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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검가 로이넨-35화 (35/258)

제35화. 몽환숲의 시험 (4)

“골렘을 계속 부숴봤자 이번 순서를 끝낼 수 없어. 저걸 없애야만 블라네의 두려움도 끝이 나.”

점액질로 이루어진 그것. 형언하기 애매한 그것이 바닥에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저걸 없애면 끝난다고요? 도련님, 저런 건 본 적이 없는데요.”

“당연하지. 이 세상에 없는 거니까. 블라네가 만들어낸 몽환괴수야.”

멀찍이 떨어져 있던 쿤도 루빈과 하밀 쪽으로 다가와 몽환괴수를 내려다봤다. 이전에 나타났던 괴수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냥 점액질이잖아?”

쿤이 발로 점액질의 가장자리를 밟자, 몽환괴수가 고통에 차서 소리쳤다.

“으아아악!”

인간의 목소리. 점액질 한가운데가 사람의 얼굴 형태로 조형되면서 고통에 울부짖었다.

“아, 이제 알겠군.”

“네?”

드러난 몽환괴수의 얼굴. 그 얼굴을 보니 이해가 갔다. 골렘은 단지 위장이었을 뿐, 블라네가 가진 두려움의 실체는 따로 있었다.

“이 얼굴 모르겠어? 네스 크리거야.”

“아!”

블라네 크리거의 아버지이자, 크리거 가문의 가주. 흐느적거리는 점액질 한가운데에 있는 얼굴의 주인이었다.

“쳇, 고작 자기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거였냐? 한심하긴.”

쿤이 괴수를 밟은 다리에 힘을 주며 단검을 흔들었다. 무력한 괴수에게 단검을 박아 넣으면 이번 순서는 끝난다. 골렘 때문에 애를 먹은 것에 비하면 마지막 처리가 너무 싱거웠다.

“바로 해치워 주지. 네놈 때문에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아?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고.”

골렘에게 달라붙어 쇠관을 끊어내다 보니 세 사람 모두 피부 곳곳이 벗겨진 상태였다.

당연히 그에 따른 고통도 온전한 상황. 서둘러 이번 순서를 넘겨야 상처도, 고통도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이걸 끝내는 건 우리 몫이 아니야.”

루빈이 말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어느새 언덕을 내려온 블라네가 몸을 떨며 서 있었다.

루빈의 말을 이해한 쿤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뭐?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블라네의 두려움은 블라네가 직접 처리해야 해.”

“루빈, 미쳤냐? 쟤가 지금 자기 아버지 얼굴을 찌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끝낼 수 있어. 그래야만 해, 블라네.”

“닥쳐! 저년은 아무것도 못 하고 질질 짜기만 했잖아. 지금이라고 다를 것 같아? 여기가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울기만 할 거라고.”

실제로 몽환세계의 경계선은 훌쩍 가까워져 있었다. 방금까지 서 있던 언덕도 경계선에게 잡아먹힌 상황. 단 몇 분도 남지 않았다.

“그냥 저년을 없애버리는 게 빠르다고!”

“그만둬, 쿤.”

“루빈, 네가 날 막겠다고? 하, 원하던 바야. 그냥 널 여기서 쓰러뜨려 주지.”

쿤이 방향을 틀어 루빈과 마주했다. 쥐고 있는 케르기티의 단검이 루빈을 겨냥했다. 시퍼런 칼날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살을 헤집을 것 같았다.

“도련님, 시간이 부족해요. 이대론 전부 다 탈락할 거라고요.”

말없이 지켜보던 하밀도 쿤을 거들었다.

“대체 왜 블라네를 데려가려고 하는 거죠? 이건 경쟁이잖아요? 강한 자만 통과할 수 있는 공정한 경쟁이라고요.”

경쟁. 그래, 경쟁이지.

하지만 루빈에게 경쟁이란, 이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가진다. 이깟 꼬마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한 존재와의 싸움. 그게 루빈이 해야 할 경쟁이었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이기려면,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블라네를 탈락시켜선 안 된다. 그리고 저 두려움을 다른 사람이 대신 제거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루빈은 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쿤. 물러나라. 마지막 경고야.”

“협박하는 거냐? 내가 예전이랑 똑같을 거라고 착각하나 본데.”

“정 그렇다면.”

루빈은 머뭇거리는 블라네를 쳐다봤다. 블라네가 아버지의 얼굴을 한 몽환괴수를 처리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러진 못하겠지. 회귀 전에도 블라네는 죽을 때까지 가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 결정의 끈을 루빈이 먼저 잘라내고 싶진 않았다.

그때, 루빈과 붙고 싶어 미치겠는 쿤의 살기가 루빈을 감쌌다. 더 이상 싸움을 피할 수 없다.

‘쿤의 두려움이 뭔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루빈과 쿤이 서로를 향해 공격 자세를 취하려 할 때였다.

“제가… 제가 해볼게요.”

블라네가 단검을 쥔 상태로 한 걸음 다가왔다.

됐다.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던 루빈은 공격 자세를 풀었다.

“쿤. 다음 순서에서 상대해 주지. 너도 몸 상태가 최상일 때 싸우는 게 낫잖아?”

“…운이 좋아. 아주.”

골렘을 단독으로 대치했기에 누구보다 지쳐 있던 쿤이었다. 루빈과 싸우려면 최상의 상태여야 한다는 걸 그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뭐 하고 있어? 빨리 끝내!”

루빈과 쿤, 하밀은 몽환괴수와 블라네만 놔두고 뒤로 물러났다.

으으으으억.

몽환괴수는 아픔에 괴로워했다.

두려움의 근원. 그녀의 아버지, 네스 크리거는 죽을 위기에 처한 힘없는 노인처럼 고개를 내저었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단검을 쥐고 있는 블라네의 두 손이 떨렸다. 그녀의 망설임이 길어지는 걸 바라보고 루빈이 다가왔다.

“저건 네가 가진 두려움이야.”

그러면서 루빈은 블라네의 손에 자기 손을 포개었다. 그녀가 단검을 더 꽉 쥘 수 있도록.

“너는 네 안의 두려움을 죽이는 거야.”

마지막으로 블라네와 눈을 마주쳐 주곤 루빈은 물러났다.

‘두려움을 죽인다…….’

바람이 불어왔다.

블라네는 바람이 화상 부위에 와 닿을 때마다 아픔이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지금 여기서 두려움을 죽여야만 자신이 더 강해지리라는 걸 알았다.

그어어어어…….

블라네는 더욱 처절하게 울부짖기 시작한 네스 크리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단검을 쥔 팔의 떨림은 네스 크리거의 얼굴로 다가갈수록 차츰 잦아들었다.

푹.

끄으아아악!

블라네의 얼굴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질 때쯤, 점액질의 네스 크리거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휙.

다시 배경이 바뀌었다. 네 사람은 어느새 검은 연못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짙은 고요. 제일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쿤이었다.

“제길, 여기도 지긋지긋하네.”

쿤은 정말 질린다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이 연못에 들어오고 나서 얼마나 뛰어다닌 거지?”

“시험이 시작된 지 몇 시간 안 됐을 거예요.”

어느새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한 블라네가 대답했다. 두려움을 이겨낸 뒤로 블라네의 분위기가 사뭇 바뀌었다. 힘이 실린 목소리에 새로운 분위기까지.

“뭐? 며칠은 된 거 같은데.”

“여긴 모든 게 허상인 몽환세계니까요.”

블라네의 그 말은 또 다른 의미로 들렸다. 두려움을 극복해 냈기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일 테다. 회귀 전에도 보기 힘들었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상처는 다 나았어.”

하밀이 자신의 몸을 둘러보며 말했다. 골렘의 달궈진 쇳덩이 몸체에 매달리느라 얻은 열기의 흔적도 말끔히 지워졌다. 지쳤던 체력도 보충되었고, 몸은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남은 건 루빈 도련님과 쿤의 두려움이네요.”

하밀은 남은 두 명의 순서를 기대하고 있었다.

크룰티 오크가 나왔던 순서에서 직접 겨뤄봤기에 막강함은 잘 알고 있었다. 반면 루빈은 어떨까. 그 경지는 어디에 다다라 있을지.

‘어쩌면 내가 쿤이랑 힘을 합쳐도 루빈 도련님을 상대하는 게 불가능할지도 몰라.’

몽환괴수들을 처리하던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자신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루빈 도련님의 두려움이라니…. 도대체 뭘까?’

그때.

검은 연못에 거대한 물체가 비쳤다. 이윽고 공중에서 거미줄을 타고 내려오는 몽환거미.

처음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시험을 이어나가던 몽환거미였지만, 이번에는 직접 나서서 뭔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 같았다.

“남은 순서는 두 개뿐인데, 네 명이나 살아남아 있다니. 이거 의외인데?”

의외라는 건, 한편으로는 못마땅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정도로 참가자가 오래 살아남는 건 시험 주최자로서는 치욕이었으니까.

게다가 몽환거미는 이기적이고 무자비한 암살자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따위 협동심이 아니라.

“로이넨가의 꼬마.”

모든 걸 지켜본 몽환거미였기에, 시험의 내용이 자신의 바람과 다르게 흘러가는 이유가 누구 때문인지 모르지 않았다.

“루빈 로이넨이라고 했나? 꼬마야. 다음번에도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몽환거미는 시계추처럼 움직이며 루빈 앞으로 위협적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다음번에는 탈락자가 생길까?”

루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짤막하게 대답할 뿐.

“필요하다면.”

그 짤막한 대답에 몽환거미가 온몸의 털을 꼿꼿하게 세우면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필요하다면? 제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네. 역시 자신감이 넘치는 꼬마야. 기분 나쁘게 말이지.”

잡담은 거기까지였다.

몽환거미가 다시 거미줄을 타고 올라갔다.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새로운 시험이 시작됐다.

휙.

* * *

암살검가 가주들이 서성이며 다음 탈락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본도그와 스토네 가문의 참가자가 탈락한 뒤로, 탈락자 없이 시간이 꽤 이어지는 중이었다.

물론 고작 몇 분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검은 연못에서의 시간은 현실보다 열 배 느리다는 걸 생각하면 의외의 흐름이었다.

즉, 탈락자 없이 몽환괴수를 처리하고 다음 순서로 나아가고 있다는 뜻.

‘루빈, 가장 어려운 방법으로 시험을 이겨내고 있는 것이더냐.’

결집하여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건, 이제까지의 시험 역사상 거의 없었던 일이었다.

다른 참가자를 제물로 바치거나 직접 처리하는 것. 그게 몽환괴수에게서 벗어나는 더 쉬운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참가자들이 동시에 성장하기 위해서는 함께,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나아가는 게 맞았다.

세이렌은 루빈이 어쩌면 그걸 의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탈락자인가.”

두꺼운 잿빛 안개를 쳐다보고 있던 세이렌이 눈에 힘을 주었다. 시야에 새로운 물체가 비쳤다.

“…….”

도착한 실타래에 단검을 꽂아 넣으려던 레인크로키 가주가 동작을 멈추었다.

그는 다가오는 세이렌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몸체가 좀 크군.”

이번엔 세이렌이 직접 나섰다. 그녀가 단검을 빼 들었다.

“뭐, 이번에도 아까처럼 두 명이 동반 탈락한 모양이지요. 남은 여자 참가자가 두 명이라 하지 않았던가…….”

크로키슨 가주가 가볍게 말했다. 이제는 쿤의 탈락 따윈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이.

지이이익.

세이렌의 단검이 실타래를 가르는 순간.

대륙에서 손꼽히는 무구이기도 한 그녀의 단검이었기에, 가주들이 일제히 눈동자를 빛내며 다가왔다.

그런 가주들이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허어.”

“이런, 의외군요.”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줄 알았건만.”

가주들은 한마디씩 하면서 크로키슨 가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순간, 크로키슨 가주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며, 실타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기엔 입도 다물지 못한 채로 기절해 있는 쿤 크로키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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