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우승자의 선택 (1)
데이몬이 예상한 것처럼, 루빈의 선택이 다름 아닌 쿠제 마르틴이라는 게 밝혀지자 연회장은 술렁거렸다.
“이건 진짜 뜻밖이군요.”
“우승자라고는 해도, 너무 안이한 선택은 아닐지.”
로이넨 저택에 있는 뛰어난 가신들 틈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차마 입에 담지는 못했지만, 대부분의 가주들은 루빈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선택을 한 거라고 생각했다.
“도련님, 정말로 쿠제를 로이넨서로 선택하시는 거예요? 정말로?”
하밀이 속삭이며 물어오자 루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술렁이는 분위기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오히려 이 순간 루빈은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고 있었다.
‘역시 이 시기에 쿠제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이 없군. 심지어 어머니마저도.’
루빈만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쿠제는 실패자가 아니야. 시기를 잘못 만난 천재지.’
루빈이 열한 살인 지금, 쿠제의 나이는 서른세 살이었다.
그는 이제 막 4성의 경지에 돌입했다. 격투술, 무기 운용술, 연기, 은신술 등 로이넨서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능력들의 기본 수치에 막 도달한 상태였다.
하지만 쿠제의 진짜 강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암연의 독창적 운용.’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독창성. 말이 그렇지, 회귀 전에는 주목도 받지 못했던 일종의 괴짜실험가였다. 게다가 얌전하고 살짝 침울해 보이기까지 하는 인상까지.
하지만 그 너머 쿠제가 품고 있는 실험 정신은 실로 무궁무진한 것들이었다.
‘그야말로 혁명이었지. 기존에 없던 이론과 유행을 만들어낼 정도로. 그런 천재성을 제때 알았더라면 암살검가의 훌륭한 무기가 되었을 텐데.’
원래대로라면, 쿠제는 아무 가문에게도 호명되지 못한 채 크로키슨 가문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실패자라는 오명 속에 크로키슨 가문의 자잘한 첩보 임무에나 쓰이면서 이리저리 떠돌며 살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제때 쓰이지 못한 능력은 서서히 쇠락해 가기 마련. 그 또한 자연의 섭리를 피해갈 순 없었다. 루빈이 그를 만났을 때가 딱 그때였다.
회귀 전, 루빈이 중년의 쿠제를 만났던 건 황제의 암살검가 토벌이 있기 2년 전쯤이었다. 이미 전성기를 놓쳐 대성하긴 어려웠지만, 그가 가진 독창성만큼은 여전했다.
“암연을 반구형 형태로 방출한 채로, 계속 증폭시키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일순간 그 영역을 무중력 환경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자, 보시죠.”
그때 루빈이 받은 충격이란.
마나의 영역에서만 가능한 ‘염동 마법’을, 오로지 암연만으로 구현해 낸 것이다.
그러나 모든 건 적절한 때가 있는 법. 이미 암살자로서의 능력이 쇠락해 버린 쿠제는, 자신의 여러 실험들을 실전에 적용시킬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론을 전수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보여 드릴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뿐이네요.”
암연을 제대로 성장시키지 못했던 쿠제는, 조그마한 돌멩이 몇 개만 무중력에 가두는 데 그쳤다. 개화하지 못한 천재의 말로였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 내가 직접 날개를 달아줄 거니까.’
쿠제가 개발한 여러 기술을 익히는 것 자체는 중요치 않았다. 더 중요한 건, 쿠제가 개발한 이론과 독창성을, 다른 모든 암살자들에게 전수하는 일이다.
모든 암살검가의 수준을 한층 끌어올리는 것.
언젠가는, 전부 전쟁에 휩쓸릴 테니까.
그때, 연회장 중앙에 자리한 세이렌이 로이넨서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너희들에게 로이넨서 자격을 부여하겠다.”
로이넨서들이 세이렌을 향해 몸을 조아렸다.
“오늘부터 아이들의 그늘이 되어라. 그리고 가르쳐라. 너희들이 알고 있는, 알게 될 모든 것을.”
이후 각 로이넨서들은 새로운 주인들을 향해 흩어졌다.
최고의 실력자로 여겨졌던 비칸델은 쿤에게 가기 전, 이제까지 도련님으로 모셨던 루빈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비칸델.”
“네, 도련님.”
“쿤은 격투 본능이 탁월한 놈이야. 암연도 거칠고 직선적이라 이를 키워주면 좋아하겠지.”
그저 가볍게 흘리듯 던진 말이었다. 그걸 들은 비칸델은 웃었지만, 눈빛만은 진지했다.
“각별한 사이셨나 봅니다.”
“각별하지.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저 녀석이 내 발끝만이라도 쫓아올 수 있으면 하거든.”
“명심하겠습니다.”
비칸델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루빈 도련님이 자기가 아닌 쿠제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몹시 자존심이 상했었다. 그러나 루빈의 선택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대체 왜 쿠제를 선택하신 걸까.’
아직도 그 이유를 몰랐지만, 비칸델은 노련한 가신답게 구태여 묻지 않았다. 언젠간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라 믿으며.
“쿤을 잘 부탁해, 비칸델.”
“…….”
이 순간이 지나면 쿤의 로이넨서가 되는 비칸델. 적이 될지도 모르는 놈한테 무기를 쥐여주는 꼴이 될 수도 있었지만, 루빈은 자신의 결정을 믿었다.
그리고 이것이 모두를 위한 최선의 결과라고 확신했다.
“부디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기를.”
이 말을 남기곤, 비칸델은 쿤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비칸델과 스치듯 루빈 쪽으로 걸어오는 또 다른 가신.
쿠제 마르틴이었다.
그의 얼굴에선 기쁨만큼이나 당황스러움도 함께 묻어났다.
“루빈 도련님,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쿠제. 반가워. 앞으로 잘 부탁할게.”
“영광…입니다.”
루빈은 회귀 전, 쿠제와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반구형 암연으로 무중력의 영역을 만드는 것.
그 암술(暗術)을 처음 시도했을 때가 이맘때라고 했었다. 루빈이 2차 선택을 하고, 쿠제가 로이넨서 후보가 되었을 무렵 말이다.
“그리고 성공하면 꼭 알려줘야 해, 쿠제.”
“…예?”
맥락 없이 이어진 루빈의 말에 쿠제가 수수께끼를 전달받은 것처럼 아리송한 표정이 되었다.
루빈은 다른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반구형의 암연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쿠제의 표정에 한 번 더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이번엔 입까지 살짝 벌어진 게, 많이 놀란 듯하다.
“어, 어, 어찌 그걸?”
“기꺼이 네 실험 파트너가 되어줄 테니까.”
“네?”
루빈이 악수를 청하며 손을 건넸다. 쿠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멀뚱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실험 파트너라니. 자신의 괴상한 연구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모자라, 그걸 도와주겠다고? 그동안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연구인데.
여전히 멍한 얼굴의 쿠제에게, 루빈은 씩 웃어 보일 뿐이었다.
* * *
정오가 되었다.
암살검가의 아홉 가문 일행은 순차적으로 길리필드 영감의 수목원으로 향했다. 물론 서로 다른 신분과 경로를 통해서였다.
이중 가장 막바지로 해저동굴로 들어선 건 루빈과 쿠제였다.
“반구형 암연이 무중력을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동일한 밀도를 이뤄내는 ‘방출 행위’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증폭 행위’가 순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루빈이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는데도 쿠제의 입은 좀처럼 멈출 기색이 없었다. 강둑이 무너진 강물 같달까. 열의가 대단했다.
‘나이가 들어서야 성격이 진중해졌던 거였군. 그냥 아는 척하지 말걸.’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었기 때문일까. 쿠제는 해저동굴을 걸어가는 내내, 자신의 연구와 발견에 대해 하나씩 읊어댔다.
생각보다 수다스러운 인물이라는 건 의외였지만, 쿠제가 곧장 자기 일에 의욕을 드러내는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다.
“다 왔군.”
“아, 다 왔나요?”
어느덧 출구 앞에 도착한 두 사람.
두 사람이 출구를 통과하자, 먼저 도착하여 우승자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참가자들이 다가왔다.
다른 참가자들은 처음으로 구경하게 된 로이네크로우의 서식지가 마냥 신기한 것 같았다.
다만 이들에게 허락된 장소는 많지 않았다.
로이네크로우가 안개의 고목 가지에 열매처럼 알을 맺는 광경이나, 안개의 고목 상층부를 볼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공간들은 오로지 로이넨 혈통이거나 방계 가주로 올라선 자들에게만 허락되었기에, 그들은 로이네크로우를 선택하는 장소로 곧장 향했다.
안개의 고목 하층부의 넓은 공터.
절벽이 가로막고 있는 그곳에서 자제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수백 마리의 성체 로이네크로우였다.
직각의 절벽을 튼튼한 다리로 붙들고 있는 로이네크로우들. 선택되기를 기다리는 까마귀들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걸 바라보던 쿠제는 작은 목소리로 탄성을 내었다.
“훌륭한 로이네크로우들이 많네요.”
맞는 말이었다. 수목원은 2년 전에 겪은 혼란스러운 시기를 감쪽같이 지워내며, 지금은 절정기를 누리는 중이었다.
이번에 자제들의 선택을 받을 로이네크로우들은, 2년 전엔 제왕을 가리는 비행에는 참여하지도 않았던 새끼들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전부 때깔이 곱고 덩치가 컸다. 2년 사이, 군집 전체가 빼어난 성장을 이루었다는 증거였다.
‘제왕 노릇 제대로 했나 보네.’
저편에서 루빈을 반기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루빈 도련님!”
손을 크게 내저으며 다가오는 건 퓌닉이었다.
당돌하고 활기찬 목소리가 끼어들자, 선택을 앞두고 진지해졌던 분위기에 틈이 생겼다.
서슬 퍼런 눈빛들이 암기처럼 퓌닉에게 꽂혀들었다. 쿤을 필두로한 참가자들의 예민한 눈빛이었다.
“퓌닉, 오랜만이야.”
“이게 얼마 만이에요, 도련님!”
“쉿. 지금 다들 선택을 앞두고 날카로워져 있거든.”
루빈의 나지막한 충고에, 퓌닉은 놀라며 두 손으로 입으로 가져다 댔다. 둘러보니, 정말로 눈빛들이 살벌했기 떄문이다.
‘해줄 말이 있는데. 티나 님이 전하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걸 알아차린 걸까? 루빈은 퓌닉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자, 이제 로이네크로우를 선택해라.”
어느덧 선택의 순간. 세이렌의 선언이 이어졌고, 그 첫 번째 순서는 2차 선택의 우승자인 루빈이었다.
“루빈. 앞으로 나가 네 로이네크로우를 택해라.”
참가자들 틈에서 루빈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모든 가주와 참가자들의 시선이 그의 뒤를 좇았다.
‘후.’
절벽을 메운 수백 마리 로이네크로우들. 루빈이 다가올수록 경외심 가득한 눈동자를 번뜩인다.
그르르르.
그르르르르.
로이네크로우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2년 전, 안개의 고목을 정화시켰던 그 순결한 암연이 바로 루빈의 것이라는 걸.
그 암연의 광활함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모두 루빈의 선택을 받기를 원하며 구애하듯 울어댔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에 쿠제와 퓌닉은 물론이고, 다른 암살검가의 가주들과 참가자들까지 입을 벌리며 눈을 반짝거렸다.
“뭐지? 마치 구애하는 것 같잖아.”
“쉿, 조용히 해라! 멍청한 녀석.”
쿤을 꾸짖는 크로키슨 가주의 꾸짖음을 들은 루빈은 피식 웃었다.
자, 이제 선택의 순간이다.
‘어떤 까마귀를 선택해도 나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해.’
절정기의 로이네크로우들. 이렇게 넘치도록 다양한 선택지는, 회귀 전에는 조금도 누리지 못했다. 형편 없는 성적으로 늘 후순위였으니.
그 당시 루빈이 선택할 수 있었던 로이네크로우는 평균보다 떨어지는 개체들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회귀 전보다, 군집 전체의 수준이 훨씬 높았다.
소위 말하는 최상급 로이네크로우는 몇 마리 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번 세대는 평균의 두 배 가까이는 되어 보였다.
즉, 선택 순서가 상관없을 만큼 황금 세대라는 뜻. 개중 무얼 골라도 좋은 선택이었다.
‘그래도 내가 선택할 건 이 녀석뿐이지.’
루빈은 절벽 아래쪽에 벌러덩 누워 있는 녀석 앞에 섰다. 게을러 보이기도 하고, 거만해 보이기도 한 괴상한 로이네크로우였다.
“전 이 로이네크로우를 선택하겠습니다.”
루빈이 선택한 로이네크로우는 성체 평균보다 몸집이 작은 녀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들려오는 수군거림.
“또 이상한 선택을 하는군.”
“건방진 놈. 잘난체하긴.”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아이야.”
그도 그럴 게, 루빈이 고른 녀석은 절벽 아래에 있던 개체.
보통 상급 이상의 우월 개체들은, 절벽의 윗부분을 차지하고 날개를 활짝 편 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기에, 루빈에 뒤이은 참가자들은 절벽 윗부분의 까마귀들부터 골랐다. 쿤과 하밀, 블라네로 이어지는 참가자들 모두.
크르르- 크르르르르.
그러든지 말든지, 루빈은 자기보다 커다란 몸집의 로이네크로우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루빈이 손을 뻗자, 로이네크로우는 기분 나쁜 울음소리를 내었다.
쿠제가 다가와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잘 아시겠지만, 모든 로이네크로우가 주인을 받아들이는 건 아닙니다. 심지어 주인을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루빈은 피식, 웃었다. 그러곤 아이다운 천진한 말투로, 까마귀를 달랬다.
“안녕, 반가워. 여기는 내 로이넨서, 쿠제라고 해. 서로 잘 지낼 수 있겠지? 쿠제, 너도?”
루빈이 자신이 선택한 로이네크로우를 소개하자, 쿠제는 난처한지 뒷머리를 긁었다. 로이네크로우와 인사를 나누라니.
까아아악!
“도련님. 로이네크로우가 저를 경계하는 것 같습니다.”
“성격이 더러워서 그래.”
그러자 까마귀가 한 번 더 울부짖었다.
그르르륵! 까아아악!
“그만 울고. 자, 가자.”
루빈의 선택을 받은 로이네크로우가 공중으로 몸을 띄워 루빈을 따라나서는 순간이었다.
쿠제는 절벽에 남아 있는 수많은 로이네크로우들의 변화를 눈치챘다.
‘다른 까마귀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리고 있어?’
마치 루빈을 따라나선 이 로이네크로우에게, 경의를 표하는 듯한 태도랄까.
그제야 쿠제는 이 로이네크로우가 까마귀로서는 드문 눈동자 색깔을 지녔다는 걸 알아차렸다.
‘민트색?’
이제껏 민트색 눈동자를 지닌 로이네크로우를 본 적 있던가?
대개는 검은색 눈동자였다. 로이넨가의 주인인 세이렌의 까마귀만이, 드물게 붉은색 눈동자를 가졌을 뿐.
“아, 이름 뭐로 할지 생각났다. 티나가 좋겠군.”
루빈의 이 한마디에 티나가 다시 울음소리를 내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퓌닉은 무엇이 재미있는지 연신 키득거렸다. 그제야 아이는 루빈의 귀에 대고 속삭일 수 있었다.
“루빈 도련님. 아까 전달 못 드린 티나 님의 전언이요. 지금 말씀드려도 될까요?”
“뭔데?”
“실수하지 말고 제대로 골라라, 꼬맹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