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10화 (10/258)

제10화. 첫 번째 시험 (4)

공연장에 도착하기 전, 루빈에게 일어난 사건은 바로 ‘기습’이었다.

루빈은 공연장을 향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적당히’ 빠른 속도였다. 암연을 이용하면 세 배는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암살검가의 아홉 살로서 괜찮은 몸놀림을 보여주는 것. 그 이상을 보여주면 눈에 띄게 되니 이 정도가 충분했다.

시험장 곳곳엔 암살검가 각 가문의 가신들이 은신해 있었다. 가신들에 의해 시험장의 상황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파될 것이다.

물론 다른 아이들은 은신한 가신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겠지. 몸에 지닌 암연을 개화하지 못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 당연했다.

천부적이라는 쿤 역시 암연을 개화하긴 했어도 아직은 미미한 수준일 뿐.

하지만 루빈은 달랐다.

넓게 펼쳐둔 암연은 가신들이 어디에 숨어서 시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지 알려주었다. 암연의 경지는 아직 그들보다 낮겠지만, 다루는 솜씨만큼은 훨씬 앞섰으니.

그렇다고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다. 회귀한 뒤로 쌓아온 것들을 모두 보여주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벌써부터 위험분자로 분류되어선 안 된다.

‘황제는 뛰어난 재능을 원하지, 위험한 재능을 원하지 않을 테니까.’

루빈이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공격성을 띤 뭔가가 루빈의 암연 안으로 들어왔다.

‘빠르다.’

매섭게 좁혀지는 거리.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골목에서 튀어나오자마자 팔을 뻗으며 루빈의 머리를 노린다.

슈우웅.

움직임을 감지했을 때부터 예상했던 공격. 루빈은 허리를 틀어, 날아오는 주먹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순간, 기습을 시도했던 소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퍼져 나가는 게 보였다. 눈이 커다래지고 입술이 떨리는.

‘쿠니틀리 가문이었던가?’

쿠니틀리 가문의 외동딸, 하밀 쿠니틀리.

하밀은 쿠니틀리 가주가 힘들게 얻은 자식이었다. 하밀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 암살검가는 후계 없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다행히 하밀은 영리했고 실력도 출중했다.

회귀 전 ‘1차 선택’에서 2등이란 성적을 기록할 만큼.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최고점을 획득한 쿤 바로 다음이었다.

이때 루빈의 성적은 고작 4등. 그것도 운 좋게 얻어낸 성적이었다.

‘오랜만에 보네.’

그랑버드 위에서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칙명부 앞이었고, 더불어 여러 아이들의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습과 회피. 적대적이긴 상황이긴 하지만, 이렇게 짧은 뒤엉킴으로 마주하는 것도 루빈으로서는 해후라면 해후였다.

쿠니틀리 가문은 십수 년 후, 자신들의 희망으로 여겼던 하밀이 처음 임무를 수행하는 그날에 딸을 잃게 된다.

재능 부족 때문이라기보단 경험 부족이 맞았다. 게다가…….

‘칙명부가 제공한 정보에 빈틈이 많았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독이었다. 칙명부에서 독에 대한 정보만 미리 줬어도, 하밀은 살 수 있었다.

독에 당한 채 분전하던 하밀은 결국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

재능 있는 자제가 수십 발의 화살과 창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은, 당시의 나에겐 여러모로 충격이었다.

타닷.

기습을 피한 루빈은 하밀과 멀찍이 떨어져 그녀와 마주 보았다.

속력으로 따돌리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힘으로 제압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잠시 이야기를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밀도 루빈 생각을 눈치챘는지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루빈 도련님, 대단하신데요?”

“하밀 쿠니틀리. 어디서부터 나를 노렸던 거야?”

“제 이름을 아시네요? 노렸던 건 아니에요. 누가 됐든 기습을 하려고 했어요. 이렇게 쉽게 피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하밀은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다시 공격 자세를 취했다.

“아직 여유로우시네요?”

잠자코 쳐다보는 루빈을 향해 하밀이 묻는다.

위협이 되질 않으니 여유로울 수밖에.

대답 대신 루빈은 암연을 통해 주변을 감지했다. 숨어서 지켜보는 가신들의 위치가 곧바로 파악됐다.

네 명.

루빈과 하밀이 대치하고 있는 좁은 골목 주위로 네 명의 가신이 시험 상황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 해의 기대주에게 다섯 명의 가신이 따라붙는 걸 생각하면, 꽤 많은 숫자였다. 자칫 잘못하면 칙명부의 이목을 끌 수도 있다.

‘그래도 저기라면 괜찮겠어.’

가신이 흩어져 은신하는 그 대형에도 빈틈이 있었다. 일종의 사각지대였다.

루빈의 계산대로라면, 지금 가신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어차피 안 보내줄 거잖아, 그치?”

“본가의 참가자를 탈락시킬 수 있다면 제 평생의 영광인걸요.”

“좋아. 나도 봐주지 않을게.”

타탓.

그러나 루빈은 말과 다르게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어질 공격에 대비하던 하밀은 피식 웃으며 그 뒤를 쫓았다.

골목이 꺾이는 지점마다 방향을 틀며 요리조리 누비는 루빈. 잡힐 듯 말 듯한 오묘한 거리 차이가 하밀을 안달 나게 했다.

“하아, 하아…. 체력이 좋으신데요.”

막다른 골목.

유인에 걸려들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하밀이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벽 쪽을 바라보던 루빈은 여유롭게 몸을 돌렸다.

“싸울 수 있겠어?”

“물론이죠.”

루빈은 양팔을 벌린 채로 공격을 기다렸다.

하밀은 로이넨 가문에 대한 예우를 지키면서도 루빈의 여유로운 태도에 자극을 받고 있었다.

“하앗!”

눈을 부릅뜨면서 달려드는 하밀의 모습에 루빈은 미소 지었다. 저렇게 감정이 잔뜩 실린 공격은 피하기 쉽다.

스윽.

가볍게 피해버린 루빈의 움직임으로 인해, 승자를 가리지 못한 채 둘의 첫 육탄전은 싱겁게 끝났다.

“…….”

티 내지는 않았지만 하밀은 놀라는 중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 루빈의 움직임을 놓쳤으니. 하지만 그녀는 곧 두 번째 공격을 위한 자세를 잡았다.

루빈 또한 방어 자세를 지켰다.

‘이번에도 공격을 흘려보내는 것부터 시작이다.’

“하앗!”

다시 달려드는 하밀을 피해 바닥을 박차며 뛰어오른 루빈. 중심을 잃고 고꾸라지는 하밀의 어깨를 가볍게 밟았다.

“……?!”

아까에 이어 연거푸 공격이 그대로 무산돼 버리자, 하밀의 얼굴에 또다시 당혹스러움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때. 공중에 떠오른 루빈은, 허리를 휘어 회전하며 다시 땅으로 향한다.

기이할 정도의 유연함.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을 하밀은 납득하지 못했다. 그녀 앞에 착지한 루빈이 가볍게 팔을 뻗었다.

팍 소리와 함께, 하밀이 뒤로 밀려나며 나뒹군다.

“괜찮지? 자, 일어나.”

루빈은 손을 내밀었다.

하밀에게는 어떤 적개심도 없었다.

1년 전 쿤에게 했던 것처럼 암연을 이용해 공포를 느끼게 할 필요도, 넘어진 상대를 다시 공격할 필요도 없었다.

그건 하밀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내 어깨를 밟고 뒤쪽으로 뛰어오르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내 앞에……?”

경쟁을 떠난 순수한 감탄이었다. 그러나 하밀은 루빈이 건넨 손을 잡진 않았다. 대신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루빈 도련님. 시험 시작할 때 몸에 어떤 가루를 뿌렸나요? 노란색? 파란색? 아니면 갈색?”

“그건 왜 물어?”

그러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하밀의 두 어깨가 축 처졌다.

“솔직히 도련님한테 감탄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속도만으로는 제가 최고일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모든 쿠니틀리는 강자를 존경해요. 도련님은 저보다 좋은 성적을 받을 자격이 있어요. 가루 색깔을 알려주시면, 도련님의 유령쥐를 제가 따돌려드릴 수 있어요.”

루빈은 하밀의 두 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진실을 가려내기 위한 관찰이었지만, 곧 그만두었다.

그래. 전생에서도 하밀은 강자를 존경하며 잘 따랐다. 루빈의 계획에는 없었지만, 하밀과 손을 잡는 것도 나쁜 수는 아닐 거다.

루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갈색.”

“역시 갈색이었군요. 휴, 잘 됐네요.”

주저앉은 상태에서 바닥을 짚고 있던 하밀의 팔이 슥 움직였다. 다시 공격이 이어지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하밀은 한쪽 주머니에서 뭔가를 빼냈고, 그걸 루빈을 향해 던졌다.

끼기긱, 끼기긱!

‘유령쥐?’

하밀의 손을 떠나 빠르게 날아오는 유령쥐가 루빈의 시야를 채운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

순간, 루빈은 그녀의 속셈을 알아챘다.

시험의 규칙에 따르면, 참가자는 각자 다섯 마리의 유령쥐의 추적을 받는다. 유령쥐는 참가자가 시험을 시작하며 뿌린 특제가루에 반응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루 색깔을 물었구나.’

유령쥐는 추적 대상이 아닌 사람에게는 그냥 한낱 쥐일 뿐.

‘주머니에 유령쥐를 넣어두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밀은 자신이 붙잡은 유령쥐를 계속 주머니에 넣어두고 다니면서 탐지기처럼 사용했다.

유령쥐가 요란스럽게 들썩이며 반응할 때마다, 다른 참가자가 근처에 있단 걸 알아차린 것이다.

처음엔 유령쥐가 무슨 색 가루에 반응하는지 몰랐지만, 루빈을 통해 확신했을 것이다. 루빈을 기습할 수 있었던 것도 저 유령쥐 덕분이겠지.

끼기기, 끼기기!

성난 유령쥐들이 눈으로도 따라가기 힘들 만큼 빠르게 움직이며 루빈의 등을 노린다.

거기에 하밀까지.

루빈이 유령쥐를 쳐내는 그 틈을 노리던 하밀은,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엉성하긴 해도, 날렵하고 교묘한 전투술.

‘유령쥐를 탐지기뿐만 아니라 무기로까지 쓰는군.’

하지만 하밀의 영리함에 감탄하고 있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등에 있는 리본이 유령쥐에게 뜯기는 순간 탈락이니까.

아직 아홉 살 꼬마들이라지만, 이들은 엄연히 암살검가의 기대주들. 이 정도 영악함은 예상했어야 했다.

더구나 하밀은 이때의 준우승자이지 않나.

‘방심했다.’

거칠고 포악한 기세로 달려드는 유령쥐 두 마리. 계속 빗맞히긴 해도 점점 날카로워지는 하밀의 공격.

어찌 됐든 둘을 피해 빈틈을 노려야 했다.

루빈은 힘껏 몸을 비틀었다.

“어…엇?”

하밀로서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하밀이 맞닥뜨린 건 루빈의 잔상.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한 그 짧은 순간에 몸 정중앙으로, 얼음에 대못이 박힌 것처럼 날카로운 파장이 이어진다.

“아악!”

그렇게 하밀은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잠시 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주변을 둘러봐도 루빈은 보이지 않았다. 루빈을 추적해야 할 유령쥐 두 마리도 옆쪽에 쓰러져 기절해 있다.

“……?”

이해할 수 없다. 뭔가가 번쩍이는 것 같았는데. 정신을 잃고 깨어나 보니 모든 게 잠잠해져 있을 뿐.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만은 알 것 같았다.

루빈과의 실력 차이.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머나먼 차이를.

‘그 움직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어.’

하밀은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크게 숨을 내쉬고.

“본가 사람은 겉보기에만 번지르르하지, 시험에선 별거 없을 거라고 했는데.”

그녀가 알고 있던 사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하밀은 기절한 유령쥐 두 마리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다가,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뭔가에 놀랐다.

“이건 뭐야?”

검은색 잎과 빨간색 잎이 교차해 핀 독특한 꽃이다. 이 도시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트룸벨꽃이었다.

트룸벨꽃을 골똘히 내려다보며, 하밀은 루빈의 의도를 추측했다.

‘무슨 의미로 이걸 준 거지?’

그러다가 스쳐 지나가는 생각.

“아, 이거… 어쩌면?”

트룸벨꽃의 꽃말은 ‘침묵’.

하밀은 시험관이 낸 수수께끼, ‘이름을 불렀을 때, 사라져 버리는 당신’의 답이 바로 침묵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이걸 알려주기 위해 남긴 흔적은 아닐 거다. 분명 뭔가가 더 있는 것 같은데.

“표적이 이 꽃이랑 관련 있다는 건가? 아니, 그보다…….”

왜 날 도와주는 거지?

이 또한 루빈의 승리 계획 중 하나라는 걸, 하밀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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