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9화 (9/258)

제9화. 첫 번째 시험 (3)

“왜 지도보관실이 아니라 축제용 지도인 것이오?”

다른 참가자들이 지도보관실로 향할 때, 혼자서 축제용 지도를 구한 루빈의 행동을 두고 이렇게 질문한 건, 칙명부 수장 룰포였다.

룰포는 어째서 이 아이만 다른 방법을 택했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가주들은, 모두 루빈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룰포는 세이렌에게 답변을 구하는 눈빛을 던졌다.

“제 아이의 의지입니다. 제 입으로 굳이 설명해야 할까요?”

그녀는 여유로웠다. 그리고 내심 만족하고 있었다. 시험 초반이긴 하지만, 루빈의 행동은 중요한 변곡점이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가주들 역시 루빈의 선택이 유효했다는 걸 알았고, 그건 웃음기가 잦아든 표정으로 나타났다.

세이렌을 대신해서 갤리오트릭 가주가 입을 열었다.

“제가 설명해 드리죠. 루빈 도련님의 이번 결정은 몇 가지 차이를 드러낼 겁니다.”

“허, 그렇소? 몇 가지씩이나?”

“일반적인 침투 임무나 고위급 암살 임무라면 지도보관실에서 획득하는 1급 지도가 유용할 겁니다. 하지만 이건 그런 임무가 아니지요.”

갤리오트릭 가주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번 표적은 귀족이 아닌, 일반 시민 중 한 명입니다. 일반 시민이 트룸벨의 통제 구역에 접근할 리 없죠. 오히려 축제 지도에 나와 있는 여러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당연합니다.”

설명을 이해한 룰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어떤 행사가 있는지를 보는 게 훨씬 도움이 되겠구만.”

“지도보관실에는 당연히 영지의 경계병이 배치되어 있을 겁니다. 그들의 감시망을 뚫고 침투해야 하는 수고로움도 덜 수 있죠.”

갤리오트릭 가주의 말에 이어 본도그 가주도 나섰다.

“현재 루빈 도련님을 제외한 다른 참가자 전원이 지도보관실로 향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영지의 1급 지도는 단 한 장뿐. 서로 맞닥뜨린 참가자들은 충돌이 불가피합니다. 누군가 1급 지도를 선점했다면, 지도보관실에 가는 행동 자체가 시간 낭비일 거고요.”

“아마 지금쯤 지도보관실은 꽤 혼란스러울 겁니다.”

짜증이 느껴지는 크로키슨 가주의 한마디였다. 그는 루빈처럼 생각하지 않은 자신의 아들에게 화가 났다. 어째서 이렇게 쉬운 것을 놓친 거지? 겨우 아홉 살에 불과하지만, 진정한 크로키슨이라면 그래선 안 되었다.

다른 가주들도 루빈이 이제껏 저택 밖을 나가보지 못한 본가 자제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불만과 감탄을 동시에 느꼈다.

지능과 재능 그리고 본능의 시험장.

아직 훈련되지 않은 암살검가 자제의 재능을 확인하는 이 ‘1차 선택’에서, 저토록 효율적으로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그렇다면 세이렌, 질문해도 되겠소?”

룰포가 입을 열었다. 이번엔 답변을 피하지 말라는 암묵적 압박과 함께.

세이렌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당신이라면, 그 축제용 지도 속 어디부터 살펴보겠소? 표적을 찾아낼 최적의 장소가 어딜지 궁금한데.”

“쉬운 질문이군요. 야외 공연장입니다.”

“공연장?”

다른 가주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렌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도 룰포만이 그 뜻을 몰랐다.

“여러 사람의 등을 확인하기 가장 좋은 장소니까요.”

표적을 찾아내 뒤쪽 목깃의 빨간 표식을 제거하는 것이 최종 승리 조건. 그제야 룰포는 말뜻을 이해했다.

“일리가 있군.”

그때 새로운 소식 전파를 위해 병사가 들어왔다.

룰포는 새 접시를 자기 앞으로 가져왔고, 바싹 익은 고깃덩이를 포크로 찍었다. 그러곤 입으로 가져가 질겅질겅 씹어댔다.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가주의 생각대로 루빈이 행동했을지.”

하지만 그건 루빈이 아니라, 지도보관실 소식. 약 3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 * *

모두가 예상했던 것처럼, 지도보관실에는 영지의 경비병이 순환하며 보초를 서고 있었다.

두 명씩 짝지어 지도보관실 앞을 지키는 경비병들. 말 그대로 철통같은 보안이었다.

이들을 꾀어냈던 건 연합작전을 펼치는 두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스토네와 본도그 가문의 합동작전.

두 사람은 서로 가까운 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1차 선택’이 있기 전부터 가문 간 왕래가 잦았다.

지도보관실에 가장 먼저 도착한 건 스토네였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무리하게 침투하는 대신, 본도그를 기다렸다.

본도그가 두 번째로 지도보관실에 합류하자, 둘은 각자 역할을 나누어 경계병의 틈을 만들었다.

한쪽에서 유인책을 쓰고, 다른 쪽에서 침투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

지도보관실의 경계병은 그 간단한 전략에 넘어가 보초에 틈을 만들었고, 그사이 스토네가 안으로 침투했다.

스토네는 손쉽게 1급 지도를 찾아냈다. 그다음에는 망설이지 않고 시장의 본채를 빠져나가, 약속 장소에서 본도그를 기다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지도보관실을 나서는 순간,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무언가와 맞닥뜨렸다.

스토네가 구석 쪽으로 몸을 날려 피하자, 빗나간 공격을 아쉬워하는 목소리.

“칫.”

쿤 크로키슨이었다.

쿤은 어두운 그늘 속으로 모습을 감춘 스토네를 보곤 고갤 갸우뚱했다.

“루빈이 아니잖아?”

“루빈?”

“콧대 높은 로이넨가 꼬맹이 말이야!”

대답을 듣기도 전에 쿤은 스토네를 향해 돌진했다. 아홉 살 꼬마가 보일 수 없는 맹렬한 기세였다.

스토네는 쿤의 공격을 피할 수도, 막아낼 수도 없었다. 쿤의 움직임은 스토네가 경험해 보지 못한 수준이었다.

쿵!

쿤은 힘없이 나가떨어진 스토네의 옷을 뒤적여 1급 지도를 찾아냈다.

“본도그라고 했던가? 너랑 팀을 이룬 그 말라깽이 놈 말이야. 걔도 지금 너처럼 쓰러져 있어.”

쿤은 1급 지도를 펼쳐 통째로 기억에 담았다. 그러곤 발로 스토네의 손가락을 짓밟고 힘을 주었다.

“끄으윽……!”

소리치지 않기 위해 입을 앙다문 스토네. 그 위로 쿤의 비웃음이 흘렀다.

“약해 빠진 놈들.”

쿤은 성냥불을 피워 1급 지도를 불태워 버리곤 벽 뒤로 몸을 밀착시키며 말했다.

“여기서 한 명만 더 기다려야지.”

경쟁자는 적을수록 좋으니까. 부러진 손가락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는 스토네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온다.”

저 멀리서 지도보관실 쪽으로 접근해 오는 발소리. 쿤은 그늘 속에서 공격 자세를 취하며 씩 웃었다.

“루빈이었으면 좋겠는데.”

이런 상황은 빠짐없이 가주들에게 전파되었다.

스토네 가주는 아들의 손가락이 부러졌을 거라는 보고를 받자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어 분노를 눌러 앉히며 크로키슨 가주를 노려보았지만, 크로키슨은 어깨만 으쓱일 뿐이다.

“역시 지도보관실에서 첫 번째 판가름이 나는군.”

능청스러운 한마디에 한층 경쟁심이 타올랐다.

참가자들끼리의 충돌은 예견되어 있었다. 아니, 가주들은 충돌을 통해 자신의 아이들이 더 날카로운 검이 되기를 바랐다.

아이들 역시, 본능적으로 다른 참가자들을 탈락시켜야 한다는 걸 알았다.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다.

함정도 기습도, 모두 허용된다.

이 시험에서 쓰이는 모든 계략이 재능으로 인정되니까.

“크로키슨 꼬마애의 방식이 마음에 드는군.”

칙명부 수장은 쿤의 방식에 흡족함을 드러냈다. 그는 미소와 함께 포도주잔을 들어 테이블 건너편을 바라봤다. 건배를 제안받은 크로키슨 가주도 잔을 마주 들었다.

“저런 방식이야말로 정공법이지. 달려들어 제거하는 것. 위험의 싹을 잘라내는 것. 강한 힘을 가졌다면, 그걸 드러내고 이용하는 게 맞는 거야.”

연거푸 포도주를 마셔대는 통에 어느새 룰포의 얼굴은 붉어졌다.

“저 애, 이름이 뭐라고 했소?”

“쿤입니다.”

크로키슨 가주가 대답했다.

“쿤이라. 좋은 이름이군. 쿤이 모든 참가자들을 아작 낸다면, 이대로 시험은 끝이 나는 거 아니오? 표적 따윈 상관없이 말이야.”

“맞는 말씀입니다.”

이번에도 크로키슨 가주가 나서서 답한다. 그는 자식에 대한 칙명부 수장의 칭찬이 이어지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1차 선택’에서 아들 쿤이 우승하리라는 걸 당연하게 여겼던 크로키슨 가주였다. 그만큼 아이에 대한 자부심도 높았다.

실제로 갓난아기 시절을 벗어나자마자 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더 잔학해지도록, 더 강해지도록.

암살검가의 암묵적 규율을 깨뜨리면서까지 아들의 조기교육에 심혈을 기울였고, 이제야 그 빛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로이넨 가문의 방계라는 그늘에서 벗어나, 본가를 압도하는 그날이 멀지 않으리라고도.

“재밌겠단 말이지. 다른 참가자들을 죄다 탈락시키는 아이가 있다면 이 얼마나 깔끔한 결과겠소? 내가 폐하께 보고드리기도 간편하고 말이야.”

룰포의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고만고만한 검 열 자루보다, 확실한 명검 하나가 값진 법이지. 아, 세이렌. 혹시 이전에도 이런 사례가 있었소? 한 명이 다른 참가자들을 전부 탈락시켜서 우승한 사례 말이오.”

세이렌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없지는 않았지요.”

“없지는 않았다라? 그럼 최초가 되지는 못하겠군. 하긴, 워낙 역사가 긴 시험이니까.”

룰포는 그 기록을 최초로 세운 사람이 누구인지 캐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답을 알고 있는 다른 가주들은, 미묘한 눈으로 모두 한 번씩 세이렌을 쳐다봤다.

참가자 전원을 탈락시키는 방식으로 우승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세이렌 로이넨이었으니까.

그 방법은 쿤에게 비할 바 없이 잔혹했고 무자비했음을 다른 가주들은 기억했다.

세이렌과 함께 1차 선택에 임했던 아이들 중 절반은 암살자로 활동하지 못하는 몸으로 영영 잊혔다는 것은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였으니.

다른 가주들의 경외 어린 눈길을 받은 세이렌이었지만, 지금 그녀 머릿속에는 그저 아들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루빈, 너는 어떻게 증명해 보이겠느냐?’

마침 시험장 상황을 새롭게 전달하기 위해 병사가 홀 안으로 들어왔다. 그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시험장의 새로운 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참가자 루빈은 연극 무대를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집결한 공연장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공연장에 도착하기 전, 한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세이렌이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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