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검은 몽환숲 (3)
가주들이 연회장으로 들어오기 전.
참가자들은 아직까지는 여유를 부리는 중이었다. 식탁 위에 놓인 과자들을 집어 먹으며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루빈은 그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레인크로키, 칼크리드, 크리거. 이 세 가문은 1차 시험에서 유령쥐한테 당했었지. 그렇다면 이번에도 크게 걱정할 건 아닌데… 그래도 블라네 크리거는 좀 주의해야겠군.’
회귀 전과 상황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루빈이 알고 있는 블라네는 원거리 암살의 최강자였다.
루빈이 기억하는 그 모습에 얼마나 가까워질지는 알 수 없어도, 그 잠재력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다음으로 루빈의 눈길이 멈춘 곳은 유난히 유쾌한 두 소년이었다.
‘본도그 가문과 스토네 가문. 1차 선택에선 서로 합세했었어. 이번에도 저 둘은 동맹 관계일 거야.’
근거지가 가까워 사이가 좋은 본도그 가문과 스토네 가문. 마지막에 판가름을 할지라도, 그 전까지는 서로를 돕는 쪽으로 행동할 것이다.
게다가.
대화를 나누던 본도그와 스토네 참가자의 눈길이 쿤에게로 향했다.
결코 좋은 시선이 아니었다.
“너희들 지금 나 노려보는 거냐? 미쳤어?”
쿤이 눈을 부라렸다.
지난 시험에서 본도그와 스토네는 쿤에게 탈락당했다. 쿤은 탈락이 확정적이었을 때조차 자비롭게 행동하지 않았다. 스토네의 팔을 짓밟으며 모욕을 주었을 뿐.
“저 둘은 너한테 복수하고 싶은 것 같은데.”
“그래 봤자 약해 빠진 새끼들이지. 그때 더 밟아놨어야 하는 건데!”
그런 쿤을 향해 이어지는 하밀의 날카로운 한마디.
“네가 루빈 도련님한테 복수하고 싶어 하는 거랑 똑같네.”
“뭐?”
“그렇잖아? 도련님한테 처참하게 박살 나고 나서부터 이를 갈고 있으니까. 네 말대로면 너도 약해 빠진 새끼였던 거겠지.”
그 한마디는 쿤의 자제력을 잃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쿤. 하밀에게 막 달려들려 하는데, 루빈이 끼어들며 막아섰다.
“어차피 시험 시작까지 얼마 안 남았어. 미치광이 똥개처럼 날뛰고 싶으면 그때 해도 충분해.”
그러면서 루빈은 다시 강조했다.
“바깥에 가주님들이 계셔.”
“…쳇.”
쿤은 거친 동작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가주들이 보는 앞에서 소란을 일으킬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루빈은 하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밀, 너도 쿤을 도발하지 않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런데 제가 멈춘다고 쿤이 예의를 갖추지는 않을 거예요. 도련님도 아시죠?”
하밀의 말이 맞았다. 쿤의 무례함은 계속 이어졌다. 식탁에 놓인 과자를 우물우물 씹어대던 쿤은 뭔가가 생각난 것처럼 굴었다.
“루빈, 얼른 과자 먹지 그러냐. 왜 안 먹는 거야? 내가 알기론 고귀한 피를 지닌 로이넨 가문에서는 출가 전까지 이런 거 안 준다며?”
“도련님, 제 말이 맞죠? 쿤은 어쩔 수 없이 쿤인 거예요.”
“하밀! 언제까지 뚫린 입으로 쫑알댈 수 있나 보자!”
“너야말로.”
루빈은 쿤과 하밀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강한 것 하나 믿고 적이 늘어나는 것 따윈 신경 쓰지 않는 쿤. 그런 그에게 두려움 없이 대항하는 하밀.
아마 이번에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참가자는 이 둘이 아닐까?
지금 이 자리에서 암연을 개화한 참가자는 쿤과 하밀밖에 없었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쿤은 암연에 대한 통제력까지 어느 정도 갖췄으니, 암연은 쿤의 육체적인 강함을 더욱 키워줄 것이다. 반면 하밀은 교묘하면서 탁월하게 문제를 풀어낼 머리를 갖췄고.
‘어라, 블라네도?’
순간 또 다른 암연을 느낀 루빈은, 블라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마침 루빈 쪽을 훔쳐보고 있던 블라네와 눈을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다시 고개를 수그렸지만.
화상 때문인지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미약하게나마 블라네에게서도 암연의 흐름이 느껴지는 건 확실했다.
하밀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 역시 재능을 나타내는 증거.
‘블라네까지 가세한다면, 상황이 더 재밌어지지.’
회귀 전, 2차 선택의 우승은 쿤의 차지였고, 준우승자가 바로 블라네였다. 하밀은 블라네에게 뒤처진 3위. 루빈은 초라한 6위였다.
다른 가문들처럼 훈련을 할 수 없었던 데다가 바깥출입이 통제된 처지였기에 검은 몽환숲에서 맞이한 시험은 당시 루빈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6위 자체가 생각보다는 괜찮은 성적이었을 정도.
그러나 모든 조건이 달라진 이상, 이번에도 똑같은 결과여서는 안 된다. 루빈은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문제는 이번 시험의 예측 불가능성이야. 회귀했더라도 이점을 살릴 수가 없으니.’
그렇게 생각하며, 루빈이 눈앞에 놓여 있는 음료를 한 모금 마셨을 때.
연회장의 문이 열리면서 가주들이 나타났다. 살짝 풀어져 있던 참가자들이 일제히 몸을 꼿꼿이 세웠다.
가주들이 하나둘, 참가자들 맞은편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았다.
모든 암살검가의 정점에 있는 세이렌은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성대한 연회가 시작됐다. 음식이 들어오고, 가주들을 위한 각종 술이 테이블에 놓였다.
이번 2차 선택은 칙명부와 무관하게 열리는 시험. 그만큼 더 내밀하고 정확하며 냉혹한 측정이 참가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회가 시작되고 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가주들은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와 음주를 이어가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종마를 가려내기에 바쁘군.’
가주들 사이에서 오가는 미소와 환담. 그러나 그 안에는 날카로운 시선이 숨겨져 있었다. 2차 선택은 아이들의 자질을 파악한다는 명분 아래 일어나는 가문들의 자존심 대결이었으니.
세이렌이라는 역대 최강 가주의 위용에 짓눌려 있던 방계 가문들은 다음 세대에서는 분위기가 뒤집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는 안 되겠지만.’
그때. 이제는 적당한 시간이 됐다고 판단했는지, 연회장 중앙에 앉아 있던 세이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내를 떠돌던 소란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세이렌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새벽이 되면, 너희들은 숲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시험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나나 다른 가주들은 들어설 수 없는 영역에서, 너희의 시험이 치러질 것이다. 오직 너희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이지. 내가 너희에게 조언을 하자면, 이것뿐이다.”
그 순간 세이렌의 눈이 루빈과 마주쳤다.
“할 수 있다면, 뭐든 해라.”
즉, 금지된 게 아니라면 모든 걸 허락할 거라는 뜻. 위험을 방조하겠다는 듯한 그 말에 쿤의 얼굴에 얇은 미소가 떠올랐다.
“우승에 따른 보상은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세이렌이 자리에 앉자, 가주들 중 가장 연장자인 레인크로키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번 2차 선택의 우승자에겐, 세 가지 사항에서 우선권이 주어진다. 첫째, 우승자는 로이네크로우를 가장 먼저 고르게 될 것이다.”
암살자의 동반자, 로이네크로우. 뛰어난 로이네크로우는 전설적인 무기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가주의 로이네크로우를 곁에서 보며 자란 암살검가의 자제들이었다. 훌륭한 로이네크로우에 대한 동경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우승자는 로이넨서를 가장 먼저 선택할 수 있다.”
로이넨서, 이른바 가짜 부모.
2차 선택이 끝나면 암살검가의 자제들은 각 저택에서 나가 위장된 신분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때 그들의 부모 역할을 하는 게 바로 로이넨서였다.
로이넨서가 하인 노릇이나 하는 존재가 아님을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그들은 자제들의 엄연한 선생이자 스승이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가신이 로이넨서가 될 순 없었다. 그에 걸맞은 자격이 있어야 했다.
4성 이상의 실력을 갖춘 자들 중, 암살자의 모든 덕목에서 일정한 수준 이상을 달성한 자만이 가능했다. 암살검가 검식뿐만 아니라 연기, 은신, 잠행 등 모든 방면에서 월등해야 했다.
“이곳에 오기 전, 각 가주님들에게 누가 로이넨서의 자격을 지닌 자들인지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이미 로이넨서 후보들에 대한 정보가 전달되었다. 그것 말고도 각 가주들은 어느 가문의 어느 가신이 얼마나 뛰어난지 대략적인 정보를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마지막은, 로이넨서와 살아갈 위장별채가 있는 도시를 선택하는 것이다. 현재 너희들이 선택할 수 있는 도시들이 추려진 상태다. 어떤 도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너희들이 연기하는 삶도 달라질 거라는 걸 명심하도록.”
선택에 따라, 누군가는 제국귀족의 집사가 될 수도 있고, 괴수 서식지의 용병 역할을 맡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전쟁터의 소년병이라는 가짜 신분으로 살아갈 수도 있고.
“시험은 해가 뜨기 직전에 시작된다.”
설명을 마친 레인크로키 가주가 자리에 앉자, 참가자들의 경직된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아마 다들 시험이 어떤 방식인지 알고 있을 거야. 틀림없이 가주들이 설명해 주었을 테니까.’
루빈은 다른 참가자들을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그래 봤자 결국은 무의미한 정보겠지만.’
어떤 방식의 시험인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정보가 있다고 하더라도, 2차 선택은 사전 정보로 대비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었다.
‘회귀가 무의미한 시험. 이번엔 나도 똑같은 조건인 건가.’
대비할 수 없다는 것. 그건 이미 한 차례 시험을 치러보았던 루빈도 마찬가지.
“루빈 도련님, 이게 무슨 의민지 아시나요?”
하밀이 속삭이며 팔에 묶인 거미의 실을 보여주었다.
지금, 모든 참가자의 팔에는 초청장 거미가 방사했던 그 실이 휘감겨 있었다.
사전에 가주들에게서 2차 시험에 관한 정보를 획득한 아이들이었지만, 팔에 감긴 거미의 실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일종의 책갈피라고 설명해 주면 적당하려나. 아, 지금 설명해 봤자 이해 못 하겠군.’
루빈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밤이 지나면 싫어도 확인할 수밖에 없다.
“이제 모든 참가자들은 자리를 옮겨 대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이렌의 직속 가신 데이몬의 안내에 따라, 참가자들은 비장한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