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38화 (38/258)

제38화. 몽환의 괴수 (3)

저벅저벅.

루빈은 검은 연못을 벗어나 숲을 빠져나오기 위해 걸어 나갔다. 고요한 숲속엔 단 하나의 발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아홉 명의 참가자가 걸어왔던 길, 그러나 되돌아갈 때는 루빈 혼자였다.

다른 참가자 전원을 탈락시키고 단독 우승자가 된 루빈이었지만 그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자네, 기뻐하지 않는군.

‘당연한 결과니까요.’

두 번째 삶이 아니었다면 ‘2차 선택’의 우승에 당연히 기뻐했을 테지만, 루빈은 이번 시험이 시작할 때부터 우승을 의심치 않았다.

훗날 지원군이 될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것. 자신의 당연한 우승보다는 거기에 더 집중했고, 역시 루빈의 의도대로 되었다.

-자네의 능력이야 의심치 않았네. 한데 다른 아이들도 전부 뛰어난 자질을 지녔더군. 당연히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겠지?

‘저들만이 아니에요. 제 편으로 만들어야 할 사람은 아직 많이 남았어요. 그래야 미래를 바꾸고 황제에게 복수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겠지. 그나저나, 자네의 죽음 말인데… 그걸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유감이군.

하네케는 조심스럽게 루빈의 두려움을 입에 올렸다. 대장군은 루빈의 마음이 가라앉은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황제라는 존재. 그리고 그 손에 죽었던 과거가 눈앞에서 재생되었으니 그 무력감과 분노가 어땠을지.

게다가 루빈의 두려움은 다른 참가자들과는 격이 달랐다. 그 두려움은 미래에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몽환 속에서 바라본 텔마흐는 비록 짧은 순간이긴 했지만, 내가 알고 있던 그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였네.

‘대장군이 죽고 제가 성장하는 사이에 황제는 점점 더 힘을 키워 나가고 있었어요. 암살검가와 전쟁을 치렀을 때, 그는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 있었죠.’

대장군이었던 하네케는 황제를 직접 대면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 보았던 황제는 강하기는 했어도,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황제가 조종할 수 있는 수많은 힘들. 특수여단과 마법사들, 그리고 몇몇의 고룡들. 그런 것들이 더 무서운 적이 될 거라고 생각해 왔는데.

-지금 자네의 어머니라 해도 이기지 못할 정도인가?

‘확신할 수 없어요. 어머니가 지금 당장 황제를 적으로 돌릴 리도 없고요.’

-흐음, 그런가. 왠지 무서운 말이군. 지금 이 순간에도 황제가 힘을 키워 나가고 있다니.

황제는 단지 좋은 피를 이어받은 자가 아니었다.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선대 황제, 그 뒤를 이어 텔마흐가 황제에 즉위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끊임없이 강함을 추구했고, 무자비했으며,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으니까.

‘모든 게 갖춰져야만 이길 수 있다.’

루빈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황제가 힘을 키워 나가는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성장해야 했다. 회귀 전에 도달했던 경지보다 두 배, 세 배, 그 이상으로!

-한데, 루빈. 하나 걸리는 게 있네.

‘그게 뭐죠?’

-조금 전에 봤던 몽환거미라는 신비한 존재 말이네. 자네 복수에 걸림돌이 되지 않겠나?

하네케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이해했다. 하네케가 보기에, 몽환거미는 암살검가에 복종하거나 충성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라면, 루빈이 알려준 미래를 듣고 얼마든지 그 계약을 파기할 수도 있었다.

즉, 텔마흐에게 회귀자 루빈의 존재를 누설하고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걱정할 거 없어요.’

-걱정할 게 없다고? 물론 저 몽환거미가 일반적인 괴수가 아니란 건 알겠네. 하지만 믿음직스럽지는 않지 않나.

‘믿음직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언제든 배신할 몸도 아니거든요.’

배신할 몸이 아니다?하네케의 얼굴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저 몽환거미는 참가자의 두려움을 섭취하며 연명하는 존재예요.’

-두려움이 없으면 죽는다는 뜻인가?

‘네. 게다가 그 두려움은 오직 암연을 지닌 사람들의 두려움이어야만 하죠.’

암연은 암살검가만이 지닌 고유한 능력. 암살검가가 사라진다는 것은, 몽환거미 또한 생존해 나갈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아마 지금쯤 몽환거미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겠죠. 암살검가가 황제에게 무너지지 않도록 도울 방법이 무엇일지.’

몽환거미는 수천 년의 기억을 지닌 고대생명체. 반신(反神)이라고도 불렸다.

이 고대생명체가 어떻게 암살검가와 엮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생명을 연명하는 데 암살검가와 암연은 필수적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 하네케. 이윽고 그 눈빛에 생기가 감돌며 호기심이 서렸다.

-자, 이제부터는 또 어떻게 돼가는 건가?

‘어떻게 돼가냐니요?’

-자네 내면세계에 깃들면서 워낙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하게 되니, 다음 하루하루가 궁금해진다네.

‘흠. 일단은 오러에 관한 수련을 시작해야겠죠.’

-하, 그럼 그렇지.

루빈은 쿤과의 싸움에서 발현된 오러의 느낌을 생생히 기억했다. 무기에 응집된 강렬한 기운. 묵직한 중량감의 오러의 환을 말이다.

신체 일부를 감싸거나 안개처럼 확산시킬 수 있는 다용도의 힘이 암연이라면, 오러는 오로지 무기에만 응집시킬 수 있는 직선적인 힘이었다.

암연뿐만 아니라 오러까지 자유로이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욕심부리긴. 오러를 발현했으니 수련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어. 이제부턴, 내가 제대로 가르쳐 주겠네.

하네케는 루빈의 의욕을 진정시키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시험에서 우승하면 그에 따른 보상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로이네크로우, 로이넨서, 그리고 도시 선택권을 말하는 것이다.

그중에서 하네케가 관심 있는 건 도시 선택권이었다.

아무리 루빈의 내면에 갇혀 있는 몸이라지만, 로이넨 저택 안에만 머무르는 건 고역이었다. 그 역시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는 중이었다.

-저택을 나가서 살게 되는 도시를 고를 수 있다고 했지? 도시 목록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 ‘레우레타’라는 도시는 어떤가.

레우레타는 제국의 마지막 경계도시 중 하나. 용병들의 성지라는 그곳은, 수많은 괴수들과 대척을 이루는 곳이었다.

그만큼 황제의 눈에서 많이 벗어난 땅이기도 했다.

-만약 거기에 근거지를 마련한다면, 훗날 황제와의 전쟁에서 요충지로 쓸 수 있을 걸세.

‘음, 레우레타라. 생각해 볼게요.’

루빈은 지금 당장엔 하네케를 실망시킬 수 없어 일단 그렇게 말했다.

2차 선택의 보상은 로이넨서 선택, 로이네크로우 선택, 도시 선택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오늘 당장 루빈이 선택하는 건 로이넨서였다. 로이네크로우는 길리필드 영감의 수목원으로 이동하여 선택하게 될 테고.

로이넨서는.

‘역시 그자밖에 없어.’

루빈은 이미 생각해 둔 자가 있었다. 이 결정은 아주 오래전부터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회귀자로서 너무나 쉽고 당연한 결정이었다.

저벅저벅.

그때, 루빈은 발밑으로 땅이 밟히는 느낌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고개를 내려다보니, 촘촘하고 팽팽하게 엇갈려 있는 거미줄이 보였다.

탈락자를 실어 날랐던 실타래였다. 흡사 카펫처럼 출구에 깔려 있었다. 바로 2차 선택의 우승자를 위한 오래된 축하 의식이었다.

“이제 다 온 건가.”

거미 실타래로 만든 카펫 위를 걸어갔다. 앞쪽으로, 우승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다른 참가자들이 보였다.

쿤은 굴욕감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고, 하밀은 진심으로 경의를 보내고 있었다. 하밀 옆에 서 있는 블라네도 루빈과 눈이 마주치자 감사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짝짝짝짝.

다른 참가자들도 속마음이야 어찌 되었든, 전통에 따라 우승자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루빈은 이 당연한 우승에 기쁨에 취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아, 저기 있네. 내 로이넨서가 될 가신.’

우승자의 시선을 받은 그 가신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조아렸다.

곧바로 다음 일정이 진행되었다.

우승자 루빈이 돌아오고, 가주들과 참가자들은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참가자들은 빈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고, 가주들은 연단에 놓인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 같은 시각, 참가자들의 로이넨서가 될 가신들이 연회장과 연결된 다른 장소에 모여 있었다.

“이제 너희들은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로이넨서로 선택된다면, 이제 너희들은 이전의 가문을 잊고 새로운 가문을 섬겨야 한다.”

일렬로 앉아 있는 로이넨서 후보들. 그들 앞에 서서 엄중한 목소리를 내는 자는 본가의 직속 가신 데이몬이었다.

데이몬은 모든 가신들의 존경을 받는 자였다. 그의 능력이 어지간한 가주를 뛰어넘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역대 최고의 가주가 세이렌인 것처럼, 데이몬은 역대 최고의 직속 가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자의 입을 통해 직접 로이넨서로 임명된다는 것은, 가신들로서는 작지 않은 영광이자 명예였다.

‘비칸델, 트리캉, 부르소…….’

데이몬은 로이넨서 후보가 된 서른 명의 가신들 중에서도, 로이넨 가문 출신의 세 명을 쳐다보았다. 이 셋은 틀림없이 모두 로이넨서로 지명될 것이다.

‘비칸델. 누가 봐도 가장 출중한 녀석이니 당연히 우승자의 선택을 받겠지.’

우승자, 즉 루빈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로이넨 가문에 남는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비칸델을 잃지 않을 수 있으니 다행이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데이몬은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루빈 도련님이 비칸델이 아닌 가신을 선택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 비칸델보다 뛰어난 로이넨서는 없으니까.’

매해 로이넨 가문은 적지 않은 가신을 로이넨서로 키워내 다른 가문으로 보냈다. 로이넨의 가신들은 모든 암살검가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들로만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가문에서 로이넨서 후보라며 내세운 놈들이라고 해봤자…….’

본가의 직속 가신이었기에 다른 방계 가문의 가신들의 능력 역시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 봤자 비칸델, 트리캉, 부르소보다 한 수 아래에 불과했다.

4성 이상에, 로이넨서로 갖춰야 할 능력을 모두 갖춰야 하는 게 후보의 조건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는 차이가 나기 마련.

5성을 넘겨볼 정도인 비칸델은 척살조의 후보로도 거론됐던 실력자였다. 그에 반해 다른 가문의 가신들 중에는 이제 막 4성에 도달한 자도 있었다.

‘특히, 크로키슨 가문에서 보낸 쿠제 마르틴, 저놈은.’

데이몬은 가장 끄트머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쿠제를 쳐다봤다.

‘쿠제 마르틴은 사실상 크로키슨 가문의 골칫거리지.’

최근에 임무를 연달아 실패하면서 바닥을 보여준 쿠제 마르틴이었다. 크로키슨 가문이 폭탄을 던진 거나 마찬가지.

‘이 가신을 선택할 가문이 누가 있겠냐마는.’

데이몬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연회장 쪽 문이 열리면서 가신 하나가 들어왔다.

“데이몬 님.”

“지명 절차가 끝났나?”

“예, 명단이 여기 있습니다.”

참가자들은 우승자부터 순서대로 자신이 원하는 로이넨서의 이름을 적어서 세이렌에게 제출했을 것이다.

이름을 확인하고,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다시 조정하게 된다. 단, 우선권은 시험의 높은 순위에게 있었다.

“후보자가 겹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래?”

이상한 일이었다. 대개 우승자와 2위가 제출하는 로이넨서 후보가 겹치기 마련이었다. 특히 이번엔 비칸델이라는 최고의 카드가 있었지 않나.

‘그런데도 겹치지 않았다니.’

그렇다는 건, 아이들이 의외의 선택을 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그게 루빈일 수도 있고.

‘불길하군.’

데이몬은 손을 뻗어 가신이 가져온 명단을 받았다. 거기엔 각 참가자와 호명된 로이넨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제 지명 절차는 끝났다. 이름을 부르겠다. 호명된 로이넨서는 연회장으로 가서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라.”

30인의 후보들이 눈을 번뜩였다. 가신으로서 겪는 새로운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레인크로키 가문의 로이넨서는…….”

데이몬은 가장 낮은 순위를 기록한 가문부터 불러 나갔다.

역시 본가가 배출한 후보들은 모두 지명되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부르소는 4위를 차지한 블라네의 로이넨서가 되었고, 트리캉은 3위를 차지한 하밀의 차지가 되었다.

“비칸델, 너는…….”

블라네나 하밀보다 먼저 탈락했지만, 시험에서 보여준 활약 때문에 몽환거미가 2위로 매겼던 쿤 크로키슨.

쿤의 선택은 역시나 비칸델이었다.

“너는 크로키슨 가문의 로이넨서가 된다.”

비칸델의 눈빛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루빈이 아니라 쿤이라고?’ 하는 표정이었다.

예상 밖인 건 데이몬 또한 마찬가지였다. 데이몬은 저절로 구겨지는 인상을 겨우 풀었다.

어쨌거나, 우승자 루빈의 선택이었으니.

“마지막으로 우승자인 루빈 도련님은… 쿠제 마르틴을 선택했다.”

절대로 호명되지 않을 것 같았던 가신이 우승자의 선택을 받다니.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이었다.

선택받지 못한 다른 후보들은 자격을 갖춘 가신들답게 흔들림 없이 자세를 유지했다. 내년엔 호명될 수 있기를 기약하며.

“지명된 로이넨서들은 모두 연회장으로 가라.”

아홉 명의 로이넨서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몬은 자신 앞을 지나치는 쿠제와 눈이 마주쳤다. 쿠제 역시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연회장이 떠들썩해지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데이몬도 연회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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