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우승자의 선택 (2)
“마지막 선택을 위해 다음 장소로 이동하겠다.”
세이렌의 명에 따라 가주들과 자제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이번에도 흩어진 뒤 간격을 두고 순차적으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루빈은 퓌닉, 길리필드 영감과 짤막한 인사를 나눈 뒤, 수목원을 나섰다. 해저동굴을 지나쳐 다시 파무크 대로로 올라섰다.
열세 개의 교착광장이 자리 잡은 파무크 대로.
파무크 왕국이 관리하는 이 대로는 제국에서 가장 안전한 도로로 알려져 있다.
이 도로를 통행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신분이 보장된 셈.
‘이제부터 북행로인가.’
파무크 대로의 ‘북행로’는 특별구간을 의미했다.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 분위기가 엄중한 제4교착광장의 북쪽 길. 이 특별구간은 대로를 관리하는 파무크 왕가 사람들조차 마음대로 이용하지 못했다.
오직 황실의 승인을 받은 자만이 통행할 수 있는 제국의 영역.
‘이제부터 칙명부가 개입하는 거겠지.’
늘 같은 식이었다. 세 번째 보상 절차에는 이제껏 빠져 있던 칙명부가 참관했다.
본래 칙명부는 암살검가의 전통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로이넨서라느니, 로이네크로우라느니.
그런 건 암살검가 안에서 알아서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도시 선택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미래의 암살자가 둥지를 트는 도시. 암살검가에게 위장별채는 자제들이 암살자로 성장하는 요람이었고, 칙명부에게는 황제의 눈과 귀 노릇을 하는 공간이었다.
도시의 동향과 관리들의 실태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보고하는 것 또한 위장별채의 주요 업무였다.
‘저건 어머니의 마차인데?’
도착하기까지 2킬로미터 남짓 남았을 때.
먼저 출발했던 세이렌의 마차가 멈춰 서 있었다. 곧 세이렌의 가신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도련님.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일러둘 말이 있었던 걸까? 가주의 전언에 루빈은 곧바로 마차를 옮겨 탔다.
“앉거라.”
루빈이 앉자마자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출발한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세이렌은 루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냉랭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을 뿐이다.
“티나를 고르다니. 예상하긴 했지만, 이번에도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려느냐?”
역시 그녀는 알고 있었다.
다른 가주들과 자제들은 티나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세이렌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그게 위험한 선택이라는 걸 루빈도 모르지 않았다. 티나는 환혈족이었고, 환혈족을 멸족시킨 건 다름 아닌 황제였으니.
“환혈족과 칙명부 수장을 한자리에 놔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티나를 먼저 로이넨 저택으로 보내신 거군요.”
“너를 감싸주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저택을 나가는 순간, 넌 가짜 이름으로 살아갈 테니.”
이제야 세이렌의 눈길이 루빈을 향했다. 차갑고 건조한 눈빛은 여전했다.
“로이넨서나 로이네크로우나, 하나같이 예상치 못했지만 난 네 선택을 존중한다. 다만,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알아두거라.”
걱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경고였다. 애정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경고.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 어머니에게 해야 할 대답은 많지 않았다. 단 한마디면 충분하다.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감내하겠습니다. 제 선택이니까요.”
“그래, 그래야지.”
세이렌은 루빈의 눈동자에 한 치의 두려움도 섞여 있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더 채근하지 않았다.
“살아갈 도시는?”
“결정했습니다.”
이번에도 이어지는 단호한 대답.
세이렌은 예측 불허인 막내아들의 선택에 궁금증이 일었지만, 굳이 그걸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몇 시간 안에 알게 될 것이었다.
대신, 옆에 놓여 있던 한 장의 종이를 루빈에게 건넸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낱장의 빈 종이.
루빈은 그걸 받아든 순간, 상당한 가치의 귀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황제에게 직접 전해질 문서였다.
“도착하면, 거기에 로이넨서와 함께 살아갈 도시 이름을 써서 칙명부 수장에게 제출하거라.”
“알겠습니다, 가주님.”
마침 마차의 속도가 줄어들더니, 잠시 후 멈춰 섰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왁자한 분위기가 마차 밖으로 전해졌다.
칙명부 수장, 룰포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 * *
직접적인 교육을 통해 암살자로서의 능력을 향상시켜 주는 가짜 아버지, 로이넨서.
훗날 암살자의 목숨을 살려줄 수도, 임무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역할이 될 수도 있는 동료 로이네크로우.
이 두 선택을 가볍게 여길 암살검가 자제는 없다.
그러나 도시 선택권은 좀 다르다.
도시 선택권은 암살검가 자제들에게는 앞선 두 선택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지는 선택권이었다. 메인 요리에 이어지는 후식이랄까.
본격적인 암살자가 되기 이전에 겪어보는 위장 생활의 시험판. 그 정도로 받아들여질 뿐이었다.
‘물론 그건 다른 애들한테나 해당되는 말이지.’
루빈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도시 선택은 좋은 로이넨서, 로이네크로우를 고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어떤 도시를 고르느냐에 따라, 동료가 될 사람을 만들 수 있고, 하나밖에 없는 무구를 구할 수도 있어.’
루빈은 역사의 흐름을 바꿀 만한 정보들을 여러 개 알고 있었다. 회귀한 자만이 알 수 있는 정보들이었다.
그랬기에 그 정보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장소를 골라내야 했다.
“도련님. 제 생각엔, 항구도시 크룰티가 어떨까 합니다.”
크룰티라면, 몽환의 시험에서 하밀의 두려움으로 출현했던 크룰티 오크의 파생지였다. 규모가 큰 항구도시였기에 교역소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제국 해군에 입대하거나, 심지어 해적과 싸워볼 수도 있다. 바다와 해협, 여러 섬들에 흩뿌려진 보구들을 찾아볼 수도 있고.
크룰티를 추천한 건 쿠제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고 로이넨서의 충고였으니 참고하는 게 맞긴 했지만.
“게다가 저는 항구도시에서 순조롭게 지낼 만한 여러 직업 기술도 습득해 두고 있습니다.”
로이넨서의 위장 신분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역시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흠, 크룰티라.”
루빈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빈 종이를 내려다봤다.
종이 옆에는 이번 참가자들이 고를 수 있는 후보 도시 목록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려해야 할 목소리는 쿠제 하나만이 아니었다.
-내가 말했잖나. 용병들의 성지인 레우레타로 가게나. 거기라면 텔마흐와의 전쟁에 대비해 미리 병력을 마련해 볼 수 있다네.
내면세계에 자리 잡은 하네케는 오래 전부터 레우레타를 추천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레우레타는 용병들의 성지였다. 괴수들과 인간의 생사가 걸린 전선이 형성된 산맥이 있었고,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여러 용병단의 주요 활동지이기도 했다.
‘적어도 괴수들 상대로 한 수련 하나만큼은 수월하겠네요.’
-용사를 자처하는 이들을 동료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고 말이지.
물론 이 또한 나쁘지 않은 선택이긴 했다.
루빈이 망설이는 듯하자, 하네케가 넌지시 물었다.
-티나, 그 까마귀 친구는 뭐라 하던가?
‘티나는 뭐, 티나다운 추천을 하더군요.’
세이렌의 명에 따라 잠시 흩어져 있게 된 티나. 헤어지기 전, 티나는 도시 선택에 대해 루빈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녀가 살고 싶어 하는 도시는 제국에서 단 한 군데였다.
‘스플렌도크.’
스플렌도크는 대규모 광산 지역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거의 모든 보석류의 원천이 채굴되는 광산 도시였다.
빛나는 것들 천지였으니 환혈족이라면 미쳐 환장할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곳 역시 루빈이 원하는 곳은 아니었다.
이후로도 루빈은 쿠제와 하네케의 주장과 근거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중 루빈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내용은 없었다.
-자네, 이미 결정을 내린 게로군? 맞지?
루빈의 무덤덤한 반응에 지친 하네케가 넌지시 물었다.
루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결정을 내려놓고 있었다. 단지 동료들의 의견이 자신의 마음을 돌릴 만한 것인지 확인해 보았을 뿐.
‘미안하지만 스플랜도크도, 크룰티도, 레우레타도 아니에요.’
루빈이 빈 종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온 다음, 펜을 쥐었다. 오래전에 내렸던 결정이었으니 더는 미룰 필요가 없었다.
곧장 도시명을 써 내려갔다.
“진심입니까?”
그 도시명을 본 쿠제의 뜨악한 반응. 의외라는 걸 넘어서,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루빈은 어깨를 으쓱거린 뒤, 자신이 적어낸 종이를 칙명부 병사한테 건넸다.
이제는 기다려야 했다. 자신과 똑같은 도시 이름을 쓴 다른 아이가 있다면, 칙명부가 나서서 조율하려 할 것이다. 단, 그 우선권은 우승자인 루빈에게 있었다.
‘과연 이 도시를 고른 다른 사람이 있을까?’
30분이 지나자, 루빈 이후 2위부터 차등 순으로 진행된 도시 선택이 모두 끝났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루빈 참가자님이 선택한 도시와 겹친 참가자는 없습니다.”
칙명부 병사의 보고에, 옆에서 듣고 있던 쿠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밖에. 이건 그냥 꽝을 뽑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선택 절차가 마무리되고, 두 시간 뒤.
모든 자제들과 가주들은 칙명부 수장이 개최한 연회에 참석했다.
비밀에 싸인 암살검가를 위한 연회였기에 아무리 칙명부라 할지라도 연회 규모를 크게 할 수 없었다.
단, 칙명부의 수장인 룰포만큼은 앞뒤 가리지 않고 기분을 내는 중이었다.
황실의 권력자답게, 황제가 없는 자리라면 거의 어디서든 발그레한 얼굴로 지낼 수 있는 게 바로 룰포였다.
오늘도 룰포는 여느 행사에서 그랬듯 거나하게 취해 버렸다.
살짝 비틀대는 걸음으로, 룰포가 연회의 중요한 순서를 몸소 처리하기 위해 단상으로 올라간다.
“폐하의 요긴한 검이 될 꼬마 녀석들. 이제 너희들이 써낸 도시를 하나씩 확인시켜 주마.”
룰포 뒤편으로 커다란 제국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단상에 놓인 의자에 풀썩 몸을 앉힌 다음, 지독한 술이 담긴 유리잔을 홀짝거렸다.
룰포가 이름을 부르면, 그 아이가 일어나 고른 도시를 밝힌 다음 한마디씩 덧붙이는 방식이었다.
“흠. 이번엔 크리거 가문의 블라네. 아주 반반한 얼굴을 지녔는데, 그 화상 자국은 좀 섬뜩하구나. 뭐, 암살자니까 훈장인 셈이려나? 딸꾹! 음, 너는 ‘아베른’을 선택했군. 아주 큰 상업도시지. 맛있는 고기도 많고 말이야. 딸꾹!”
블라네의 선택은 아베른이었다.
같은 선택을 한 참가자가 또 있었다. 레인크로키 역시 아베른을 선택했지만, 시험 성적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결국 블라네가 아베른에서 지내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블라네가 허리를 숙였다. 룰포의 조롱에도 이제는 당당하게 화상 자국을 내보이는 그녀였다.
뒤이어 호명된 사람은 3위 하밀 쿠니틀리.
“오호라. 이 아이는 대담하게도 ‘레우레타’를 선택했군. 근데 거기 가봐야 무기상점 딸내미 노릇이나 할 텐데, 재밌으려나? 딸꾹! 뭐, 어쨌든 국경 지역 정보망이 늘어나는 건 반가운 일이지.”
루빈은 의아한 눈으로 하밀을 쳐다보았다. 레우레타를 선택했다니? 회귀 전 그녀의 선택과 다르지 않나.
그 당시 하밀은 가문 근거지 중 하나에서 위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엔 제대로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한계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더 강해지기 위해서 말이다.
루빈의 시선을 느낀 하밀은 존중의 의미로 목례해 보였다.
“다음은 쿤이군. 이번에도 2위를 했다지?”
이름이 호명되자 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투견 같은 기세는 여전했다. 그는 룰포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2년 전에 있었던 ‘1차 선택’ 이후, 룰포는 크로키슨 가주와 쿤을 눈여겨보던 중이었다.
칙명부를 만만하게 여기는 것 같은 세이렌 로이넨, 그리고 그녀가 쌓아 올린 아성.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세이렌을 견제하고 균열을 낼 자기 사람으로서, 룰포는 크로키슨을 점찍어둔 상태였다.
“쿤 크로키슨의 선택은…….”
룰포는 술기운에 슬슬 감기기 시작하는 눈을 힘주어 뜨면서, 종이를 만지작댔다.
“‘크룰티’로군. 항구도시 크룰티! 흠, 생각을 듣고 싶은데? 딸꾹!”
칙명부 수장이 대답을 요구하자 크로키슨 가주가 나서려 했다. 하지만 쿤이 제 아버지보다 앞서 나섰다.
“수장님, 직접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항구도시 크룰티에서 제국 해군을 돕고 싶습니다.”
“제국의 해상력 굴기에 일조하겠다? 어떤 식으로 말이더냐?”
“한 가지 방법만 정해두진 않았습니다. 제게 허락된 모든 방면에서, 제 능력을 투신하겠습니다.”
영학한 녀석. 이 정도 맹목적인 충성심이라면 룰포 눈에 드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룰포가 술잔을 쥔 채로 허리를 꺾어가며 끌끌끌 웃어댔다.
“예를 들면, 귀찮은 해적 선장의 머리통을 잘라 가져오는 일 말이냐?”
“그 정도는 제게 일도 아닙니다.”
루빈은 암살자의 범위를 벗어나 제국의 충신이 되어가는 듯한 쿤을 바라보았다. 이 역시 회귀 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전개였다.
“마음에 드는군, 쿤! 그래야지. 폐하의 검이 되려면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는 쿤은 고개를 잠시 뒤쪽으로 돌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루빈의 시선에 응하기 위해서였다. 쿤의 눈동자엔 루빈을 향한 강한 적개심만 가득했다.
루빈에게 씩 웃어보인 녀석은, 다시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 녀석, 황제의 하수인이 되려고 작정한 것 같네만.
‘두고 보시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하네케를 안심시킨 루빈은, 다시 룰포에게 집중했다.
“자, 마지막은… 이번 대회의 우승자군. 이번에도 본가의 자제가 우승했다니, 축하할 만한 일이야.”
루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룰포에게 예를 갖췄다.
“루빈 로이넨. 로이넨 혈통의 막내아들.”
룰포는 루빈이 제출한 종이를 펼쳐 들었다. 그러더니 눈을 끔뻑거리며, 벽에 붙은 제국 지도와 종이를 번갈아가며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라? 여긴 아무도 고를 리 없는 도시인데? 이봐, 진심인가?”
룰포가 눈을 끔뻑거리면서 루빈에게 물었다.
“정말로 너, ‘카포티니’에 갈 셈인 게냐?”
카포티니.
대륙의 서쪽 반도에 위치한 도시.
카포티니는 앞선 항구도시나 광산도시, 국경도시와는 전혀 다른 특색을 지닌 도시였다.
다른 자제들이 고른 도시는 암살자가 성장하기에 아무런 악조건이 없는 곳. 암살자의 성장에 도움을 주었으면 주었지, 방해요소는 없는 곳들이었다.
하지만 카포티니는 다르다.
그곳은 암살자자의 성장을 방해하는 걸 넘어,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는 도시였다.
“루빈, 여기가 어떤 도시인지 알고 고른 게냐?”
“예,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마법사들의 도시, 다른 말로는 암살자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죠.”
루빈의 말에, 룰포의 발그레한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