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빛과 반역의 탑 (3)
빛과 반역의 탑.
탑은 드넓은 미르베르크 평원에 홀연히 서 있었다. 탑이 있는 중심부로 가기 위해선 세 겹으로 둘러싸인 담벼락을 하나씩 통과해야 했다.
루빈은 그 첫 번째 관문에 섰다.
“가죽 상인 반테스 가문의… 미겔 반테스, 맞습니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루빈. 그러자 탑의 안내인이 하얀 로브를 살짝 들춰 루빈과 시선을 맞췄다.
“아, 실어증을 앓고 있다 했던가요? 그렇다면 뭐, 대답은 들은 거로 하지요.”
저벅저벅.
안내인이 몸을 돌려 앞서가기 시작했다. 칙명부의 지시가 있었는지 검문은 그걸로 끝. 루빈은 검문 없이 나머지 관문들을 통과했다.
이윽고 탑의 출입구.
고개를 들어 보니 거대한 두 개의 탑, ‘빛의 탑’과 ‘반역의 탑’이 하늘을 떠받드는 모양새로 서 있었다.
“들어가시지요.”
두 개의 탑 사이에 자리 잡은 통로를 가리키며 안내인이 말했다.
커다랗고 으슥한 통로.
그곳에 발을 내딛자마자 어두웠던 내부가 일순간 불빛으로 채워졌다.
‘마나?’
루빈은 탑 내부에 가득 들어찬 무언가를 느꼈다. 내면세계 안의 하네케가 나섰던 것도 그때였다.
-으, 온 사방에서 마나가 진동하는군.
‘하네케도 마나에 감응할 줄 아십니까?’
-이 정도로 팽배한 마나라면 마법사가 아니어도 느끼지 않겠나? 그런데 확실히… 죽기 전보다 마나에 더 섬세해진 것 같아.
마나를 느끼는 것은 오로지 마법사들의 특권. 오러를 사용하는 무인들이나 일반인은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건 암연을 토대로 한 암살검가 일족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건 저도 그렇습니다.’
이상하게도 죽은 하네케와 회귀한 루빈 둘 다 이전의 삶보다 마나에 섬세해진 상태였다.
심지어 움직일 때마다 탑을 가득 메운 마나와 얽히는 것 같았다. 마치 물속을 걷는 느낌이랄까. 온몸이 거북하고 무거웠다.
‘걷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요. 이곳에 마나가 이렇게나 많았을 줄이야.’
-전부 탑을 지키는 데 쓰이는 거라네.
‘마법이 설치되어 있다는 건가요?’
-그래.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개의 마법이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여기에 마법이 수천 개나 있다고요?’
그건 루빈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더욱 흥미가 돋았다. 하네케는 회상에 잠긴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죽기 전, 대장군 자격으로 이 탑에 내장된 마법을 보수하는 걸 참관한 적 있었네.
저벅저벅.
하네케와 열심히 대화하고 있었지만, 긴 통로 안에 울리는 건 안내자와 루빈의 발소리뿐이었다.
흩뜨려지는 정신을 다시 그러모으며, 루빈은 하네케의 말에 집중했다.
-외부의 공격에 대비한 광범위 방어 마법, 만에 하나 적이 침투하더라도 척결할 수 있는 보안 마법까지. 제국마법여단 소속 마법사들이 직접 와서 보수했었지. 이러니 마나로 가득 찰 수밖에 없지 않겠나?
‘빛과 반역의 탑’을 가득 채운 마나.
하네케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자세히 알지 못했을 사실이었다.
회귀한 뒤 가문의 서고를 들락거리면서 여러 책을 읽었어도, ‘빛과 반역의 탑’에 마나가 들끓고, 수많은 마법이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 같은 건 쓰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당장 루빈에게 엄습하는 불안은, 이 상태로 탑의 꼭대기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수많은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니. 지금 상태론 도저히 불가능해요.’
탑을 휘감은 계단을 걸어 오르는 것. 그게 일반적인 관람이었다. 전생의 루빈이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거다. 몸이 마나 자체를 느끼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나 감응도가 너무 높아.’
기본적으로 암연은, 오러와 마나 두 힘을 배척한다. 그래서 암연이 담긴 환에는 오러와 마나가 자리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팽배한 마나가 몸속에 스며들며 암연과 끊임없이 부딪치고 있었다. 육체가 점점 약해지는 이유였다. 마치 독에 감염된 것처럼 온몸이 둔해졌다.
‘버틸 수 있으려나.’
-자네, 괜찮나? 곧 쓰러지겠는데?
쓰러져서는 안 된다. 이 탑의 꼭대기로 올라가 하네케에게 보여줘야 할 게 있었으니까.
그거야말로 이 여정의 진정한 목적. 여기서 쓰러진다면, 브리온 검법을 전승할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만다.
“괜찮으신가요?”
어느새 걸음을 멈춘 안내인이 루빈을 돌아보고 있었다. 루빈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겔 님은 실어증에, 몸도 좋지 않으시다고 했죠. 안 그래도 최대한 배려해 주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직접 계단을 오를 필요는 없으니, 조금만 참아보세요.”
환청인가 싶을 정도로 반가운 소리였다. 곧 루빈은 안내인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이 두 개의 탑 사이에 있는 통로의 끝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네모난 판상 하나가 바닥에서 떠올랐다.
자세히 보니 판상 주위로 투명한 마나 벽이 에워싸고 있었다. 마치 유리로 만든 새장 같았다.
‘마법이군. 이걸 타도 괜찮다는 뜻인가?’
두우우웅.
판상은 두 사람이 올라서자마자 공중으로 치솟는다. 그랑버드를 타고 날아오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안정감.
층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층 내부의 불이 밝혀졌다. 그러다가 판상이 멀어지면 층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그렇게 고층으로 이동할수록, 루빈을 억누르고 있던 마나도 점차 희석되고 있었다. 탑의 고층부일수록 마나의 농도가 옅은 까닭이다.
“후…….”
어느덧 몸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돌아왔다.
“무서워 마십시오. 이렇게 이동할 수 있는 것도 특별한 경우입니다. 미겔 님이 제국의 영광에 한 발 더 내딛도록 도우라는 황실의 전언이 있었지요.”
두우우웅.
일정한 속도로 상승하는 판상은 쿠쿵,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나가시죠.”
순식간에 도착한 탑 꼭대기.
안내인이 먼저 판상에서 발을 내밀었고, 루빈도 따라 내려왔다. 두 사람이 바닥에 발을 내딛자 캄캄하던 공간에 빛이 스며들었다. 곧 눈앞으로 거대한 회랑이 드러났다.
-아, 이게 얼마 만인가.
하네케의 감탄. 루빈은 거대한 회랑을 쭉 둘러보았다. 회랑은 중앙을 기점으로 양쪽 어느 방향으로도 관람이 가능한 구조였다.
“빛과 반역의 탑 전시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곳은 제국의 빛과 그림자가 기록된 곳. 제국의 모든 역사가 담긴 장소입니다.”
안내인은 회랑의 좌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빛과 반역의 탑은 서로 연결된 형태로 건축되었습니다. 왼쪽이 ‘빛의 탑’, 오른쪽이 ‘반역의 탑’이라 불리죠. 먼저 둘러보실 이곳은 빛의 탑입니다. 관람은 여기부터 하도록 하죠.”
빛의 탑의 회랑은 넓고 커다랬다. 그리고 그런 회랑의 벽을 빼곡하게 채운 건 거대한 그림들이었다.
제국의 700년 역사, 그리고 역사 속 영웅들의 모습이 전부 기록된 그림들.
“제국엔 무수히 많은 영웅이 있었습니다. 천천히 따라오시면 차례차례 설명해 드리죠. 자, 첫 번째 그림입니다. 이 사람은 초대 황제의…….”
루빈은 안내인을 따라 움직이며 흥미로운 척 그림들을 감상했다.
반면 하네케는 보는 모든 것들을 기억하려는 듯, 그림 하나하나를 열성적으로 감상했다.
그의 감정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고,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여기 빛의 탑에 대장군의 그림이 있을 것 같습니까?’
루빈의 물음에, 하네케는 신중히 답했다.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군. 하지만 없더라도 난 이해하네. 나는 군인이고 그는 황제니까. 그가 바라보는 시선이 나와 같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네. 그래도 난 최대한 충성하려고 노력했네. 그것만은 그도 분명 알고 있을 게야.
‘그래도 당신을 죽였잖습니까.’
-날 죽여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겠지. 무엇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그의 결정을 존중하네.
‘진심이십니까?’
-물론이지. 황제는 제국의 모든 것일세. 그리고 난 그런 황제와 제국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어. 텔마흐는 충신을 대우할 줄 아는 사내야. 내가 보증하지.
우직한 대답. 대장군의 굳은 믿음이 느껴졌다. 이번엔 하네케가 물었다.
-루빈, 자네는 회귀자이니 답을 알고 있지 않은가? 내 이름이 빛의 탑에 기록되었는지 말일세.
당연히 알고 있다. 그걸 하네케에게 보여주기 위해 우승 보상으로 ‘빛과 반역의 탑’ 견학을 요청했던 거니까.
하지만 루빈은 대답을 미루었다.
“이번에 소개할 사람은…….”
제국의 역사를 따라 시대순으로 쭉 이어지던 안내인의 설명이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랐다.
빛의 탑 가장 깊숙한 지점이었고, 바로 옆으로는 반역의 탑으로 이어진 통로가 있는 곳이었다.
조명에 비친 마지막 그림을 바라보는 순간, 루빈의 몸을 뒤흔드는 파동이 느껴졌다. 자신의 죽음을 마주한 하네케의 반응이었다,
“여기, 침실 한가운데 가지런히 누워 있는 사람은, 바로 전대 대장군 하네케 브리온입니다.”
그림 속 하네케 브리온은, 순백색의 예복을 입고 커다란 침대에 홀로 누워 있었다.
세이렌과의 사투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로 인한 온몸의 상처 또한.
그런 대장군의 가슴팍에는 그가 애용하던 장검과 함께, 그의 사인(死因)을 알리는 문구가 조그맣게 쓰여 있었다.
-자살.
그게 끝이었다.
-역시 자살로 꾸며진 건가. 그럴 거라 예상은 했었네.
의외로 하네케는 담담했다. 암살검가의 임무였으니, 죽음의 원인이 사실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 건 당연했다.
황제는 암살검가를 통해 제국의 영웅을 만들고, 반역자를 정한다.
영웅들의 죽음은 대개 ‘병사’나 ‘임무 중 순직’으로 꾸며지면서 숭고함이 강조된다. 반면, 반역자들의 죽음은 대체로 교훈적이었다.
제국의 영웅에 의해 목이 베이거나.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 충신들에 의해 밀고당해 처형되거나.
전부 그런 식이었다.
“하네케의 혁혁한 공은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도 손에 꼽힐 정도였습니다. 수많은 군인을 배출한 브리온 가문 역사에서도 가장 걸출했던 사내였죠. 제국의 영광을 위한 그의 눈부신 충절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안내인은 루빈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며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반역의 탑’으로 연결된 통로였다.
안내인은 앞장서 걸으면서 하네케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보셨다시피, 대장군 하네케 브리온은 자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인생 대부분을 영웅으로 칭송받던 것에 비하면 아쉬운 결말입니다만, 그럼에도 그는 빛의 탑에 등재될 만했습니다.”
아쉬운 결말이었지만, 빛의 탑에 등재될 만했다.
이해하기 힘든 표현이었다. 방금까진 분명, 제국 역사를 통틀어도 손에 꼽힐 만한 유공자라 하지 않았던가.
하네케 역시 의심을 감추지 않았다.
-무슨 말이지? 등재될 만하다니?
그때, 앞서 걷던 안내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대장군 하네케는 폐하에 대한 충성을 마지막 순간까지 잃지 않은 자였습니다. 자, 이걸 보시지요.”
거대한 회랑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두운 그늘에 감추어져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아, 그 전에 먼저 설명드려야겠군요.”
안내인이 친절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이곳부터는 반역의 탑입니다. 지금부터 보여 드릴 그림들은, 반역자들의 최후를 기록한 것들이지요.”
안내자가 가볍게 손뼉을 치자, 회랑 전체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빛의 탑만큼이나 많은 수의 그림들.
안내인과 루빈은 첫 번째 그림 앞에 섰다. 시간순이었던 빛의 탑과는 달리, 가장 최근에 처형된 반역자의 그림부터 나열되어 있었다.
“첫 번째 반역자입니다. 가장 최근에 죽은 자죠. 설명드리기 전에, 그가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지를 보시면 좋겠군요. 바로 이 그림입니다.”
액자 속에는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시장 한가운데에서 뛰놀고 있는 건 두 마리의 들개.
그중 한 녀석의 아가리에는 인간의 잘린 머리통이 물려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물고 다녔는지, 온통 흙투성이에다가 잘린 목의 단면이 너덜너덜해진 모습이었다.
“반역자들의 그림은, 영웅들의 그림보다 훨씬 섬세하게 그려집니다. 제국에게 반기를 들면 어떻게 되는지, 그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라는 경고의 의미이지요. 이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반역자의 얼굴이 아주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자, 다시 그림을 보시죠.”
얼굴이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았다.
루빈은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러자 들개의 아가리에서 흘러내리는 침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섬세하게 묘사된 얼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 들개들이 물고 다니는 머리의 주인은 바로…….”
안내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더러운 이름을 입에 담기조차 싫다는 듯이.
“펠키온 브리온입니다. 방금 보셨던 제국의 영웅, 하네케 브리온의 손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