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빛과 반역의 탑 (4)
머리가 잘린 채 들개들의 놀잇감으로 던져지는 것. 반역자의 마지막 모습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황실의 궁중 화가들은 처단된 반역자의 머리에 갓 구운 돼지기름을 묻히고, 흙바닥에 굴린다.
그러면 개들은 혀를 빼물며 미친 듯이 달려들고, 화가의 손에 의해 그 순간이 그림으로 남는 것이다.
“미겔 님, 괜찮으십니까?”
그림을 보던 루빈이 잠시 무릎을 굽히며 바닥을 짚었다.
휘청대며 쓰러지는 그 모습에 안내인은 잔혹한 그림을 보고 놀란 거라고 짐작했다.
‘반역의 탑’에 새겨진 그림들을 보고 놀라 주저앉는 경우는 실제로 드물지 않았다.
바닥에 나뒹구는 잘린 머리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니 그럴 만했다. 아무래도 세상의 쓴맛을 아직 맛보지 못한 어린 자제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광경일 테고, 심지어 실어증에 실성까지 했다는 꼬마라면 더욱더 그럴 터였다.
그러나 안내인의 짐작과 달리, 지금 루빈은 그림의 잔혹함 때문에 주저앉은 게 아니었다.
루빈의 내면세계에서부터 울려오는 커다란 파동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
파동은 루빈의 신체까지 뒤흔들 지경이었다.
반역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 파동. 마치 가슴팍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루빈을 괴롭히고 있었다.
-여기 온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나한테 이걸 보여주려고!
하네케의 절규가 내면 안에 울려 퍼진다.
루빈은 그와 멀찍이 떨어져 분노하는 대장군을 지켜보았다. 지금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모든 걸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마침 안내인도 루빈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흠. 미겔 님, 괜찮아질 때까지 잠시 관람을 쉬도록 하겠습니다.”
안내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루빈은 바닥에 자리 잡고 앉아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면서 대장군의 반응에 집중했다.
-흐읍… 흐읍.
피가 바싹 마르는 것 같다는 표현. 그 말처럼 하네케는 분노가 극에 다다라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 따위 가볍게 받아들였던 그였다. 그러나 아무리 초연한 대장군일지라도 손자의 죽음마저 쉬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손자의 탄생, 자신에게 직접 브리온 검법을 전수받던 꼬마의 모습, 제국군 장교로 임관하던 앳된 청년의 모습…….
눈앞으로 스치듯 지나가는 손자의 모습이 하네케의 정신을 더 아득하게 했다.
황제의 마음이 그 정도였던가. 오랜 충신이 자랑스럽게 지켜온 브리온 검법을, 애정을 숨기지 않았던 손자를 단숨에 끊어낼 정도였던가.
무엇보다.
하네케를 분노에 눈이 멀게 한 건, 손자 펠키온 브리온의 죽음을 설명하는 글이었다.
-펠키온 브리온은 제국 대장군이자 브리온 검법의 대가 하네케의 손자였다. 펠키온은 반역 무리에게 동조하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알아낸 하네케가 직접 손자의 머리를 참수하였다. 이후 하네케는 황제 폐하께 속죄하기 위해 자결하였고, 폐하는 그 마음을 알아주었다.
-…….
하네케는 루빈이 건넬 때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다했던 목검을, 오랜만에 쥐어보았다. 하지만 휘두르고 찌를 상대는 지금 이 순간, 그의 눈앞에 없었다.
목검을 쥔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하네케는 힘을 실어 그것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투우웅.
-내가 직접 손자의 머리를 잘라냈다는 거짓말 덕분에 나는 빛의 탑에, 저 녀석은 반역의 탑에 새겨졌다. 텔마흐… 넌 이 더러운 거짓말로 브리온의 명예마저 짓밟는구나.
그는 고개를 돌려 루빈을 바라보았다.
-루빈.
지금껏 하네케는 황제를 너무 온건한 방식으로 생각해 왔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도 평생을 바친 충성심을 간직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황제에게 자신은, 그저 영원한 권력을 위한 소모품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사실을 안 이상, 그는 이전의 하네케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됐다.
-루빈, 자네 덕분에 텔마흐에게 가졌던 마지막 믿음까지 완전히 깨져 버렸네. 완전히.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게 진실이니까요.’
-진실. 그래, 어쩌면 몰라도 좋았을 진실이네만, 어쨌든. 자네 덕에 이렇게 진실을 목도하게 됐네. 아무래도 자넨 나에게 열의를 원했던 거겠지? 브리온 검법의 모든 걸 전수하는 그 열의 말이야.
‘열의라기보단 복수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지닌 것과 똑같은 무게의 복수심이요.’
-복수심이라.
‘황제에게 복수심을 품은 사람이 하네케 당신만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죠. 전 황제를 죽일 겁니다.’
하네케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얼굴. 마치 이 전쟁의 승리 확률을 가늠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 복수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걸 동원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거 아시잖아요.’
-그건 명백하지. 지금 자네의 경지로는 황제의 발뒤꿈치도 구경하기 힘들 걸세.
루빈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하네케와 눈을 마주쳤다.
하네케의 지금 저 눈빛.
루빈이 보고 싶었던 눈빛이었다. 이곳 ‘빛과 반역의 탑’으로 와야만 볼 수 있었을 눈빛 말이다.
-루빈, 탑의 난간으로 걸어가 주겠나?
하네케의 요청에, 루빈은 잠자코 따랐다. ‘반역의 탑’ 한쪽에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두 개의 탑 가운데 있는 난간으로 걸어갔다.
난간에 팔을 올려두자, 높은 지대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느껴졌다.
휘이이이이잉.
-벌써 날이 저물었군.
캄캄한 초저녁. 지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내려앉은 짙은 어둠 때문에 탑 꼭대기에 올라 있어도 대지를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 어둠 속에서, 혼자 빛을 발하는 불야성이 보였다. 앞을 가로막은 험준한 산맥들 사이에서도 불빛을 감추지 않는 거대한 도시가.
제국의 수도이자, 텔마흐의 황궁이 있는 그곳.
‘필리아르크.’
루빈이 중얼거림에 하네케가 거들었다.
-그래, 필리아르크. 저기에 황제가 있지. 게다가 필리아르크는 두 눈으로도 보일 만큼 가깝다네.
루빈은 잠자코 대장군의 말을 들었다.
-하루도 안 걸려 맞닿을 거리. 지금 당장 말을 달리면 날이 밝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걸세. 자네의 움직임이라면, 그보다 더 빨리 다다를 수 있겠지.
하지만.
-저길 가기 위해선 수많은 군단과 관문을 뚫어야 하네. 만약 지난 9년 동안 부대의 배치가 달라지지 않았다면, 몸집이 거대해지는 거혈족 부대와, 맹수와 조응하는 수혈족의 전사들이 선두에서 자네를 막아 세울 걸세.
출혈 없이 제국의 특수여단들을 지나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어찌어찌하여 성벽 안으로 잠입한다고 할지라도 황궁의 근위대가 암살자의 틈입을 허용할 리 없었다.
수많은 검술명가의 가주들이 순환하며 황궁의 근위대를 이끌고, 내로라하는 자제들은 근위대의 일원으로 복무한다.
황제를 죽이려면, 혈족에게 검을 들이밀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 텔마흐에게 죽고 싶은 건 아니겠지?
루빈은 자신의 죽음을 떠올렸다.
생명과 희망. 그 모든 게 스러졌던, 로이넨 저택에서 맞이한 죽음을.
황금가면을 쓴 황제가 다가와 죽어가는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 치욕스러운 순간이 눈앞에 되살아났다.
그때, 다시 하네케의 말이 루빈을 붙들었다.
-나는 이미 죽은 몸. 두 번째 죽음이 두려울 리 없다네. 하지만 자넨 다르지.
회귀, 다시 찾아온 기회.
-어떤 축복이 있었는지 모르겠네만, 자넨 두 번째 삶을 얻었어. 그런데 그 삶을, 오롯이 황제를 죽이는 데 쓸 수 있겠나? 자살에 가까운 일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
후회? 루빈이 회귀한 인생을 두고 후회할 일이 있다면, 그건 하나밖에 없었다. 황제의 배신으로, 또다시 혈족과 가문을 잃는 것뿐.
저벅저벅.
하네케가 달라진 면모로 루빈의 맞은편에 섰다. 하네케의 손에는 조금 전 내리꽂았던 목검이 다시 들려 있었다.
하네케는 그걸 똑바로 들어 루빈을 겨냥했다.
목검은 흔들리지 않았고, 루빈의 표정 또한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대장군, 아니 하네케 브리온. 다시 죽더라도, 황제를 마주 보며 죽게 해주십시오.’
쓰러지더라도 황제의 발등에 검을 꽂아 넣을 테니.
루빈의 의지를 확인한 하네케는 목검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휘저었다. 그 칼질을 통해 그가 품었던 모든 상처와 미련, 슬픔이 떨쳐 내려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루빈과 똑같은 무게의 분노와 복수심이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오늘부터 바빠질 걸세. 이제껏 미뤄왔던 수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거든.
* * *
루빈 일행은 날이 밝기도 전에 미르베르크 평원을 떠났다.
탑의 안내인은 날이 밝을 때까지 탑에 있어도 좋다고 제안했지만, 루빈이나 하네케나 탑에 계속 남아있을 필요가 없기에 단호히 거절했다.
그렇게 어둠 속을 달린 지 세 시간째.
예상치 못한 사고가 일어났다. 등불을 밝히며 조심스럽게 나아가던 마차의 바퀴가, 무슨 이유엔가 빠져 버린 것이다.
콰콰콰캉.
마차가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기울어지며 바닥을 긁었다. 빠른 속도가 아니었기에 마차가 전복되거나 파손되지는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마부가 말을 진정시키는 사이, 두 호위가신이 말을 몰며 다가왔다.
잠시 후, 반응이 없던 마차 문이 열리며 루빈이 나왔다. 루빈은 괜찮다는 의미로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그러곤 등불을 들고 마차의 바퀴가 떨어져 나간 부분을 살폈다.
“이상하군요. 분명 출발 전에 마차 상태를 확인했는데.”
이건 마차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등불을 비춰보자 마차 몸체와 바퀴의 연결 부분이 인위적으로 잘려 나간 흔적이 있었다.
“도련님, 아무래도 근처 위장별채에 도움을 청하는 게 좋겠습니다.”
호위가신들의 로이네크로우를 보낸다면, 새벽 사이 근처 위장별채의 암살자가 도우러 올 것이다.
그러나 루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구조 요청은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상황이…….”
호위가신이 말끝을 흐렸다.
호위가신이 말하는 ‘상황’이 무언지는 루빈도 잘 알았다. 얼마 전 매피스로부터 전해 들었던 소식, 바로 ‘척살조가 노리는 표적’이 이 근방에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척살조의 위용이야 암살검가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문제는 그들이 쫓는 표적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척살조의 표적은 일반적으로, 암살검가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다. 그런 자와 우연히라도 마주한다면, 그건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더구나 마차의 바퀴가 의도적으로 분리됐다는 건, 누군가가 루빈 일행을 노리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했다.
-야영.
“예?”
루빈이 나뭇가지로 바닥에 쓴 글자를 보고 호위가신들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들도 매피스와 겨루었던 루빈의 놀라운 능력을 기억하고 있었다. 3성 경지의 암연에다가 능숙한 암연 운용 솜씨. 탁월한 검술까지.
하지만 야영은 또 다른 문제였다. 척살조나 표적 문제와는 별개로, 위험 가능성이 더 늘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루빈의 표정은 단호했다.
“예, 알겠습니다.”
호위가신들이 이윽고 명령에 따랐다.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는 이 자리를 뜨는 게 더 위험하다는 게 루빈의 판단이었다. 단순한 사고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을 확률이 더 컸다.
-불길한 예감이 드는구먼.
하네케의 중얼거림을 애써 무시한 루빈은, 야영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암연을 증폭시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
호위가신들도, 하네케도, 루빈도,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존재가 암연에 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