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45화 (45/258)

제45화. 화운석 (1)

얀 플로니카. 아니, 얀 세빌론이라는 본명을 숨긴 남자.

루빈은 얀의 흩날리는 은발과 그의 자주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훗날 얀의 상징이 되는, 목의 선명한 상흔으로 내려갔다.

‘얀을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그때 루빈의 당혹스러움을 알아차린 하네케가 나섰다.

-얀? 저 청년이 누구인가?

11년 전, 죽음을 맞이한 하네케라면 얀을 모르는 게 당연할 수밖에.

‘제가 서른 살이 되는 해, 릴리크 제국은 텔마흐의 명령 아래 암살검가를 토벌하게 됩니다.’

‘말살’이란 목적 아래, 온 제국의 힘이 암살검게에게로 집중되는 바로 그 무렵이었다.

제국의 남쪽 지방에서 한 반란 세력이 등장했다. 폭풍 같은 기세였다. 당장이라도 제국을 무너뜨릴 것처럼.

-반란이라니? 저자가 훗날 반란 지도자란 뜻인가?

‘얀은 ‘반란’이라 불리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징벌. 얀은 자신들이 일으키는 전쟁을 징벌이라고 칭했다. 황제 텔마흐가 저지른 죄를 벌하겠다는 뜻이었다.

-징벌이라?

‘하네케, 저자는 세빌론 왕국의 후계자입니다.’

그 말에 하네케의 얼굴에 놀라움이 배어났다. 루빈이 예상했던 만큼의 놀라움이었다.

릴리크 제국이 완성된 지 100년.

거의 모든 역사서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거나 더럽혀졌지만, 본래 세빌론은 릴리크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제국 완성에 가장 앞섰던 왕국이었다.

주종의 관계였던 세빌론과 릴리크. 속국이었던 릴리크가 역사를 가르는 배신을 하면서 텔마흐와 얀의 운명도 뒤바뀐 것이었다.

-저자가 세빌론 왕가의 핏줄이라고?

하네케는 아직도 루빈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회귀 전 루빈 또한 그랬다. 오래전 멸문한 줄 알았던 세빌론 왕가의 후계자가 나타나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제국이 완성된 뒤로 세빌론 왕가의 흔적은 아주 빠르게 지워져 갔다.

왕족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복종했거나 관계되어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끝나지 않는 숙청이었다. 초대 황제에서 시작됐고, 수 대에 걸쳐 텔마흐에게 이를 때까지. 살육은 계속 이어졌다.

그 모든 과정은 갖가지 거짓 명분에 가려졌다. 제국군의 병사들과 유서 깊은 검술가문들이 정의를 기치로 내세워 세빌론 잔당을 찾아냈고, 죽여 나갔다.

‘제국군만이 아니었죠. 제국 건국 초창기엔 암살검가의 암살자들도 세빌론 잔당을 처치하는 임무를 꾸준히 수행했으니까요.’

회귀 전, 루빈 또한 칙명부에서 내려온 세빌론과 관련한 임무를 여러 번 처리했었다.

하지만.

‘은발의 반란자’ 얀이 출현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제국 곳곳에서 그를 비호하는 세력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얀이 내건 깃발 아래 모여들어 텔마흐에게 대항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나?

대륙의 판도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한 하네케가 재촉했다.

‘만약 얀이 텔마흐를 무찌르고 새로운 황제가 됐다면, ‘은발의 반란자’가 아닌 ‘징벌자’로 기록됐겠죠. 저 또한 복수를 꿈꾸지 않았을 거고요.’

릴리크 제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제국 수도 근처까지 빠르게 북상했던 얀의 세력은 결국 텔마흐에 의해 처참히 진압되었다. 전해 듣기로는 얀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했다.

‘저와 비슷한 시기에 얀도 죽었습니다. 저처럼 텔마흐의 손에 직접 죽지는 않았겠지만.’

루빈은 하네케에게 나지막한 말을 남기곤, 그걸로 내면의 대화를 일단 끝맺었다.

“…….”

눈앞에 서 있는 얀.

그는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루빈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곤 불쑥 손을 내민다. 먼 훗날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낼 세빌론의 계승자가 루빈을 향해 악수를 청해왔다.

“포이넨 가문이라? 이 근방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가문인데.”

루빈과 얀의 짤막한 악수 이후. 얀은 플로니카 가문의 공자답게, 자신들 지역을 통행하는 낯선 자들에게 의심을 드러냈다.

현재 플로니카 가문은 리혼 왕국에 속한 약소 가문. 위세가 미약할지라도 엄연히 이 지역을 책임지고 있었다.

“저 역시 플로니카 가문은 처음 듣습니다만.”

루빈은 플로니카 가문의 미약한 명성을 짚어내며 얀의 반응을 살폈다.

“플로니카 가문은 리혼 왕국의 유서 깊은 가문입니다. 제국에 비해 왕국의 영토가 넓지 않아 널리 알려져 있진 않지만, 독자적인 검술로 기사단의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죠.”

얀을 대신하여 발끈하듯 나선 건 기사단장 실로스였다. 약소 가문이긴 해도 기사단의 단장에 올라선 자라면 품을 만한 자긍심이 느껴졌다.

“자, 그러면 이번엔 포이넨 가문에 대해서 소개해주시겠습니까?”

얀은 여전히 루빈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호위도 없이 마차로 이동하는 어린아이라니?

“쿠제. 플로니카의 공자께 통행증을 꺼내 보여드려라.”

“예, 도련님.”

루빈의 말에 마부 역할 중인 쿠제가 겉옷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윽고 그 손에 통행증 하나가 들려 나왔다.

얀은 루빈을 지나쳐 쿠제에게 다가가 통행증을 받아 들었다.

“제국통행증이라. 보기 드문 통행증이군요.”

루빈의 가명으로 발행된 이 통행증은 본가에서 제공한 것이었다.

이 제국통행증은 최상위 통행증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릴리크 황족이나 각국 왕족들 전용 출입 구간을 제외한 모든 통행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 즉, 제국 어디에서든 귀족가나 명문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루빈은 얀이 검의 손잡이 부근을 만지작거리는 걸 알아차렸다.

‘역시 제국통행증만으로는 못 믿겠다는 건가?’

아니나 다를까, 얀은 쿠제 옆으로 돌아가더니, 마차 쪽으로 접근했다.

“그래도 마차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의례적인 절차로 생각해 주시지요.”

얀은 마차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폈다. 기사단원을 시켜도 좋을 일이었지만, 그 자신이 직접 확인해야만 마음이 편안한 성격으로 보였다.

이윽고 마차 외부를 모두 살핀 얀. 이번엔 마차 내부를 바라봤다.

“흐음, 고양이가 있군요.”

마차 내부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티나를 발견하고 하는 말이었다. 얀이 손을 뻗자, 티나는 못마땅한 듯 갸르르륵, 울었다.

그걸 보던 쿠제가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저, 공자님. 손대면 할퀼지도 모릅니다. 워낙 성격이 까칠한 고양이라서요.”

“아, 그런가?”

하악! 하악!

“보이시죠? 저 눈 좀 보십시오. 예사 눈빛이 아닙니다.”

그때였다. 결박되어 있던 맨커스가 고개를 쳐들어 마차 쪽을 쳐다봤다.

“도, 도련님! 고양이뿐입니까?”

스릉.

맨커스의 갑작스러운 발악에 실로스가 칼을 빼 들었다.

“가만있지 못하겠느냐?”

“아니,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단장님! 마차 안에 중년 여인은 없습니까?”

“…….”

일이 틀어지는 건가.

루빈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맨커스가 마을에서 미행을 시작했을 무렵, 마차에 올라탔던 티나는 고양이 모습이 아니었다.

“무슨 헛소리냐?”

“제가 이자들을 따라붙었을 땐, 중년 여인이 함께 타고 있었거든요. 정말입니다, 정말! 도련님, 단장님. 저,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실로스가 다가와 마차 내부를 살폈다. 당연히 중년 여인은 없었고, 그저 성깔 더러운 고양이가 짜증 가득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흐음…….”

루빈은 다시 한번 얀의 손이 허리춤의 검으로 내려가는 걸 바라보았다.

‘과연 얀이 저 말을 믿을까.’

맨커스는 포박당한 죄인에 불과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불명예도 감수할 종자. 거짓말은 밥 먹기보다 쉬울 것이다.

게다가 루빈 일행은 적법한 제국통행증까지 지녔지 않은가.

‘그런데도 저 검을 뽑을까?’

루빈의 결론은 ‘그렇다’였다. 황제의 추적을 피해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을지, 루빈은 가늠조차 하지 못한다.

항상 최악을 가정하며 살아왔을 터. 그렇다면 루빈 또한 최악을 가정해야 함이 옳다.

‘만약 이자들과 싸운다면.’

이제 의도치 않게 상황이 악화될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루빈은 머릿속으로 플로니카 기사들과 검을 겨누는 걸 그려보았다.

일반 기사들은 모두 2성의 경지. 이 정도라면 다섯 명이든 열 명이든 그 숫자는 문제없다.

단장 실로스는 3성과 4성 사이로 보였다. 그는 쿠제가 전담하면 무리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얀이었다.

‘쉽지 않겠어.’

얀의 경지가 정확하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적어도 4성 이상. 기사단장 실로스보다는 훨씬 앞서는 실력인 건 확실했다.

까다로운 싸움이 될 것이다. 이제 오러를 운용하기 시작한 루빈에 비해, 얀은 강력하고 견고한 오러라는 무기가 있었다.

‘신체적인 차이도 상쇄해야 해.’

아직 루빈의 신체는 완성에 이르지 못한 상태. 검술의 경지가 비슷하다 할지라도, 둘 사이에 존재하는 신체적 차이로 인해 루빈이 더 불리해질 것이다.

결국 백중세. 루빈은 얀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암연을 써야 하나.’

그럼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무리 세빌론의 후계자라 할지라도 암연에 대한 대비까지 되어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대비는커녕 뭔지도 모를 것이다.

루빈은 얀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면서 싸움의 양상을 끊임없이 예측했다. 매 걸음마다 파생되는 수십 가지 싸움의 양상들이 머릿속에서 펼쳐진다.

‘저자가 4성이라면…….’

‘저자가 5성이라면…….’

왼쪽 방향으로 선공하는 것과 오른쪽 방향으로 후공하는 모든 시나리오. 그 어떤 경우에도 루빈 자신이 패배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얀 앞에 섰을 때.

심지어는 상대방에게서 틈이 엿보이기까지 했으나, 루빈은 그 어떤 공격도 펼치지 않았다. 문득 떠오른 루빈만의 신념 때문이다.

‘적의 적은 아군이지.’

세빌론의 후계자 얀.

또는 텔마흐를 죽이고 싶어 하는 자, 얀. 루빈은 그가 대륙에 새로운 파란을 몰고 오리라는 걸 알고 있다.

당장은 작은 소용돌이지만, 얀이라는 거대한 폭풍은 언젠가 텔마흐에게 일격을 가할 수도 있었다.

그런 가능성을 지금 여기서 없앨 수는 없었다.

‘얀이 황제란 목표를 가졌다 해도 상관없어.’

텔마흐를 향한 복수만 이뤄진다면 그 이후의 일들은 루빈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니까.

실로스가 침묵을 깨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어댔다.

“맨커스, 지금 맹세라고 했느냐? 가문의 검술을 고작 도적질 따위에나 쓰는 네놈들 입에서 맹세라는 단어가 나오다니.”

“고, 공자님! 단장님! 부디 제 말 좀 들어보십시오!”

계속되는 발악에 얀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저 꼬맹이 일행은 수상한 놈들입니다. 간밤에 제 동생이 당했단 말입니다! 그것도 아주 감쪽같이 말이죠.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닐 겁니다. 다른 놈들이 있을 수도 있단 말이에요!”

“끝까지 그 더러운 혀를 놀리는구나.”

당장 이 자리에서 맨커스의 목숨을 거두고 싶은지, 실로스가 검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 꼬마애도 그렇고, 저 마부도 그렇고, 다 수상한 놈들입니다! 뭔가를 염탐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지도 모른다니까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계속 부르짖는 맨커스.

그런데 그때, 얀이 직접 움직였다. 성큼성큼 걸어가 실로스가 들고 있던 검을 빼앗더니, 순식간에 검궤를 그린다.

사악.

단 한 번의 궤.

암연으로 시각을 증폭시킨 루빈은 검이 맨커스의 가슴팍을 그어버릴 때, 순간적으로 검신이 선명한 자줏빛으로 감싸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자줏빛 오러라.’

아무래도 플로니카 가문 고유의 오러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다섯 겹이었으니 5성이라는 뜻.

-저 나이에 5성이라. 상당한 재능이야. 플로니카 가문이라고 했나? 언뜻 보아도 견고한 오러로구만.

하네케의 중얼거림 위로, 얀의 나직한 목소리가 얹어졌다.

“역겨워서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군.”

그리곤 루빈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흉흉한 모습을 보여 미안합니다, 루든 공자. 아무리 기사단에서 쫓겨난 놈이라지만, 더 놔뒀다간 가문의 명예를 바닥에 처박아 놓을 것 같았습니다.”

얀의 양해를 받아주며, 루빈은 혐오스러운 장면을 못 견디는 사람인 양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저 사람, 지금 죽은 건가요?”

루빈이 보이는 나약한 모습이 연기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얀은 부드럽게 웃었다. 조그맣게 남아있던 의심마저 싹 사라진 것 같았다.

‘은발의 반란자, 얀. 평생 추적당하며 살아 생존에 집착하는 정신병자가 되었다더니. 다 헛소문이었나 보군.’

전생에 전해 들었던 소문과는 많이 달랐다. 그중 들어맞는 것은 딱 하나뿐, 바로 그의 오러 경지였다. 정확히는 몰라도 죽기 전 6성이 되었을 터.

“그럼, 저희는 이제 여행을 계속해도 괜찮겠습니까?”

휘하의 기사들이 매커스의 시체를 수습하는 사이, 쿠제가 공손하게 물었다.

얀은 고양이 티나를 슬쩍 쳐다보곤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통행증을 지닌 귀족의 여행을 아무 이유 없이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음에 플로니카 영지에 오시게 된다면, 부담 없이 저희 저택을 방문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씁쓸한 장면을 씻어내 드리죠.”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루빈과 얀은 서로를 바라보며 인사했다.

그 자리를 먼저 뜬 건 얀과 기사들이었다. 멀어지는 그들 일행을 바라보던 루빈은 마차에 올라탔다.

“하마터면 귀찮은 일이 생길 뻔했습니다. 도련님, 저희도 출발할까요?”

“…….”

루빈은 얀과 그가 보여준 오러의 경지를 떠올렸다. 짧은 마주침. 훗날 어떻게 다시 만날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잠깐.”

“예? 무슨 일이라도?”

냐아옹.

티나도 무슨 일이냐는 듯 앞발로 얼굴을 부비며 울어댔다.

‘얀의 본거지가 이 근방이라고 했지…….’

루빈은 전생의 기억을 헤집었다. 깊이 잠겨 있던 수십 겹의 기억 중 일부가 연쇄적으로 점화되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놓칠 뻔한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그럼 어쩌면 ‘화운석’도 이 근처에?’

루빈은 계획을 변경하기로 했다.

“시간을 좀 더 써도 될 거 같아. 근방의 마을에서 일단 새로 숙소를 잡자.”

나아아옹?

“…도련님,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은데요. 괜찮을까요?”

괜찮다마다.

오히려 나중에 깨달았더라면 두고두고 후회할 기회가 통째로 굴러들어온 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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