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화운석 (3)
다음 날.
티나는 곧바로 길리필드 수목원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사실, 준비랄 것도 별로 없긴 했다.
로이네크로우로 변신한 상태에서도 잘 둘러맬 수 있는 주머니를 착용하고, 그 안에 화운석을 집어넣으면 끝이었으니까.
“그럼 톨로이스 경매장에서 만나는 거다?”
한적한 공터. 루빈의 마차가 세워져 있었고, 로이네크로우 티나는 부리를 여기저기 휘저으며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심고 나서 꼭 확인해. 화운석을 잡아당겨도 쉽게 들리지 않는지. 그러면 제대로 심겨진 거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 그거야 뭐 간단하지!”
“…괜찮을까요, 도련님?”
쿠제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 말이 내포하는 뜻은 환혈족인 티나를 그냥 이렇게 혼자 보내도 되느냐는 것이었다. 즉, 티나 자체를 믿을 수 있느냐는 거다.
루빈은 제대로 알아들었지만, 정작 티나는 자신을 걱정하는 말로 착각했다.
“이봐, 쿠제! 누나 걱정해주는 건 좋은데, 너까지 자꾸 나 무시하면 섭하다?”
“…….”
“하늘로 이동하면 얼마나 안전한지 아니? 척살조 같이 지독한 놈들만 아니면 문제가 없다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랑버드를 제외하고는, 하늘에서 로이네크로우를 위협한 만한 괴수는 없다.
로이네크로우가 지닌 암연도 같은 군집끼리 거대한 사슬처럼 서로 연계되어 있기에, 오히려 다른 괴수들이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티나, 뜸 들이지 말고 출발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제때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톨로이스 경매장에 들어오면 그때부턴 내가 일러둔 대로 행동하고.”
티나는 대답 대신 경례를 붙이듯 커다란 날개를 쓱쓱 움직였다. 그다음, 날개를 힘차게 움직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윽고 작은 점이 되어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티나.
“우리도 가자.”
“정말 톨로이스로 가실 겁니까?”
그렇게 물은 쿠제는 뭔가를 떠올리곤 다시 말했다.
“저희의 최종 목적지가 톨로이스 경매장이라면, 일단 경매장 입장권부터 구해야겠군요. 입장권은 시기별로 다르니까, 지금 이 계절에는…….”
“이맘때는 트롤의 피야.”
하려던 말이 바로 그것이었기에, 쿠제는 살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가는 톨로이스 경매장에 대해서도 가르치나? 그런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했다.
‘하긴,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경매장이니까. 도련님이 알 수도 있겠지. 예전엔 한동안 서고에만 계셨으니까 거기서 보신 걸지도.’
톨로이스 경매장은 일반적인 경매장과는 궤를 달리한다. 상업적으로 부흥한 도시들마다 경매장을 품고 있다지만, 이곳은 반대의 경우였다.
경매장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됐다고 할까.
아닌 게 아니라, 릴리크 제국이 완성된 뒤에도 톨로이스 경매장은 온전했다. 황실이 경매장이 전란시대 때부터 이어온 방식을 허가해준 것이다.
다만, 경매장의 수입 일부분을 제국에 헌납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트롤부터 사냥해야겠군요. 마침 이 부근에 괴수 서식지가 있습니다. 밤이 되면 트롤들이 움직일 겁니다.”
쿠제가 지도를 펼쳐보며 말했다. 루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하겠습니다, 도련님.”
“응.”
마차가 터덜터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을까.
루빈은 들이치는 햇빛 아래 책을 두고 독서 중이었는데, 마부석과 탑승석 사이의 창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도련님.”
“음?”
“티나 님이 정말로 톨로이스 경매장으로 돌아올까요? 아무리 보석을 좋아한다지만.”
루빈은 읽고 있던 책을 탁 덮었다.
티나를 향한 쿠제의 불신과 불안. 생각해보니 그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름 아닌 환혈족이지 않던가. 게다가 지금처럼 혼자 활동하게 놔두었으니 더욱 불안하겠지.
“티나가 도망갔을 거라면, 진작 그렇게 했을 거야.”
“예?”
“티나는 지난 2년 동안 길리필드 수목원에서 자유로웠거든.”
루빈에게 환혈족의 변신을 알아볼 수 있는 하네케의 눈이 있다지만, 그건 티나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가 아니었다. 족쇄라 할 만한 건, 오히려 루빈과의 약속이겠지.
2년 뒤에 찾아오겠다는 그 약속.
티나에게 신뢰란, 거세게 흘러가는 강물과 같았다. 어느 순간 그 안에 빠져들면 헤어 나오기 힘든 것이다.
오히려 그 물살에 온몸을 내맡기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믿음을 끝까지 손에 쥐려는 부류. 그게 바로 티나였다.
그런 그녀가 루빈을 배신할 리 없었다.
‘다만.’
루빈의 눈길이 쿠제에게 향했다. 쿠제는 또 다른 부류라 해야겠지. 그에게 신뢰를 얻는 방식은 티나와는 완전히 다를 터.
‘내 계획을 털어놓아야겠지. 그것만이 쿠제의 충성을 살 수 있는 방법이야.’
마침 잘 됐다. 이 부근의 트롤은 그 특유의 습성에 따라 자정이 지나야 활동하기 시작할 테니, 그때까지 이야기할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 * *
한밤.
“근방에 트롤의 서식지가 있는 것 같군요.”
마차를 수풀 속에 숨겨두고, 밀림에 들어선 지 한 시간째였다.
수풀을 헤치며 나아가던 루빈과 쿠제 앞에 트롤들의 흔적이 나타났다. 수풀을 헝클어뜨리고 남은 트롤의 족적과 체취였다.
하지만 놈들이 이쪽으로 몰려들려면, 자정이 지나야 했다.
“쿠제, 모닥불을 피우고 기다리자.”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밀림 한가운데서 불을 피우는 건 괴수나 맹수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뿐이지만, 두 사람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넓게 펼쳐놓은 암연이 일종의 영역 표시 역할을 해주었다. 공격 본능이 없는 미약한 동물들은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암연의 경계 안을 돌아다니겠지만 괴수들은 달랐다.
괴수들은 암연으로 둘러놓은 경계 때문에 본능적인 공포에 빠져 접근하지 못했다.
“…….”
타닥타닥.
장작이 타올랐다. 주홍빛으로 물든 두 얼굴. 루빈이 타오르는 불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쿠제가 헛기침을 하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도련님. 이게 기우일 수도 있지만…….”
쿠제로서는 해야만 하는 이야기이리라.
뜸을 들이는 그 태도에 루빈이 해줄 수 있는 건, 부담을 덜어주는 것뿐이었다.
“편하게 말해, 쿠제.”
“저, 티나 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티나였다.
“로이네크로우로 환혈족을 선택한 도련님의 결정이 가볍지 않으리라는 건 압니다만… 그래도 저로선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니, 솔직하게 걱정이 적지 않습니다.”
루빈은 막대기를 쥐고 앞에 놓인 장작을 헤집었다. 불씨가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뭘 걱정하는지 알아. 환혈족을 멸족시킨 사람이 바로 황제이기 때문이겠지.”
쿠제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검가가 환혈족을 살려두었을 뿐만 아니라, 암살자로 양성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러면 황제가 배신감을 느낄까?”
“배신감, 어쩌면 그럴지도…….”
루빈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쿠제, 황제는 암살검가를 믿지 않아. 그러니 배신감 같은 것도 느끼지 않겠지.”
“네?”
쿠제가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황제가 그리는 미래엔 암살검가의 자리가 없다는 말이야. 분명히.”
그 순간 쿠제는 루빈의 말 속에 담긴 분노를 느꼈다. 이게 열한 살이 품을 수 있는 분노인가? 활활 타오르다 못해 이제는 잉걸불이 된 것 같았다.
“쿠제.”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 그 위에 내려앉는 나직한 목소리.
암살검가가 무너지는 그 광경을, 자신의 죽음을, 회귀로 얻은 삶의 목적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언젠가 쿠제나 티나에게도 모든 걸 밝힐 수 있는 때가 오겠지.
그래도 루빈은 지금 이 대화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확실히 알았다.
바로, 쿠제의 마음을 얻어내는 것.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황제에게 충성하는 그런 암살자가 아니야. 태어났을 때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그딴 일은 없을 거야.”
정확하게는, ‘다시’ 태어났을 때부터였지만.
티나에 대한 우려 때문에 시작된 대화가 전혀 예상치 못한 궤적으로 이어지자 쿠제는 당황했다.
황제를 향해 숨겨왔던 불온한 복심이라니!
물론 모든 암살자가 황제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건 아니다. 암살자들이, 방계 가문이 충성하는 대상은 암살검가이자 암연 그 자체였다. 더 나아가자면, 암살자들은 그들의 ‘뿌리’를 숭배했다
그러나 그중 어느 누구도 황제를 두고 불온한 복심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심지어 그게 암살검가의 기원이라는 로이넨 혈통의 막내아들이라면, 더더욱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때, 루빈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나는 가주가 될 거야, 쿠제.”
암살검가의 가주. 그건 로이넨 혈통으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가져볼 수 있는 꿈이었다. 본가의 혈통으로서 가질 만한 당연한 포부였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암살검가의 가주가 되는 목적은 단 하나. 이제는 암살검가와 황제 사이의 끈을 끊어내기 위해서야.”
“……!”
쿠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암살검가가 제국에 편입된 지 200여 년.
50여 년 전부터는 황가와 암살검가 사이의 뒤섞인 혼사로 인해 그 관계가 더욱 복잡하고 긴밀해졌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텔마흐 황제와 지금 로이넨 가주가 이복남매라는 사실.
물론 이것은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쿠제 역시 여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빼놓고 보더라도 지금 루빈의 말은 충격으로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루빈이 계획하는 미래. 그 미래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으니까.
바로 반역자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어째서 티나를 로이네크로우로 선택했는지, 이제 알겠지?”
“저를 로이넨서로 선택한 이유도… 설마 황제를 향한……?”
“내가 말했지. 네 머릿속에 간직한 독창적인 암연 활용법, 내가 그걸 실현해 주겠다고 말한 것 말야. 네가 창안한 방식은 모든 암살자들의 무기가 될 거야.”
그리고 한마디 더.
“황제를 겨눌 무기가.”
타닥타닥.
두 사람의 짧은 침묵 위로 모닥불 소리가 가볍게 튄다.
지금 쿠제의 머릿속에는, 그가 루빈의 로이넨서로 발탁되기 전까지 보냈던 처참한 생활이 떠오르고 있었다.
크로키슨 가문의 가신으로 지내면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모욕적인 삶들. 온갖 멸시의 순간들.
쿠제가 지닌 독창성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저 조롱거리에 그쳤다. 괄시와 조롱의 나날이 오랫동안 이어졌기에 그런 장면들을 하나씩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도 않았다.
그때는, 그저 그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삶의 목표였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나?
“쿠제. 황제가 두렵다면, 나를 떠나도 좋다. 말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 너의 새로운 앞날을 위해 기꺼이 도와주지. 원한다면 로이넨서의 임무에서도 벗어나도록…….”
“아닙니다, 도련님.”
쿠제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루빈에 대한 걱정과 의구심이 뒤섞였던 마음이 한결 정돈되었다. 이제 그 눈빛에 서린 건, 능력을 알아주는 주인에 대한 확신이었다.
쿠제와 같이, 인위적 암연을 이식받은 암살자의 숙명이란 단순했다.
암살검가에 귀속되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제국의 시민이 아닌 암살검가의 가신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전부인 셈이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던 것 같군요.”
루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성에 대한 맹세라느니, 어떤 의례적인 징표 같은 건 필요 없다.
자신에게 쿠제가 필요했듯이, 쿠제 역시도 자신이 필요했으리라는 건 이미 서로 알고 있었다.
단지 지금 이 순간, 그 믿음에 확신이 더해진 것뿐.
“나에 대한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면, 언제든 말해. 진심이야.”
쿠제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는 대답 대신, 막대기 하나를 들어 모닥불 불빛이 잘 비치는 바닥을 골랐다. 곧 그 위에 이러저러한 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자, 그럼-”
“새로운 이론이라도 떠올랐어?”
바닥에 다소 어지럽게 여러 수식을 그려 나가는 쿠제. 그걸 본 루빈의 얼굴에도 오랜만에 미소가 떠올랐다.
“제가 고안한 수십 가지 이론 중 하나인데요…….”
쿠제가 진심으로 열의를 드러내는 시간이 왔다.
그러고 보니, 로이넨 저택에서 여정을 출발하고 나서부터 계속 이어진 잡다한 상황들 때문에 쿠제는 자기만의 암연 이론을 개진하지 못했다.
“우선은 암연을… 바닥 표면을 기점으로, 원형으로 잡고…….”
“이다음이 중요한데요, 여기서 암연의 형태를 도련님을 중심으로 반구형으로 변형시킬 수만 있다면…….”
“마지막으로 반구형의 암연으로 막 형성이 순조롭게 유지되려면, 제 예상으로는 일정한 밀도의…….”
모닥불 앞.
새로운 암연 운용법을 구상하는 남자와, 그걸 실제로 실현할 능력을 갖춘 소년 사이의 고요한 대화가 이어진다.
루빈은 진지한 태도로 쿠제의 가설과 이론을 하나씩 가슴에 새겼다.
이 순간만큼은 도련님과 로이넨서가 아닌, 말 그대로의 동료, 전우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