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문제적 암살자 (3)
티나 키루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딸려온 기억 속에는 후회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있었다. 지난날의 결정을 후회하는 세이렌의 모습이.
멸문의 날.
황제가 이끄는 토벌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몇 번인가 막아냈을 때. 황제와 암살검가의 전쟁은 불안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래 봤자 단 몇 시간의 휴식이었지만.
세이렌과 루빈이 보낸 암살자들은 이미 모조리 죽었다. 황제의 공격을 정면으로 막아내는 수밖에 없는 상황.
장년의 루빈과 노년에 접어든 세이렌은 어스름홀에 앉아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
떨리는 팔을 내려다보는 루빈.
이미 지쳐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차올랐다. 힘겹게 암연을 응집시키면, 곧바로 흩어질 정도였다.
그러다가 침묵을 끝내는 세이렌의 한마디가 어스름홀 안을 울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생전에 했던 잘못된 결정들이 떠오르는구나.”
그 말에 루빈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생전이라니요. 저흰 아직 안 죽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절망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루빈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세이렌을 쳐다보았다.
불안과 분노.
루빈이 그랬던 것처럼, 세이렌의 눈동자 속엔 미처 감추지 못한 그런 감정들로 가득했다.
“티나 키루하. 녀석을 죽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세이렌은 잠시 눈을 감았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티나, 임무 중에 만난 꼬마였다. 귀한 능력을 지닌 여자아이. 내 암살 표적의 장난감이었지.”
세이렌은 말을 이었다.
“표적을 죽이고 복귀하려는데, 우리 속에 갇혀 있는 티나를 발견했다. 그냥 지나치거나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연약하긴 해도 분명 ‘특별한 아이’였으니까.”
세이렌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한동안 말을 멈추었다.
“그래서 데려왔다. 나는 그 아이를 암살자로 키워낼 생각이었어. 그 아이가 가진 능력…. 그건 우리와는 다른 능력이었지.”
“…….”
“하지만 그 능력에 눈이 멀어, 그 아이의 핏줄을 간과했던 것 같구나. 내가 기대한 만큼 티나는 냉혹해질 수 없는 아이였어. 그게 그 부족의 숙명이었으니까.”
핏줄? 부족? 숙명?
그땐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어머니의 나직한 한마디.
“그 숙명이 열쇠였을 줄은.”
그우우우우우!
마침 황제가 이끄는 군단의 뿔나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세이렌은 감았던 눈을 떴고, 루빈 또한 내려놓았던 검을 다시 쥐었다.
황제의 침공이 재개되었다는 뜻이었다.
* * *
‘그러니까 이자가 바로 그 티나 키루하. 어머니가 후회하던 그 환혈족 암살자구나.’
이제야 완성되는 퍼즐.
환혈족은 생명체라면 그게 무엇이든, 적어도 외형만큼은 완벽하게 따라 변신할 수 있었다.
잠들 때조차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잠든다고 알려진 게 바로 환혈족이다. 이들의 변신 특성은 암살자로서는 극강의 무기인 셈이었다.
‘티나가 살아 있었다면, 그날 황제를 죽일 수 있었을까.’
어머니는 분명 그녀를 열쇠라고 표현했다. 어쩌면 방법을 알고 계셨을지도 모르지.
그제야 과거, 티나를 끊어낸 것에 대한 어머니의 후회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암살자로 성장해야만 가능한 일.’
평화주의, 생명주의, 인도주의.
환혈족의 이러한 가치관은 암살검가와 함께 놓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칙명부가 표적을 지정하면 그들을 죽이는 것.
표적을 제거하면서 어떤 가치 판단도 세우지 않는 것이 모든 암살자의 숙명이었으니.
그러나 환혈족은 태생적으로 살생은커녕 싸움조차 싫어하는 부족이었다.
‘남을 해하느니 자결을 하고 말겠지.’
고대전쟁사를 연구한 병법서에 따르면, 실제로 전쟁터에 끌려 나간 환혈족이 집단 자살을 했다는 사례가 있을 정도였다.
‘어째서 티나를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알겠군.’
처음엔 암살자로 키워보겠다는 세이렌의 요청으로 목숨을 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첫 임무 때 본성이 드러났겠지.
남을 죽이지 못한다는 게 밝혀진 뒤론, 더 이상 살려둘 이유가 없었을 거다. 황제의 압력을 견디기란, 가주 세이렌 로이넨조차 어려운 일일 테니까.
‘그래서 결국 척살조가 나선 거였나.’
그런 생각을 하며, 루빈은 눈앞의 티나에게 집중했다.
“티나 키루하.”
지금껏 그녀가 어떤 결정을 했고, 어떻게 행동해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과거는 과거일 뿐.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티나의 이름을 듣는 그 순간부터, 루빈은 전혀 다른 각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살려야 한다.’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이 환혈족 암살자를 어떻게 끝낼지만 고민했다.
밖에서 자신들이 속고 있다는 걸 까맣게 모르는 척살조를 이용할 것인지, 지금쯤 바쁘게 뒤를 쫓고 있을 그로칼을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루빈 본인이 나서야 할지를.
‘문제는 어떻게 살리느냐는 건데.’
그때.
비르코와 샤르코가 천막을 들추고 복면의 얼굴을 내밀었다.
“조장, 이제 곧 움직여야겠는데. 이러다가 티나의 흔적을 완전히 놓치고 말겠어.”
놀란 티나가 입을 다물었다. 불안한 눈동자가 루빈을 두고 맴돌았다. 이 자리에서 루빈이 사실을 밝히는 순간, 티나는 도망갈 기회마저 잃고 만다.
하지만 루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는데. 조금만 기다려 주겠어?”
“…그러죠.”
두 척살조원이 물러나자, 티나가 검을 겨누며 사납게 물었다.
“왜 저들에게 말하지 않은 거지? 후회 안 하겠어? 지금 당장 널 죽일 수도 있다고.”
“날 죽일 거였다면 진작에 죽였겠지. 그리고…….”
루빈은 천천히 다가갔다. 자신을 겨눈 티나의 검이 목젖에 닿을 때까지. 그렇게 루빈은 아무런 방해 없이 검을 빼앗아 바닥으로 내던졌다.
“환혈족이 사람 죽였다는 얘긴 한 번도 못 들어봤거든.”
어처구니가 없어 그저 웃어버리는 티나. 루빈은 쐐기를 박았다.
“넌 날 죽일 수 없어. 이 상태에선 무사히 도망칠 수도 없고. 이제 어쩔 거야?”
루빈은 티나가 어떻게 죽는지, 그 결말을 알고 있다.
티나에게 제압당해 변신을 허용한 그로칼은 티나보다 약해서 그랬던 게 아니었다. 단지 방심했을 뿐. 뒤늦게 깨어난 척살조장이 결국 티나를 찾아내는 게 원래의 이야기다.
세이렌으로부터 죽여도 좋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녀를 꿰뚫는 그로칼의 일격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게 티나의 최후였다.
루빈은 티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환혈족은 일정 시간마다 다른 생명체로 변신해야만 하지. 지금 네가 변신한 지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안 남은 거 같은데?”
“협박하는 거냐? 내가 못 도망칠 것 같아?”
“뭐, 다시 다른 뭔가로 변신할 순 있겠지. 하지만 다른 생명체로 변신할 때 네가 흘릴 암연, 바깥에 있는 척살조가 못 맡을 것 같아?”
하지만 그런 루빈을 비웃는 티나.
“책벌레 도련님께서 이렇게 이론에만 빠삭해서야 세이렌이 좋아할지 모르겠네. 두고 보면 알겠지.”
티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그대로 다른 생명체로 변하여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티나, 신중하게 생각해. 암연을 지닌 한 척살조를 따돌리지 못한다는 거, 너도 알잖아.”
“…….”
“날 따라. 이대로 여길 나가면… 넌 죽게 될 거야.”
부정하고 싶었지만 루빈의 말이 맞았다. 티나는 울분을 감추는 듯 잠시 몸을 떨었다.
지난 2주간의 도주. 끊임없이 변신을 이어나가며 지속해 온 필사의 도주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티나를 가장 괴롭혔던 건, 도주하는 내내 환혈족으로서 도망만 다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변신이 능숙하지 않던 어린아이. 숱한 밤을 두려움 속에서 보냈던 숲과 광야. 끝내 인간 노예상에게 붙잡혀 귀족의 집안으로 팔려가기까지의 기억들.
그러던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자신을 구출해 준 한 여인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줄 알았던 주인과 귀족들. 그들의 목숨을 순식간에 끊어버린 그 여인 앞에서, 티나는 목놓아 울었었다. 살려달라고. 거두어달라고.
그런데 그랬던 여인이 이제 자신을 쫓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리기 위해, 전력을 다해서.
“세이렌이 나를 죽이기로 결정했는데, 어떻게 살아남는다는 거지? 네가 가주의 명령조차 뒤엎을 만큼 대단한 아들인가?”
그 말에 루빈은 티나의 검을 다시 주워 들었다. 그러곤 티나에게 꼭 쥐여준다.
“그 물음, 날 따르겠단 뜻으로 받아들일게.”
* * *
타닥. 타다닷. 타닥.
숲속을 질주하는 회색의 잔영. 남자가 지나칠 때마다 바람이 흔적처럼 남았다.
‘어디까지 간 거냐.’
척살조는 이동할 때 자신들만 알아볼 수 있는 일정한 표식을 남긴다. 수색과 추적을 용이하게 위해서였다.
그 표식만 알아볼 수 있다면, 셋이 흩어진 상황에서도 효과적으로 표적을 쫓을 수 있었다.
지금, 그로칼 랭은 비르코와 샤르코가 남긴 표식을 지도 삼아 동료들 쪽으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고작 그딴 함정에 당하다니.’
낭패였다. 티나가 쳐놓은 함정은 대단한 수준이 아니었다. 암살검가 가신이라면 처음에 배우는 기초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로칼이 당한 건 바로 그 단순함 때문이었다. 척살조한테 쫓기면서 그따위 일차원적인 함정을 사용할 줄이야.
그로칼은 함정에 갇힌 자신을 내려다보던 티나의 얼굴이 떠올라 이를 갈았다.
‘감히 나로 변신해 척살조장 행세를 해?’
함정에 붙들린 사이, 티나가 어떤 일을 벌였을지 짐작이 갔다. 그로칼인 척하며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 추적을 어렵게 하고 있겠지.
‘교활한 년!’
애초부터 목숨을 끊어낼 작정이긴 했지만, 이젠 남아 있었을지도 모르는 최소한의 연민마저 모두 말라 버렸다.
‘눈앞에 보이는 순간 그대로 심장을 관통해 주마!’
그러나 정작 눈앞으로 티나가 나타났을 때, 그로칼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뭣들 하는 거야?”
그로칼이 도착했을 때, 언덕 주변으로 다섯 명의 암살자가 무언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이!”
다가오는 그로칼을 발견한 비르코가 소리쳤다. 당연히 살아 돌아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로칼! 너 진짜 그로칼 맞아? 어디 있다가 지금 온 거야?”
“입 닥쳐, 비르코. 그년은 어딨어?”
그로칼 랭은 얼굴들부터 확인했다.
모여 있는 다섯 명의 암살자 중 둘은 비르코와 샤르코. 나머지 셋은 본가의 호위가신들이었다.
“어째서 본가의 가신들이? 아, 제기랄!”
그로칼은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지켜보는 사람들 한가운데,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암살자 둘.
열 살쯤 되는 체구.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
둘은 완벽하게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게 척살조와 가신들이 두 사람의 싸움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로칼. 그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누가 루빈 도련님인지, 누가 티나인지…….”
“잘못 끼어들었다간 도련님을 공격할 수도 있다고. 젠장할 년!”
그로칼은 동료들의 말을 무시하고 검을 빼 들었다. 그러곤 윽박질렀다.
“아니, 이 멍청이들아, 방법이 있잖…….”
막 뛰쳐나가려는 그로칼을 가로막은 건 루빈의 호위가신들이었다.
“척살조장! 당신의 위험한 도박에 도련님을 희생시킬 작정인가?”
그로칼은 호위가신을 밀쳐냈다.
“그러다 티나 그년한테 도련님이 당하면? 차라리 그것보다는 나한테 상처 하나 얻는 게 나을 텐데?”
“상처 하나?”
대답 대신 그로칼은 두 명의 루빈 틈으로 뛰어들었다. 갑작스러운 난입에 당황하는 둘.
‘젠장, 진짜 그로칼이잖아.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이제 어쩔 거야?’
루빈과 티나는 불안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비등비등한 싸움을 보여주다가 루빈이 티나를 ‘아홉 살 로이넨 혈통에 걸맞은 수준’으로, 거기에 ‘약간의 운이 더해지는 상황’으로 제압하는 게 두 사람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로칼이 끼어들면서, 이 연극의 결말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망할 년, 내가 널 못 찾을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