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우승자의 특권 (2)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암살검가 방계의 가주들은 자제들을 데리고 로이넨 저택을 떠났다. 길 위에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했지만, 암살검가에게는 낮보다 밤이 편한 법.
친숙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에게 루빈이 예를 표했다.
‘2년 뒤에는 다들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2차 선택’까지 남은 시간은 2년.
그동안 공식적인 교육은 불가능한 것이 불문율이지만, 그럼에도 방계 가주들은 자식들을 열심히 제련할 것이다.
특히 쿤은, 루빈에게 앙갚음하기 위해 무슨 수든 쓸 게 틀림없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다른 이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 남은 정원에서, 루빈은 검날 조각을 쥐고 있던 손을 펼쳐 보았다.
그때 가신 하나가 루빈 쪽으로 다가왔다.
“루빈 도련님, 가주님이 어스름홀에서 기다리십니다.”
“알겠어. 바로 갈게.”
어머니가 어째서 자신을 찾는지 알고 있었다.
루빈의 선택이 가져온 파장.
적어도 그 자리에서 선택의 이유를 물은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만한 결정은 아니었다.
“들어와라.”
텅 빈 어스름홀 한가운데, 세이렌이 서 있었다.
루빈이 다가가자 그녀는 곧장 본론부터 꺼냈다.
“네 선택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예, 가주님.”
“누군가는 네가 다른 가문을 무시했다고 생각할 거다. 또 누군가는, 내가 특별히 고지한 열 개의 품목보다 네가 선택한 물건이 더 뛰어난 것은 아닐까 의심했겠지.”
무미건조한 어조.
도무지 어머니의 감정을 읽을 수가 없다.
“나 또한 밤새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 내렸다. 내가 말한 모든 의혹들은 전부 틀렸다고. 내 말이 맞느냐?”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하면, 네가 나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그 창고를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보구를 마음껏 움켜쥘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게냐?”
“결코 아닙니다.”
“그래, 다행히 멍청이는 아니구나.”
세이렌은 궁금했다.
대체 왜 케르기티의 단검을 고르지 않았을까.
암살검가 혈통이라면, 갓난아이조차 동경하는 명검이다. 골랐다면 루빈은 로이넨가 역사에 이름을 남길 실력자가 될 수도 있었다.
세이렌은 말없이 루빈을 쳐다보았다.
루빈은 분명, 제 행동의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감.
세이렌은 루빈에게서 근거 모를 자신감을 보았다. 후회나 의심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견고한 자신감이었다.
“네가 고른 그것은 그저 검날 조각에 불과하다. 보구라고 불리기는커녕 무구가 될 수도 없는, 일종의 기념품이란 말이지. 뭐, 조그마한 비수 정도로 제련할 수는 있겠다만, 그러기 위해 고른 건 아닐 테고.”
1차 선택에서 고른 보구는 평생 주인 곁을 지키며 적과 싸워줄 ‘동료’다.
이 소중한 기회를 이런 식으로 사용한 아들의 결정이 어떤 결과로 되돌아올지, 세이렌은 장담할 수 없었다.
“오늘 네 결정이 훗날 널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좋다, 네게도 다 계획이 있겠지.”
세이렌은 루빈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이번 시험으로, 네 기지(奇智)를 확인했다. 영리하더구나. 하지만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영리함만으론 부족하지. 특히 2년 후에 있을 ‘2차 선택’은, 영리함만으로 헤쳐나갈 수 없는 시험이라는 걸 알고 있겠지?”
“그때도 우승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루빈의 망설임 없는 대답.
세이렌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2차 선택’은, 오늘 있었던 시험과는 결이 다르다. 흔히들 ‘2차 선택’을 두고, 평생의 정신적 상흔이 될 만큼 괴로운 시험이라고 한다.
그런데 루빈은 당연하다는 듯 우승을 선언했다.
무모함. 혹은 자신감.
결과적으로 무엇이 정답일지는 2년 뒤에나 알 수 있겠지만, 방금 루빈의 대답은 듣기에 싫지만은 않았다.
도리언이나 매피스에게서는 기대하지 못했던 모습. 어쩌면 일말의 희망을 품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만 방으로 돌아가거라.”
루빈이 어스름홀을 나서려는데, 세이렌이 다시 불러 세웠다.
“네가 고른 그 검날 조각이 누구의 것인지 아느냐?”
“놓여 있던 자리에 쓰여 있었습니다. 하네케 브리온의 검날 조각이라고요.”
“한때 제국 대장군이었던 자다. 강한 자였지. ”
그러면서 세이렌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왼쪽 팔뚝에 손을 갖다 댔다. 하네케가 입힌 검혼이 거기에 남아 있었다.
“그건 그가 남긴 유품이다. 네 선택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는 뜻이야.”
방으로 돌아온 루빈은 책상 앞에 앉았다.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창밖에서 비추는 달빛에 따라, 검날 조각이 반짝거린다.
전설적인 무구들을 놔두고 고른 물건.
‘제국 대장군, 하네케 브리온.’
태어난 직후에 만나고 못 봤으니, 그사이 9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이날만을 기다렸다. 복수를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 순간이 온 것이다.
“하네케.”
루빈은 나직하게 불렀다.
검날 조각을 쥔 채로.
루빈의 몸속에서 뭔가 일렁이는 게 느껴졌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그러곤 쭉 무반응이었다.
‘……?’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나? 모르겠다.
그날 밤, 응답하지 않는 하네케 때문에 루빈은 쉬이 잠들 수 없었다.
어둠이 완전히 가시고 해가 떠오를 때까지, 루빈은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하네케의 응답을 기다렸다.
“어머! 도련님, 벌써 일어나셨네요?”
세숫물을 든 퓌레였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루빈의 쾡한 얼굴을 보곤, 잠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어머, 밤새 뭐 하신 거예요?”
“잠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우승하고 돌아왔으니 오늘 하루는 느긋하셔도 된다고요!”
루빈은 퓌레의 말에 대꾸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몸속에서 울렁이는 움직임이 느껴졌으니까. 루빈은 눈을 감고 집중했다.
곧 새까맣던 시야가 환해지며 ‘내면세계’가 열린다.
그리고 저 멀리.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어둠에 가려진 윤곽이 선명해지면서 비로소 드러나는 모습. 한 손은 뒷짐을 지고, 다른 손으로는 하얀 수염을 매만지는 노인은, 틀림없는 하네케였다.
-오랜만이군.
‘하네케 브리온.’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건지. 정말 길고도 지루한 어둠이었어. 난 내가 정말로 죽어버린 줄 알았다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약속을 지킬 줄은 몰랐지. 그나저나 자네, 어느새 소년이 되었구먼.
‘벌써 9년이 흘렀으니까요.’
-허, 9년이라.
하네케는 루빈의 반짝이는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난 9년 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꿰뚫어 보려는 듯이.
두 개의 환, 그리고 텅 빈 하네케의 환까지. 총 세 개의 환이 루빈의 심장을 휘감고 있었다.
-전생의 환은 아직도 다루지 못하고 있군. 두 번째 환은 꽤 많이 성장했고. 암연이라고 했나? 자네들의 힘의 근원 말이야.
‘맞습니다. 암연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생전에는 몰랐네. 자네 어미에게 죽는 순간까지도 말이야. 지금 자네의 몸속을 들여다보니 대충 어떤 힘인지 가늠은 되는군.
‘그럼 제 세 번째 환도 보이시죠? 대장군이 주신 환이요.’
-음?
그렇게 묻는 루빈의 얼굴에는 새로운 단계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전설과도 같은 브리온 검법을 익힐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다.
‘언제 시작할까요?’
-뭘 말인가?
루빈은 갑자기 바닥을 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두 사람이 서 있던 검은 늪에 부드러운 파동이 일어났다.
‘알고 계시잖아요, 브리온 검법.’
-오랜만에 재회했는데 다짜고짜 검법 이야기부터 꺼내다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네케는 루빈의 이 저돌적인 향상심이 싫지만은 않았다.
‘하아아앗!’
루빈은 빠르게 파고들었다.
노리는 곳은 하네케의 심장.
하네케는 루빈의 공격 속도에 맞추어 세로로 세운 검을 비틀며 공격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곧장 루빈의 왼쪽 다리와 오른쪽 허벅지를 검으로 베었다.
‘진짜 검이었다면.’
루빈은 속절없이 하체를 잃었을 것이다.
루빈은 도약하여 하네케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두 사람이 싸우는 공간은 루빈의 내면세계.
최초의 만남에서는 어둠의 늪이었던 이곳엔 지난 일주일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네케와 대면하는 공간을 의식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걸 알아낸 루빈이, 이곳을 가상의 대련장으로 뒤바꿨기 때문이다.
광활한 대지,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대련장.
‘내일 아침엔 허벅지가 작살 나 있겠군.’
이 훈련의 영향은 곧장 현실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네케가 성공시킨 공격은 비록 루빈의 살점을 도려내지는 못하지만, 수련을 끝낸 뒤 현실로 돌아왔을 때 육체적인 고통을 그대로 전달했다.
-로이넨가 검법의 핵심은 ‘일격’이네. 심장이 아니면 목을 노리는 공격이 주를 이루고 있지.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한 검술이라는 말일세.
그저 검을 부딪치며 대련만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하네케는 암살검가의 검법을 정확히 꿰뚫었다.
암살검가의 목표는 오직 ‘빠른 죽음’에 있었다. 전투의 흔적은 적을수록 좋았다. 그런 이유로, 다른 검술명가의 방식처럼 유려하진 않았다.
-하지만 내 검은 어떻게 움직이던가?
‘대장군의 검은… 마치 검무를 추는 것 같아요. 뭐랄까, 일부러 죽음을 미뤄두려는 것처럼.’
좋은 말로는 ‘유려함’이지만, 나쁜 말로는 ‘비효율적’이라는 뜻. 하네케가 기분 나빠할 수도 있었지만 루빈은 솔직히 말했다.
로이넨가의 검법과는 너무나 달랐으니까.
-죽음을 미뤄둔다라. 좋은 해석일세.
하네케는 풀쩍 뛰어 다시 루빈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목검을 바닥에 꽂은 채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틀렸네. 브리온 검법의 핵심은, ‘생존’일세.
‘생존이라고요?’
-브리온 검법이 빛을 발하는 곳은 검투장이나 검무 무대가 아니네. 전쟁터지. 자네 가문처럼 일대일이 아닌, 일대다를 해내야 하는 검술이란 뜻이네.
브리온 가문은 대대로 뛰어난 군인을 배양했다. 대장군의 직위에까지 올랐던 건 하네케가 유일했지만, 역사적으로 수많은 브리온이 지휘관을 역임하며 전장을 누볐다.
-검무를 추는 것처럼 화려하게만 보여도, 그건 자네 암살검가 검법과의 차이일 뿐. 생존의 가치에서 보면 극도로 효율적이란 뜻이야.
생존의 검술.
최초에 브리온 검법은, 검이 아닌 창에서 비롯되었다. 전쟁터에 특화된 창술을 토대로 하는 검술. 때문에 상대와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루어지는 공격술이 많았다.
가장 큰 특징은, 적의 숨통을 끊어놓기보다는 상대의 움직임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심장을 노리는 대신, 더 쉬운 발목과 손목을 노리는 것. 생존이 핵심이라면, 하네케의 말처럼 이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리라.
‘그래서 내 손목과 발등이 남아나질 않았던 거군요.’
훈련을 끝낼 때마다 루빈에게 남는 고통은 죄다 손목과 발등, 허벅지와 발목 부근이었다.
-오늘은 이만하도록 하지.
‘벌써요? 이제 겨우 한 시간 했을 뿐인데요.’
루빈은 바닥에 꽂힌 하네케의 목검을 집어 들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 루빈이 건네는 목검을 받지 않았다.
-루빈, 난 자네에게 브리온 검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지, 전승하겠다곤 안 했네.
‘예?’
루빈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목검을 내려다봤다.
이제 고작 일주일에 불과한 시간.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네케가 루빈의 능력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무서운 습득력.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는 루빈이 회귀자라서가 아니다. 검법을 익히는 일은, 경험이나 지식과 같은 ‘의식’이 아닌, ‘무의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회귀 전의 경험과 지식은, 오히려 루빈의 습득을 방해해야 함이 옳았다.
루빈은 서른 살 하고도 9년이나 더 살아온 사람이었으므로, 자신의 본래 토대에 대한 관성에 지배당해야 했다.
마법이나 검술 할 것 없이, 뭐든 어린아이때부터 익혀야 가장 습득력이 빠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루빈은 달랐다.
검법을 익힐 때만큼은, 루빈은 회귀 전의 모든 기억을 까맣게 잊었다. 새하얀 종이처럼, 그 위에 무엇을 쓰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심지어는 때때로 그 위에 자신만의 색깔을 입히기도 했다.
‘루빈이라면, 우리 브리온 검법을 새롭게 창조해 나갈 게 분명해. 그건 루빈 본인에게는 좋겠지만, 브리온 고유의 검법을 소멸시키는 결과를 낳을 거다.’
브리온 검법은 이미 그의 손자가 전승했다. 루빈이 아니더라도 대대로 이어져 내려갈 것이다.
그런데 루빈이 나타나, 변형된 그리고 더 개선된 브리온 검법을 사용한다면? 기존의 브리온 검법은 사장되고 말 것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바로 하네케의 걱정이었다.
툭.
루빈이 던진 목검이 하네케의 바로 옆에 내리꽂혔다. 검법을 전승하지 않겠다는 말에, 반항이라도 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자네, 지금 내게 시위라도 하겠다는 건가?
‘대장군. 대장군은 브리온 검법의 존폐가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존폐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제게 전승하지 않으면, 브리온 검법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겁니다.’
하네케는 무슨 말이냐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자신이 세이렌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는 하나, 브리온 검법을 이어나갈 손자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사라져 버린다니?
솔직히 루빈에 비하면 손자 녀석이 훨씬 뒤떨어지는 재능이긴 했지만, 검법의 소실을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다.
‘음.’
반면 루빈은 하네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지금 이 세상엔, 하네케의 뒤를 이어 가문의 검법을 이어나갈 브리온 일족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하네케가 황제 텔마흐의 방식에 대해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걸 어떻게 설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