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카포티니로 가는 길 (1)
‘역시 냉담한 작별인가.’
서로 무기를 겨누었던 경쟁자들과도 짤막하게 작별 인사를 나눈 루빈이지만, 그 가주와는 그런 식의 작별조차 없었다.
로이넨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루빈의 출가 준비는 끝난 상태였다.
대륙의 서쪽 끝에 있는 카포티니로 가는 약 한 달간의 여정.
그 여정을 위한 마차 한 대가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더 이상 루빈을 호위할 가신도 주어지지 않았고, 오직 로이넨서와 루빈 본인이 헤쳐 나가야 했다.
“장거리 여행엔 여러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텐데!”
어머니 대신 루빈을 떠나보내는 여인. 서슬 퍼런 암살검가에서 이토록 강렬하고 솔직한 감정을 내비치는 여인은 루빈의 유모 퓌레밖에 없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바르기까지 하는 시녀 모습에, 루빈의 배낭에서는 어떤 말소리가 들려왔다.
“웃기고 있네. 네 시녀는 네가 어떤 놈인 줄 알고 저렇게 걱정을 안고 있는 거냐?”
자신은 편안하게 여행하겠다며 고슴도치로 변신 상태인 티나였다.
반면 퓌레의 눈물에 감격한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이 칙칙한 암살자들 틈에서 형광의 빛을 내는 유일한 사람이라며 퓌레를 좋아했던 하네케였다.
-저 특별한 여인을 못 보게 되다니, 무척 아쉽군.
“도련님, 제 말 잘 들으세요! 불행하게도, 출가한 자제들이 위장별채에 도착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는 일들이 있단 말이에요! 산적이나 괴수들, 뭐 그런 놈들한테요!”
“그래…. 명심할게.”
“그리고 저 로이넨서…….”
퓌레는 뒤편에 있는 마차 앞에서 대기 중인 쿠제가 듣지 못하도록 루빈에게만 속삭였다.
“완전히 구제불능이라던데요?”
“걱정 마, 안심해도 돼. 유능한 자야.”
“유능? 유능? 비칸델 님이나 데려가시지, 참!”
이대로 있다간 퓌레에게 붙들려 영영 저택을 떠나지 못할 판이었다.
루빈은 퓌레와 짧은 포옹을 나누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퓌레의 울음소리가 길게 따라왔다.
그때. 어느새 다가왔는지, 마차로 향하는 루빈 곁으로 보폭을 맞추며 걷는 직속 가신 데이몬.
“도련님. 카포티니에 도착하시면 곧바로 칙명부의 연락책이 위장별채로 안내할 것입니다. 그자에게서 새로운 신분과 이름, 생활자금을 전달받으실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어떤 신분으로 살지 모른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본가에서도 로이넨 혈통이신 도련님의 편의를 봐드리고 싶지만, 하필 지정 도시가 카포티니이기에 쉽지가 않습니다.”
“뭐가 됐든 상관없어.”
정원을 가로질러 마차 앞에 도착했다.
데이몬은 아직도 믿음이 가지 않는 루빈의 로이넨서를 날카롭게 쳐다보고는 이내 루빈에게로 몸을 숙였다.
“그럼,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도련님이 원하는 그 경지에 서둘러 올라서시길.”
“데이몬, 가주님을 잘 보필하도록.”
몸을 숙인 데이몬은 루빈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암살검가의 가주를 걱정하는 자제라니.
그러나 어쩐지 루빈의 말에서는 그런 격차를 뒤엎는 진심이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럼, 이만 가겠다.”
루빈은 마차에 올라탔다. 출가한 자제에겐 마부조차 주어지지 않았기에 쿠제가 마부를 맡아야 했다.
마부석에 앉은 쿠제가 말 두 마리의 고삐를 한 손에 쥐면서 여정이 시작되었다.
“후아!”
너부러진 배낭이 꼬물거리더니, 가시 돋친 고슴도치 형태인 티나가 바깥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출발한 거 맞지?”
티나는 마차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가시 돋친 말들을 쏟아냈다.
“한 달이 지나서야 도착이라니! 악취미도 정도껏이지! 하필이면 왜 서쪽 지방의 도시를 고른 거냐고!”
루빈은 티나의 절규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엥? 벌써 자냐, 너? 이제 막 출발했잖아.”
덜커덩거리는 마차. 루빈은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한참을 혼자 떠들다 제풀에 지친 티나가 고양이로 변신해 루빈의 옆자리에 몸을 웅크려 잠들 때까지, 루빈은 꼼짝하지 않았다.
“…….”
눈을 감은 루빈이 가끔씩 몸을 들썩였다. 루빈은 이미 브리온 오러를 연마하기 위해 하네케와의 수련에 돌입한 상태였다.
* * *
“도련님, 오늘은 이 마을에서 묵는 게 좋겠습니다.”
쿠제가 마차의 속도를 늦추며 말했다.
저택을 나선 지 사흘째. 그동안 루빈 일행은 저녁 무렵 도착한 도시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에 다시 출발하며 여정을 이어나갔다.
오늘 묵을 곳은 앞선 두 곳에 비해 규모가 작아 도시라고도 할 수 없는 마을이었다. 마을의 이름은 네키아빌. 이런 마을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외딴 시골이었다.
“…….”
마차 내부에 있는 루빈한테서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다는 건 수긍의 표현이기도 했다.
“주무시나 보네요.”
“저놈, 자는 게 아냐. 뭔 내면의 수련을 한다잖아.”
“아, 그랬죠.”
마부석 옆에는 티나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티나는 고양이 모습을 한 채로 가끔씩 꼬리를 풀썩거리며 앞발을 들어 수염 쪽을 쓸어내렸다.
“심심하네.”
티나의 한마디에 쿠제는 헛기침을 큼큼, 해보았다.
루빈의 로이네크로우가 사실은 환혈족 출신 암살자였다니! 처음엔 그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환혈족의 놀랄 만한 능력을 눈앞에서 확인하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 표지판이다. 1킬로미터 남았네.”
티나가 네키아빌까지 남은 거리를 알리는 표지판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른 인기척을 감지했다.
“이봐, 주변에 아무도 없지?”
“네, 제가 보기에도 아무도 없습니다만.”
“그렇지? 그럼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놔야겠다.”
그러면서 티나는 모습을 바꿨다. 중년의 여인. 어제 거쳐 왔던 도시에서도 한 차례 보여주었던 모습이었다.
“우리 역할은 어제랑 똑같은 거다, 알았지? 나는 귀족 자제를 돌보는 선생이고, 너는 마부고.”
“저는 마부고, 티나 님은 선생이고.”
그렇게 말하며 쿠제는 슬쩍 덧창을 열어 뒤편 루빈을 살폈다. 울퉁불퉁한 땅을 지나가느라 마차가 심하게 덜컹거릴 때에도 루빈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내면의 수련이라고? 가상의 적을 만들어내서 싸움의 양상을 연구하는 건가.
루빈이 옛 대장군과 연결되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쿠제는 그 정도로만 짐작할 뿐이었다.
“도련님, 이제 마을로 들어섰습니다.”
쿠제의 말에 루빈이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고 나서 처음 한 행동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조금 전까지 내면의 수련장에서 목검에 입혔던 브리온 오러. 그 대단한 위력에 루빈은 자신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내었다.
“…놀랍군.”
“예? 뭐라고 하셨나요?”
“아냐. 혼잣말이었어.”
“루빈, 일단 우리 배고픈 것부터 해결해야겠지?”
마침 정면으로 숙박과 식사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작은 숙소가 나왔다. 이 주변에서는 가장 말끔한 건물로 보였다. 건물 공터에 마차와 말을 놓을 곳도 있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에서 밤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쿠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티나가 앞 좌석에서 후다닥 내려왔고… 이윽고 루빈도 마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루빈은 숙소로 정한 건물로 곧장 들어가지 고 입술을 내민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피라미인가?”
* * *
“대장님. 새로운 물건이 들어왔습니다.”
네키아빌 외곽, 수풀에 파묻힌 폐건물 속. 먼지를 뒤집어쓰며 시간을 죽치고 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뭐? 새로운 물건이라고?”
“네. 방금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상태는?”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양쪽으로 한 번씩 꺾었다. 두두두둑.
“귀족 자제인 것 같은데요?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이고, 마부하고 개인교사하고만 움직이고 있답니다.”
“나들이라도 갔다가 돌아가는 길인가? 어쨌든 돈값 좀 나가게 생겼다는 거지?”
“정확히 어느 귀족 자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렇게 보여요. 그리고 지금 저희가 이것저것 가릴 상황은 아니니까…….”
대장이 눈을 부릅뜨고 인상을 구겼다. 부하가 찔끔거리면서 입을 다물었다.
데커스는 자존심이 강한 자였다. 지금은 마을에 들르는 운 안 좋은 귀족 가문이나 상인들을 상대로 돈을 뜯는 신세가 되긴 했어도, 절대로 그 스스로를 무뢰배라 여기지 않았다.
‘도약을 위해 잠시 움츠렸을 뿐이지.’
데커스는 옆에 놓인 장검 한 자루를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부하 앞쪽으로 내밀고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보, 보이느냐! 이게 바로 오러란 거다, 이 자식아!”
“여, 역시 대단하십니다.”
데커스가 힘겹게 발현하는 오러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부하는 그를 치켜세우기 바빴다.
“후우… 후우…. 그, 그래서 지금 그 ‘물건’은 어디에 있는데?”
“빤하지 않습니까. 이 조그마한 마을에 외부인이 머무를 땐 거기뿐이죠.”
“그렇다면 형님도 움직이셨겠군.”
“네. 대장님만 준비되면, 맨커스 님도 곧장 일을 시작하겠다 하십니다.”
“좋아, 좋다! 부디 돈 좀 있는 자제여야 할 텐데.”
데커스가 몸을 들썩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팔이 얼얼했다. 역시 오러란 하루에 한 번 발현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제가 봤을 땐, 돈이 아주 없는 가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개인교사라는 괄괄한 여자가 말이죠, 주점 영감탱이랑 내기를 하면서 돈을 신나게 꼬라박고 있었지 말입니다.”
“주점 영감탱이랑 내기라면, 달팽이 경주?”
“네. 개인교사라는 여자가 그렇게 돈을 써대는 거 보면, 딱 집안 수준 나오지 않습니까?”
“좋아! 좋다구! 마을에 있는 애들한테 바로 시작하라고 해! 나도 자리를 옮겨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대장님!”
얼굴에 헤벌쭉 미소를 달고 바깥으로 나가는 부하. 부하의 기대감 넘치는 뜀박질 소리를 듣고 있던 데커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은 애들이 그 꼬마 놈을 슬쩍해 오면, 난 기다리고 있다가 오러를 보여준다.’
다음 장소는 여기서 30분은 더 들어가야 하는 숲속의 동굴.
데커스는 그동안 일거리가 없어 한동안 쓰이지 않았던 이곳 상태를 살폈다.
벽면에 고정해 둔 횃대에 불을 붙이자, 제법 도적떼가 머무를 법한 분위기가 났다. 커다란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장검에 머리를 기댄 채 기다린 지 30분.
‘왔군.’
드디어 수풀을 헤치며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부하들 중 덩치가 큰 놈이 자루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나머지 놈들이 낄낄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대장님!”
목소리를 높이는 걸 보니 꼬마 녀석을 확실히 잠재웠나 보군.
“꼬마 놈은 재운 거냐?”
“그럼요. 오우거도 곯아떨어지게 할 만한 마취가루를 들어부었는데요.”
“그러다 죽는 거 아냐? 맨커스 형님이 돈을 받기 전까지 죽으면 안 된단 말이다!”
부하들이 동굴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한쪽 구석에 자루를 내려놓았다.
“이놈 보호자는?”
“여자는 우리가 애를 슬쩍 데려올 때까지도 달팽이 경주에 완전히 정신 팔려 있던데요. 마부 놈은 그 여자를 말리기 바쁘고.”
“그래? 이상한 놈들이네.”
그러자 데커스의 머릿속에 불안한 상상이 피어났다. 최근에 일거리가 없어 부하 놈들의 감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부하 놈들이 귀족도 아닌 뜨내기들을 귀족이라고 착각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인질극이고 연극이고 모두 소용 없어진다.
데커스는 서둘러서 자루 쪽으로 다가가 그걸 펼쳐보았다.
“뭐, 뭐야!”
“대장님, 왜요?”
“아무것도 없잖아, 이 새끼들아!”
데커스가 소리치며 돌아섰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 조금 전에 분명히 내려놓았는…….”
데커스는 부하의 대답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순간 멀쩡히 서 있던 다섯 놈이 거의 동시에 픽픽 고꾸라졌기 때문이다.
철퍼덕 소리를 연달아 내며 바닥에 쓰러진 부하들은 처음엔 무슨 상황인지도 몰랐다.
서걱. 서걱.
끔찍한 소리와 동시에 시뻘건 피가 파파밧 분출하여 땅바닥을 때렸다. 그들은 그제야 그게 자신들의 발이 잘려 나가면서 쏟아지는 피라는 걸 알아차렸다.
“끄아아아아악!”
“내 바, 내… 발? 내 바아아알!”
고통에 차서 내뱉는 소리침. 그리고 그 사이로 나지막하게 울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있었다.
“흠, 도적떼가 아니었나?”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은 데커스는 멀뚱히 서 있는 남자아이를 보았다. 피로 적셔진 땅바닥에 홀로 서 있는 남자아이를.
검은 머리에 묻은 먼지를 아무렇지 않게 털어내던 아이가, 데커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넌 뭐 하는 놈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