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잿빛항구의 남매 (2)
“마치 전부 다 개점휴업 중인 것 같군요.”
역시 부두는 한산했다. 쿠제가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둘러봐도 마찬가지였다.
붉은 달이 떠오르는 시기인데다, 잿빛항구는 항로상 곧장 잿빛해협으로 이어졌다. 광폭하기로는 제국 내에서 최고인 곳이 바로 잿빛해협이었다.
깡! 깡!
프스으으! 프스으으!
배를 건조하기 위해 작업이 한창인 항만은 열기와 분주함으로 가득한 반면, 맞은편 부두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달의 붉은색이 사라지는 일주일 이후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일단 중개인부터 구해보겠습니다.”
“중개인?”
티나가 궁금해하자, 쿠제가 간략히 설명했다.
“이곳 잿빛항구에만 있는 독특한 관습입니다. 탈 배를 구하려면, 평민이든 귀족이든 중개인을 거쳐야 하죠.”
잿빛항구는 제국 각지의 배들이 모이는 대형항구. 쉴 새 없이 온갖 물류와 승객들이 드나드는 곳에서 개인이 배표를 구하러 다닌다면, 그것만큼 혼잡한 일도 없을 것이다.
이를 교통 정리하는 것이 중개인의 역할이었다. 여객선과 화물선, 심지어는 제국군함까지. 조건만 맞는다면 중개인을 통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루빈이 잿빛항구에 온 목적은 ‘블루캣 호’를 타기 위함이었지만, 일단은 쿠제가 하는 대로 놔두었다. 절차상 필요한 일이기도 했고.
“이런, 하필 이런 시기에 배를 구하신다니, 거참.”
중개인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루빈과 쿠제를 훑어본다.
돈이 될 만한 거래 자체가 드문 시기였으니 중개인 구하는 것부터 간단하지 않았다. 겨우 접선한 이 중개인의 약삭빠름은 노골적이기까지 했다.
“안 되겠습니까?”
“뭐, 안 되는 건 아니고. 살짝 웃돈이 들 거라는 말이지요.”
쿠제가 고개를 내저으며 중개인의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킬만한 금액을 건넸다. 찬찬히 금액을 확인하던 중개인이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그제야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럼 일단 함께 찾아보시지요. 공자님 한 분과 하인 하나. 이게 다입니까?”
“거기에 고양이 하나.”
루빈이 짤막하게 말했다.
“고양이? 고양이라면 더 힘들지. 뱃사람들이 불길하다고 난리 칠 텐데. 달도 붉은데 고양이까지 태운다고 하면, 차라리 헤엄쳐서 가라고 할걸요?”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순 없었다. 고양이는 티나가 가장 좋아하는 변신 동물인 데다가, 고양이의 습성상 어디론가 갑자기 숨어버리거나 괴상한 짓을 해도 의심을 벗기에 좋았다.
배는 한정된 공간. 탑승할 때 없던 생물체가 난데없이 생겨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고양이를 데리고 타는 설정이 훨씬 유리했다.
“아끼는 고양이라서요. 일단 배편이 확보된다면, 착수금의 두 배를 드리지요.”
뒤이은 제안에야 만족했는지, 중개인이 늘쩍지근하게 거리로 나섰다.
“아, 거참. 쉽지 않은데. 일단 기다려 보쇼.”
중개인이 첫 번째로 안내한 배편은 제국군함이었다. 수도로 복귀하는 군함에선 일부 객실을 여행객에게 내주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잿빛해협조차 간단히 횡단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함선이었지만, 티나와 제국군이 동승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긴 별로.”
루빈이 고개를 내저었다.
“진심이요? 제국통행증만 있으면 사실상 뱃삯도 안 드는데…….”
“다음.”
“쳇, 까다롭긴. 그럼 그 옆으로 갑시다.”
옆에는 엘프들의 순항선이 정박해 있었다.
제국함선 못지않은 거대한 크기. 거기에 승객들 대부분이 엘프들이었으니, 안전함에다 고결함까지 갖춘 배였다.
그들은 붉은 달의 불길함에도 개의치 않았다.
다만 문제는.
“이 순항선은 이인종(異人種) 전용이다. 인간의 탑승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도 저 냄새나는 오크 놈들보다는 여기 얌전한 승객분들이 낫지 않겠습니까?”
“오크가 어찌 이인종이지? 그건 괴수다, 인간. 그리고…….”
관리자 엘프는 투명하기 그지없는 눈동자로 뒤쪽에 서 있는 루빈과 쿠제를 번갈아 바라봤다.
“저들, 좀 거슬리는 기운을 품고 있군.”
“거슬리는 기운이라니요. 이래 보여도 이분들은 제국통행증을 지닌 신분이 보장된 분들입니다.”
결국 루빈이 중개인의 말을 잘랐다.
“됐다, 중개인 양반. 나도 내키지 않는군. 다음 배로 가지.”
“…….”
관리자 엘프는 루빈과 눈을 마주치는 내내 경계심을 드러내다가, 몸을 돌려 배의 내부로 들어가 버렸다.
‘거슬리는 기운이라…….’
암연을 완전히 숨기긴 했지만, 엘프들의 예민한 감각에 그 잔흔이 걸렸나 보다.
순항선이라면 배 위에서만 최소 6개월을 있어야 하는 긴 여정이고, 심지어 저런 엘프들과 함께라면, 그건 루빈 역시 달갑지 않았다.
“아니 고양이라고? 지금 이 사람이 미쳤나!”
이후부터는 거절의 연속이었다. 붉은 달 따위는 미신이라며 콧방귀 뀌던 어느 뱃사람은 그래도 고양이만은 안 된다면서 문전박대했다.
“제국통행증을 가지고 있다 해도 어린 승객은 사절이오.”
중개인 귀에다 이렇게 속삭이며 루빈을 훑어보는 뱃사람도 있었다.
온갖 미신들의 집합체였다. 그렇게 부두를 맴돌며 한나절을 보내 버렸다.
“일주일 뒤에는 배편이 훨씬 많아질 텐데. 그러지 말고 그날까지 기다려 보시죠, 공자님.”
이제는 지쳤는지 중개인이 슬슬 협상을 걸어왔다. 쿠제는 그를 째려보며 쏘아붙였다.
“아직 모든 배를 시도해 본 게 아니잖습니까.”
정작 목적이었던 ‘블루캣 호’를 아직 보지 못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인상을 찌푸리던 중개인은 이윽고 뭔가를 떠올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맞다! 두 분 모두 최종 행선지가 카포티니라고 하셨죠? 마법사들의 도시?”
“그렇습니다.”
“마침 항구에 포니아크호라는 배가 정박해 있는데 말이죠.”
“포니아크호?”
“우등객실에 카포티니 마법학교 생도들을 태운 고급스러운 배지요. 나머지 객실은 웃돈만 충분하다면 일반 여행자들도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검문소에서 마법사가 말했던 마법생도 전용 함선이라는 게 바로 포니아크호였던 모양이다.
“아마 이 정도 웃돈이면 가능할 것 같은뎁쇼.”
중개인은 포니아크호의 일반 객실에 탑승하기 위한 비용을 알려주었다. 쿠제가 어떻게 하겠냐는 얼굴로 루빈을 돌아봤다.
“내키지 않아.”
루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블루캣 호가 아니었으니까.
“하, 목적지가 딱 맞아떨어지는데, 어찌 그러시는지.”
못마땅한 중개인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지금 마법사들과 한배에 타는 건 위험해.’
카포티니에서 어떤 신분으로 위장하여 살아갈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두 사람이었다. 도착하기도 전에 그곳 마법생도들과 엮이는 건 위험요소가 많았다.
중개인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이젠 정말 배가 없습니다요.”
그때. 부두에 매여 있는 배들을 바라보던 루빈의 눈으로 한 척의 배가 들어왔다.
‘찾았다.’
“저 배는 뭐지?”
제국군함이나 엘프들의 순항선보다는 한참 작지만, 3층짜리 여관 건물 크기 정도는 되는 배였다. 아주 크다고는 할 수 없어도, 중거리 항해는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특이하게 생겼네요.”
쿠제가 솔직하게 말했다. 배의 선두가 일반 배와는 달리 넓적하게 동근 형태였다. 마치 고래의 주둥이 같았다.
“아, 저거요? 흠, 저건…….”
배를 슬쩍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려 버리는 중개인. 더 이야기해 봤자 손해라는 듯이 손을 휘젓는 그 모습에, 루빈은 호기심이 일었다.
“저건 뭐, 운항만 가능하다면 두 분을 카포티니까지 모셔다 드릴 만한 녀석이죠.”
“운항만 가능하다면?”
루빈이 물었지만, 중개인은 자기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게다가 뱃삯도 쌀 거고요. 고양이를 싫어하지도, 어린애를 문전박대하지도 않을 겁니다. 달이 붉은 거쯤은, 빨간 사과를 보듯 무심하게 생각하는 놈들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안전하고 값싼 배편이라는 거군요. 그럼 제격 아닙니까?”
“말했잖소, ‘운항만 가능하다면’이라고.”
“운항이 불가능한 이유가 뭡니까?”
중개인은 지겹다는 듯이 고개를 연거푸 내저었다.
“됐습니다. 저 배라면 그냥 맘을 접으십시오.”
“불가능한 이유를 알아야겠는데요. 저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요.”
“흠…….”
잠시 주저하던 중개인은, 검지를 들어 자기 귀에 갖다 댔다.
“이 소리, 들리시오?”
“소리?”
그러고 보니, 귓가에 아주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울리는 중이었다. 누구나 들을 수 있을 만큼 묵직한 소리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항만에서 배를 건조하는 소리인 줄만 알았는데.
쿵. 쿵. 쿵.
소리가 심상찮다.
루빈과 쿠제는 암연을 얇고 넓게 펼쳐, 감각을 극대화했다. 소리의 진원지를 정교하게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쿵. 쿵.
끊임없이 이어지는 소리.
‘이건…….’
부딪치는 두 주먹, 뒤엉키는 공격들.
틀림없이 치열한 격돌의 반향이었다.
루빈과 쿠제는 중개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부추겼다.
“싸움질이 한창인 소리요.”
“싸움이요? 배를 건조하는 작업이 아니고요?”
쿠제의 태연한 물음에, 그런 착각이 당연하다는 듯 중개인이 큭큭 웃어댔다.
“뭐, 그렇게 착각할 만도 하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 남매가 서로 뒤엉켜 주먹과 발길질을 주고받는 쌈박질 소리요.”
“남매가 싸움을요?”
그러기엔 소음이 너무 컸다. 누가 들어도 저건 통나무를 쓰러뜨리고 바위를 부수는 종류의 굉음이었다.
호기심이 더욱 일었다. 배를 구하는 것과 별개로, 대체 어떤 남매기에, 주먹질과 발길질만으로 이 정도의 울림을 내는 것인지.
“직접 보고 싶군요.”
“예, 예에?”
루빈은 곧장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향했다.
소리의 진원지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한쪽 공터. 대꾸도 없이 걸어가는 루빈의 모습에, 중개인이 화들짝 놀라며 뒤따랐다.
“공자님, 멈추세요! 구경 갔다가 화 당합니다.”
“괜찮아요. 멀리서 구경만 할 거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데, 왜 여기에 사람이 한 명도 없겠습니까? 구경하다 운 나쁘면 목숨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그런 거라고요.”
루빈은 중개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중개인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공터 주위를 감싸고 있는 기운부터가 벌써 차원이 달랐다. 싸움의 현장에 가까워질수록 거대한 울림 역시 그 크기를 더하는 중이었다.
쿠제도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리고 슬슬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때, 바로 앞에서 선명하게 들려오는 고함.
“포기 안 하냐!”
“냐? 냐아아? 누나한테 지금 ‘냐’라고 했냐? 넌 죽었다, 진짜.”
“미친!”
슝.
공터에 도달하기도 전이었지만, 루빈은 방금 전의 바람 소리가, 아슬아슬하게 급소를 비껴 나간 누군가의 주먹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소리만 들으면 주먹질이 아니라 공성 무기 수준인데.’
거기에 이어지는 사내의 반격도 어마어마한 살기를 품은 건 마찬가지.
이건 분명 서로 진심으로 죽이려 하는 사투다.
‘저들이 진짜 친남매라고?’
형제들 사이의 날 선 경쟁은 암살검가나 여타 가문들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실제 대련하며 중상을 입는 경우도 흔했으니.
하지만 그 광경을 여기 평화로운 항구 부두의 공터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뱃사람 친남매 사이에서 말이다.
게다가.
“몸집이 대체…….”
루빈이 공터에 들어섰을 때, 눈앞에선 두 거구의 남녀가 서로 뒤엉켜 살기 가득한 육탄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냥 거구가 아니다.’
신체 곳곳의 핏줄이 불룩 튀어나와 있다.
근육 역시 찢겨 나갈 것처럼 잔뜩 부풀었다. 몸뚱이 곳곳에선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둘이 얼마나 과열된 상태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저 거대한 몸집과 근육, 그리고 괴력까지.
루빈은 회귀 전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며, 진한 전율을 느꼈다.
“이 꼬맹이는 뭐냐?”
“이 꼬맹이는 뭐야.”
이윽고, 구경꾼이 있음을 알아차린 두 거혈족 남매가 루빈을 내려다보며 동시에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