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37화 (37/258)

제37화. 몽환의 괴수 (2)

“이럴 수가…….”

“뭔가 일이 벌어진 것 같긴 한데, 도저히 모르겠어요.”

“우리가 볼 수 없었던 거야. 그만큼 빨랐다는 뜻이겠지.”

다시 돌아온 검은 연못 위.

하밀과 블라네는 조금 전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알지 못했다. 돌격하는 쿤과, 그에 대응하는 루빈의 모습만 얼핏 보았을 뿐이다.

둔중한 공기의 울림이 울리고 나선, 둘 사이에 어떤 움직임이 오갔는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암연. 그건 분명히 루빈 도련님의 암연이었어.’

순간적으로 방출되었던 거대한 암연. 그건 암살검가 가주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깊이와 밀도였다.

그런 수준의 암연 운용이 가능하다니! 자신과 같은 나이, 고작 열한 살일 뿐이잖아.

‘2년이 지났을 뿐인데… 얼마나 높은 경지에 다다른 거야?’

루빈을 두고 열등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 어느덧 새로운 순서가 시작되고 있었으니까.

‘2차 선택’의 마지막 순서.

루빈 로이넨이 가진 두려움이 펼쳐지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연합하여 함께 헤쳐 나갔을지라도, 이제부터는 그럴 수 없었다.

이젠 남은 다음 단계가 없었고, 여기에선 누구나 혼자만 살아남아 우승자가 되는 게 목적이 될 것이다.

휙.

“…….”

루빈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밀과 블라네를 상대편으로 두어야 한다는 사실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이제 그 앞으로 나타날 두려움의 정체였다.

‘내 안에 숨어 있는 두려움이라. 대체 뭘까?’

그때 루빈의 눈앞으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검게 그늘진 뒷모습.

처음엔 그 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뒷모습을 보인 채로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 발걸음 소리가 저벅저벅 울렸다.

‘몸이 움직이지 않아?’

이상한 일이었다. 저게 몽환괴수라면 달려들어 제거할 생각이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블라네와 하밀도 마찬가지. 두 사람 모두 행동이 제약된 채로 눈앞의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둥둥둥.

주변에는 미약한 소음이 감돌고 있었다. 파편처럼 쪼개져 있는 소음이어서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저 뒷모습…….’

뭔가 낯익다.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선명하지는 않다.

루빈은 회귀한 뒤 11년을 더 살았다.

본래라면 성장하는 동안 유년의 기억이 흐릿해졌겠지만, 지난 11년 동안 그는 성인의 정신을 유지해 왔다.

갓난아기로 깨어났을 때부터 기억이 줄곧 또렷했다.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 봐도 지난 기억 중에서 저런 뒷모습을 지닌 사람은 없었다.

‘내 두려움이 만든 환상인가? 아니면…….’

전생의 기억일지도.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소소소 돋아나는 느낌이었다. 등 뒤로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휙.

순식간에 무채색의 배경이 사라지더니, 새로운 배경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뒷모습을 보인 사람의 주변으로 배경이 하나씩 자리 잡았다.

벽이 생기고.

바닥이 생기고.

문과 창문이 생기고…….

비로소 암살검가의 익숙한 저택 풍경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시체들이?’

하나도 아닌, 수백 구의 시체들.

하나같이 베이고 찢긴 상처를 품은, 맹렬했던 전투의 전사자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이 입은 갑옷은 하나같이 거대한 중갑(重鉀). 암살검가는 특별한 임무가 아닌 이상, 전투 중에 중갑을 입지 않는다. 은밀하게 움직이는 암살자들에게는 거추장스럽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그랬겠지.’

그러나 루빈의 기억 속, 암살검가의 일원들도 저런 식으로 중갑을 갖춰 입었던 때가 있었다.

황제의 선전포고 이후.

암살검가는 모든 가신들과 가주들의 존폐를 걸고 전면전에 돌입했다. 처음으로 겪는 전쟁을 위해 중무장 전투복을 갖춰 입은 게 그때였다.

‘그렇다는 건, 저자가 바로……?’

루빈의 정면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뒷모습을 내보인 사람을 지나쳐 루빈에게까지 와 닿았다.

바람의 냄새가 차고 비리다. 바람은 분명 피 냄새를 실어나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암살검가 일원들의 피를.

그 냄새가 루빈의 기억을 더 선명하게 했다. 머릿속이 둔중하게 울리는가 싶더니, 주변을 맴돌던 파편적인 소음이 비로소 선명해졌다.

누군가의 단말마.

칼이 살과 뼈를 가르는 소리.

무기끼리의 격돌.

저택에 쏟아지는 포탄과 마법들.

하늘을 지배한 제국 그랑버드들의 울음소리.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러나 루빈은 버텨냈다. 정신을 놓지 않고, 눈앞의 사람을 계속 지켜봤다.

이번 시험에서 이기기 위해서? 아니, 그런 하찮은 이유로는 이 중압감을 버텨내지 못한다.

루빈은 그 너머, 까마득한 곳을 보는 중이었다. 그래야 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번 생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버릴 테니까.

“…….”

바람이 불어와 남자의 망토를 흔들었다. 망토가 펄럭이면서 남자의 은빛 갑옷을 드러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갑옷. 백룡의 비늘로 만들어진 전설의 무구. 거기엔 황제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황제는 몸을 숙였다. 누군가가 황제 아래 쓰러져 있었다. 황제의 발에 밟힌 채로, 숨이 잦아드는 남자.

“세…렌의 아…인가?”

주변의 소음 때문에 황제의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블라네나 하밀은 지금 벌어지는 이 전쟁터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 갑옷을 두른 남자가 누구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그러나 루빈은 전부 기억했다.

‘세이렌의 아들인가?’

‘크흐으윽.’

입 밖으로 피가 흘러나왔다. 너무나 많은 칼을 받아냈다. 직격으로 이어진 마법 공격도 그의 심장을 빠르게 멈춰 세우고 있었다.

“대화를 나눌 만한 상태가 아니겠지. 제 어미보다 못한 아이라 아쉽구나. 그래도 내겐 조카이기도 한데.”

황제가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황제 곁에 서 있던 호위대 하나가 황제의 검을 가져왔다.

황제의 검. 이 또한 대륙에 몇 없는 전설의 무구. 잠시, 햇빛을 받은 검이 빛을 내었다.

황제는 검의 끝을 청년 루빈에게 갖다 댔다. 그는 일부러, 아주 천천히 검을 박아 넣을 작정이었다.

회귀 전 루빈이 아주 천천히 죽음에 다다를 수 있도록.

“이제라도 도려냈으니 망정이지.”

살 속으로 파고든 검이 조금씩 박혀 들어갔다.

아주 천천히. 동시에 검의 손잡이가 루빈의 가슴팍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루빈의 등으로, 살갗을 뚫고 나온 검신이 드러난다. 들어갈 땐 새하얬던 검신이 검붉게 젖어 있다.

바로 그 순간.

햇빛이 사라졌다. 주변의 소음이 멈추었고, 배경이 다시 없어졌다. 완전한 무채색의 세계. 그 한가운데엔 황제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검을 쥔 황제가 몸을 돌린다. 몸을 돌려 마지막 남은 세 명의 참가자를 바라본다. 루빈은 힘겹게 입을 열어 그를 맞이했다.

“텔…마흐.”

황제의 시선이 정확하게 루빈에게로 향했다. 행동에 제약이 풀리면서 목소리가 나오자, 루빈은 황제의 이름을 다시 발음했다.

“텔마흐.”

황제의 얼굴은 황금빛 가면으로 완벽히 감춰져 있었다. 가면 너머로 비치는 그 눈동자를, 루빈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저벅저벅.

텔마흐가 멈추었던 발을 옮겼다.

단지 그렇게 몇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쿵.

블라네가 맥없이 쓰러졌다. 허옇게 뜬 두 눈엔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절명한 것이다.

“…블라네!”

저벅저벅.

그리고 다시 몇 걸음. 놀라 소리치던 하밀의 눈동자에서도 생명의 기운이 빠르게 사라졌다.

쿵!

이제 남은 것은 루빈 로이넨, 단 하나뿐.

새하얀 무채색의 공간에서, 루빈은 황제와 마주했다. 이렇게 독대하는 것은 벌써 두 번째.

황제가 걸어와 그 앞에 섰다. 황금빛 가면 너머로, 그의 희멀건 눈동자가 또렷이 보였다. 루빈을 비롯해 모두를 멸살한 자의 가증스러운 두 눈깔이!

‘…죽여 버린다!’

일순간 루빈은 지니고 있던 암연을 모두 개방했다. 이번 삶의 암연에, 통제할 수 없던 전생의 암연까지 더하여 전부.

둥둥둥둥.

루빈의 몸이 심하게 요동쳤다. 가슴팍이 격렬한 진동에 시달렸다.

눈앞에서 암연의 격렬한 폭풍이 일고 있음에도, 황금가면 속 텔마흐의 눈빛은 잔잔한 바다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순간 루빈은 깨달았다. 이건 몽환괴수가 아니다. 이게 몽환괴수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변형되고 왜곡되어야 한다.

하지만 눈앞에서 조롱하듯 쳐다보는 이자는… 루빈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황제 텔마흐 본연의 모습이었다.

“오랜만이군. 세이렌의 아들아.”

루빈은 분노를 억눌렀다.

무너져 내리는 암살검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머니의 죽음이, 폐허가 되어버린 저택이 떠올랐다.

격노가 끓어올랐지만 폭주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이라니? 그럴 리가. 우린 오늘 처음 만났잖아.”

회귀를 통해, 루빈 로이넨은 새롭게 탄생했으니까.

“…….”

루빈은 쥐고 있던 단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철컥, 소리가 났다.

“오랜만이란 말은 나중을 위해 아껴둬라, 텔마흐. 다음번엔 내가 널 찾아갈 테니까.”

그리고 그땐, 내 검이 너의 가슴을 뚫고 들어가리라.

갑자기 텔마흐의 망토가 펄럭였다. 어느새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는지 루빈의 등 뒤에서부터 바람이 몰아쳐 텔마흐에게 부딪쳤다.

황제는 아주 낮은 음성으로, 짤막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그의 실체는 바람에 조각조각 나더니 이윽고 재가 되어버렸다.

프스스스.

사라지는 와중에도 텔마흐의 노란 눈동자는 마지막까지 남아 실체를 유지했다. 조각조각 갈라져 재가 되기 직전까지 루빈을 노려보면서.

“하아…….”

텔마흐마저 사라지고, 이제야 압박감에서 벗어난 루빈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끝난 건가.”

배경이 다시 검은 연못으로 바뀌었다. 루빈은 두 손을 검은 연못에 담그고 천천히 흔들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두 손.

찰랑거리는 물의 촉감.

이제 더는 거미가 만든 몽환세계가 아니었다. 연못의 차갑고 스산한 느낌이 그대로 온몸에 전해졌다.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그때 검은 연못에 거대한 몸체가 어른거리는 듯싶더니 몽환거미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공중에 매달려 있지 않았다. 몽환거미는 처음으로 거미줄에서 벗어나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는 연못에 두둥실 떠서, 기괴한 눈알을 번뜩이며 루빈 쪽으로 다가왔다.

“역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전부 지켜봤겠지?”

루빈은 몽환거미에게는 자신이 두 번째 삶을 얻었단 사실을 숨길 수 없음을 알았다.

“뭐라고 해야 하지? 죽었다가 다시 삶의 기회를 얻는 거!”

“회귀했다고 말하지.”

“그래, 회귀! 회귀자라…….”

“이젠 제법 공손하게 대해주는 것 같은데?”

몽환거미의 눈이 다시 번뜩였다.

“이 대륙엔 내가 껄끄럽게 생각하는 인간이 열 명쯤 있지. 거기엔 네 어미도 포함되지만, 방금 그… 그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황제 텔마흐, 나를 죽인 자다.”

“그래, 그놈! 아무튼, 두 번 사는 꼬마야. 그가 너를 죽인 건 알겠고…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알려주지 않을래?”

“뭔데?”

“넌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을 거잖아. 그렇지?”

“그래. 어느 정도는.”

“그럼 혹시, 나도… 그놈한테 죽게 되나?”

루빈은 피식 웃어버렸다.

하긴 궁금하겠지. 몽환거미가 아무리 신에 가까운 존재라 하더라도, 미래까지 알 순 없는 법.

폐허가 된 암살검가의 본가, 로이넨 저택을 보았으니 제 운명 또한 걱정될 것이다.

루빈은 대답 대신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시험은 끝났다. 이제는 연못을 벗어나 숲을 나가야 할 때였다.

“기, 기다려! 나도 그놈한테 죽냐고!”

몽환거미는 진지했다. 털을 날카롭게 곤두세우며 루빈을 재촉했다. 하지만 루빈은 어깨를 으쓱할 뿐.

“텔마흐는 암살검가 로이넨에 관한 모든 걸 지워 버리려 했지. 다른 모든 암살검가들은 물론이고, 로이네크로우의 서식지부터 여기 검은 몽환숲까지 말이야.”

“뭐, 뭐라고…? 안 되겠어! 당장 텔마흐를 죽여야겠어!”

루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그건 불가능하기에.

“황제는 이미 네 능력을 뛰어넘었어. 협상도, 협박도 통하지 않을 거야.”

“그, 그럼 넌 뭐냐! 뭐 하는 건데, 지금!”

“복수. 내 죽음을 갚아주고, 그자가 세운 제국을 무너뜨릴 거다.”

루빈은 덧붙였다.

“그래서 지금 힘을 키우는 중이야. 회귀라는 거, 두 번은 없을 것 같거든.”

“가능하긴 한 거야? 네 계획 말이야.”

당혹감과 두려움에 물든 몽환거미의 눈알. 루빈은 그쪽으로 다가가 커다란 눈알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당연하지. 이전에는 없던 기연들, 이전에는 가보지 못한 단계, 이전에는 살아남지 못했던 동료들까지.”

이번엔 전부 다 가질 수 있으니까.

“몽환거미, 언젠가 네 도움이 필요해지면 잠시 들르도록 하지. 단, 그때까지 내가 회귀자라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내 어머니에게도. 만약 어긴다면…….”

“그러면?”

루빈은 검은 연못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연못에서 벗어나, 숲 바깥으로 나가는 길 위를 천천히 걸어 나갔다.

“넌 황제의 손에 죽게 되겠지. 그게 언제일지도 모른 채 달달 떨다가 말이야.”

“……!”

저벅저벅.

루빈의 등 뒤에선, 연못 깊숙이 몸을 담근 몽환거미가 물방울을 보글보글 튀겨냈다. 불안감을 식히려 애쓰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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