤, 한마디 던진다.
“얼마나 뛰어난 아이들일지 기대되는군.”
잠시 후.
홀 안으로 황제가 하사한 여러 도시의 특산물과 포도주가 들어온다.
간단한 식사와 자유로운 담소가 이어졌다. 가벼운 음악이 곁들어졌고, 편안한 미소가 오갔다.
그러나 아홉 가문의 가주와 황실의 권력자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전부 내심 긴장하며 새로운 소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제 곧 시험장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상황이 속속 도착할 테니까.
각 가문의 뛰어난 암살자들과 칙명부의 병사들은 트룸벨 곳곳에 은신하며 시험장의 상황을 이곳 별채로 전파하는 중이었다.
“참가자들은 아홉 방향의 성벽으로 각각 흩어져 시험을 시작했습니다. 빠르게 사람들에게 접근해 시민들을 탐문, 방향을 정했습니다. 현재 모두가 공통적으로 향하고 있는 곳은, 시장 본채의 ‘지도보관실’입니다. 그런데…….”
보고하는 병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을 잠시 멈춘다. 뭔가 이상하다는 반응이었다.
나이프로 잘 익은 고기를 썰던 칙명부 수장이 고개를 들어 병사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참가자 중 한 명이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시험에 정석이 있다면, 도시의 구석구석을 파악하기 위해 지도부터 선점하는 것이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장소가 바로 지도보관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흐름에서 벗어난 움직임을 보이는 참가자 한 명이라.
“누구지, 그게?”
칙명부의 수장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루빈 로이넨입니다.”
본가 자제의 이름이 나오자, 방계 가주들이 반응했다. 정석에 어긋나는 행동이 의미하는 건 뭘까?
새로운 시도? 아니면 패착?
룰포는 세이렌의 표정을 살폈지만, 모둔 암살검가의 주인답게 그녀는 표정에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포도주가 담긴 유리잔을 흔들어 잘 섞이게 한 뒤,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셨을 뿐이다.
* * *
그 시각, 트룸벨.
루빈은 인파 속에 섞여 어딘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평화로운 도시 트룸벨은 축제가 한창이었고, 신분과 계급 상관없이 거리에 쏟아진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오늘을 즐겼다.
시민들은 도시로부터 불과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황제의 군대가 주둔 중이며, 암살자들이 숨어 시험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새하얀 축제 의복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말 것.
시민들은 시장이 내건 이 축제의 유일한 규칙을 충실히 지키며 술을 마셨고, 농담을 퍼부으며 춤을 추었다.
이런 사람들 속을 헤집으며, 루빈은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
축제 인파 속에서 우연하게라도 표적을 발견한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 그러니 대략적으로나마 표적이 있을 만한 곳을 추려내야 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분명 지금쯤 시장의 본채 쪽으로 접근하여 지도보관실을 노릴 것이다.
지도보관실에는 트룸벨 곳곳에 관한 세세한 정보가 표기되어 있으니, 먼저 획득하는 자가 정보 측면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될 거다.
하지만 루빈의 생각은 달랐다.
‘저기다.’
골목을 누비던 루빈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평범한 지도 가판대. 축제를 위해 임시로 그려진 지도를 판매하는 곳이었다.
이런 지도는 대충 그려져서, 트룸벨 곳곳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엔 역부족이다. 그저 축제 기간 동안, 어느 장소에서 무슨 행사가 벌어지는지를 정리해 놓았을 뿐이니.
“아저씨. 지도 구경 좀 해도 돼요?”
가판대의 점원과 눈높이가 맞지 않아, 루빈은 열심히 손을 흔들어야 했다.
“그럼! 근데, 너 돈은 있니?”
“그럼요, 여기 있어요! 일단 지도 좀 구경할게요.”
“부모님도 없이 혼자 다니는 거냐?”
점원은 지도를 건네는 대신 그렇게 캐물었다.
루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떨어진 장식품 가판대 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젊은 부부가 장식품을 이것저것 들어보면서 구경 중이었다.
“저기 있잖아요.”
“어, 그래. 정말 지도 살 거니?”
“네. 엄마가 사 오라고 하셨어요. 근데 이게 맞는지는 좀 봐야겠어요. 확인해 봐도 될까요?”
순진무구한 아이의 부탁에 점원은 의심을 거두고 지도를 건넸다. 루빈은 태연하게 펼쳐보았다.
“아, 여기가 중앙광장이구나. 여기는 공연장이고…….”
루빈의 발걸음이 조금씩 인파 속으로 향한다는 걸 점원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점원이 다시 루빈을 찾았을 땐, 루빈은 이미 그 자리를 빠져나온 뒤였다.
루빈은 인파를 헤집으며 더 빠르게 움직였다. 지도를 살펴볼 만한 한적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유령쥐는 아직 안 보여.’
그런 와중에도 루빈은 암연을 넓게 펼쳤다. 주변에 가신들이 숨어 있더라도 경지를 들키지 않을 만큼 절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살기 감지.’
루빈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암연은, 뻗쳐오는 공격성을 감지해 루빈의 몸이 더 빠르게 반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달려드는 유령쥐뿐만 아니라, 기습을 시도하는 다른 참가자들까지.
루빈은 인적이 드문 골목을 발견하곤 그쪽으로 숨어들었다. 지도를 펼쳐 오늘 있을 행사 장소를 하나씩 머리에 입력했다.
그런 다음, 지도를 반으로 접어 잘게 찢어버렸다. 정보를 보관할 가장 안전한 장소는, 머릿속이니까.
루빈은 행사 위치를 떠올리며 방향을 가늠했다. 머릿속엔 이미 조금 전에 보았던 지도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일단은 거기로 가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