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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검가 로이넨-56화 (56/258)

제56화. 위더스푼의 막내딸 (1)

“낮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와 와락 중에서 상속자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블루캣호는 출항할 수 없습니다, 공자님. 그게 저희 방식입니다.”

아늑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벅저벅.

거혈인 남매는 난간 쪽으로 걸어가는 루빈을 바라보았다. 붉은 달이 동반하는 거친 물결 덕분에, 루빈이 서 있는 모습이 불안하게 들쑥날쑥했다.

“아늑, 와락.”

덤덤한 눈빛으로 붉은 달을 쳐다보던 루빈은, 그 시선을 아늑과 와락에게로 옮겼다.

“네?”

“거혈족의 전통을 깨트릴 생각은 없어.”

“그렇다면 제때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던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야. 내일 당장 출항하지 않으면 이 배, 블루캣호는 주인을 잃을 수도 있거든.”

“…네?”

멀뚱멀뚱 쳐다보던 두 남매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투로 두 눈만 끔뻑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 배, 제국 소유가 될 거란 뜻이야.”

설명을 건너뛴 말이었지만, 주인을 잃고 제국 소유가 될 거라는 말만으로도 두 거혈인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읽어봐.”

“이게 뭔가요?”

“너희가 알아야 할 내용. 내가 표시한 부분만 봐도 좋아.”

루빈이 책 하나를 건넸다. 책 위쪽 모서리가 접혀 있었고, 중간 부분에는 줄이 그어진 문장들이 있었다.

-제국 법규에 따라, 죽은 거혈족의 유산은 자동적으로 자식에게 상속된다.

-상속자는 거혈족 전통에 따라 결정한다.

거혈족 전통이란, 승부를 보는 것이었다. 아늑과 와락처럼 격투로 승자를 정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가위바위보 같은 놀이에 불과한 승부일 수도 있다. 무슨 수단으로든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것이 바로 거혈족 전통이었다.

글을 다 읽은 아늑은 루빈을 쳐다봤다. 여전히 의문이 씻기지 않은 눈빛이었다.

확인해 보라는 부분을 읽어보았지만,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음 장에도 있어.”

아늑이 종이를 넘겼다. 중간 부분에 또 줄이 그어진 부분이 있었다.

아늑은 소리 내어 읽기 전에, 눈으로 먼저 읽어나갔다. 그녀 얼굴이 굳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

“누나, 뭔데 그래?”

남매 중 글을 읽을 줄 아는 건 아늑뿐. 와락은 영문을 몰라 누나와 루빈을 번갈아 쳐다봤다.

루빈이 그들 앞으로 나섰다.

“릴리크 제국의 법에 따르면, 너희들에게 자동으로 상속되는 재산은 ‘제국령 내 소유한 부동산’뿐이야.”

“부동산뿐이라고요? 그럼 저희 블루캣호는……?”

“당연히 몰수 대상이지. 너희의 재산이 아니라, 제국의 재산으로 환수되는 거다.”

“그게 무슨?”

“그래서 거혈인 중에 가축을 기르는 자들이 없는 거다. 그건 재산에 포함되지 않으니까.”

법령이 그러했다. 거혈인은 가축을 기를 수 없고, 마차를 소유할 수도 없다. 그리고 제국여단에 입대하지 않는 이상, 제국직할령을 벗어나지도 못한다. 오직 허가받은 한 도시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와락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공자님! 블루캣호는 시에서 저희 아버지의 재산으로 인정해 준 것입니다! 권리증서도 있다고요!”

“시장이 발급해 준 권리증서? 그런 건 아무 소용 없다. 시의 법은 제국법보다 우선될 수 없으니까.”

아늑과 와락의 표정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철석같이 믿고 있던 시장의 권리증서가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했다니.

“그럼 우린 어떡해야 하는데? 응?”

와락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추억이 자리 잡은 블루캣호를 빼앗겨야 한다니? 꼼짝없이 법의 구렁텅이에 빠진 신세였다.

해결책을 알지 못하는 건 아늑 역시 마찬가지. 간절한 눈빛으로 눈앞에 서 있는 공자를 바라보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해결책이 없는 건 아냐.”

“네?”

“정말인가요?”

“사실 간단한 문제지. 너희가 직접 신고를 하면 돼. 직접 필리몬드로 가서.”

“누나, 필리몬드가 어디였지?”

“잿빛항구에서 서북 방향에 있는 거대도시야.”

“아늑 말이 맞다. 거기엔 제국의 대법전이 안장되어 있지. 제국직할령이기도 하고. 출항만 한다면 당장 이 배로 갈 수도 있어.”

루빈이 덤덤하게 말해주었다. 거혈족 남매는 운이 좋다면 운이 좋은 경우였다. 하지만 여기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제국직할령을 벗어날 수 없는 신세잖아?”

거혈족인 이상, 자유의지로 직할령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법령.

뒤늦게 이 사실을 떠올린 와락의 얼굴이 또 구겨졌다. 살짝 비쳤던 희망이 난데없이 스러지는 것 같았다.

제국법에 의해 블루캣호의 소유권을 인정받으려면 필리몬드로 가야 하는데, 제국법 때문에 갈 수가 없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지금이라도 제국군에 입대해야 하나? 와락이 고민하던 차, 루빈이 실마리를 던졌다.

“방법이 하나 있다.”

“예?”

“잘 생각해 봐, 와락.”

루빈이 검지를 펼쳐 발을 디디고 있는 블루캣호를 가리켰다.

“너희는 제국 내 여행선을 운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거혈족이다. 아니, 내가 알기론 너희가 유일한 것 같군. 너흰 땅에 발붙이고 사는 다른 거혈족하고는 다르잖아.”

“그 말씀은……?”

“제국민을 태운 경우에 한해 제국령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게 너희에게만 적용되는 특권 아닌가?”

뒤늦게 깨달은 듯, 와락과 아늑의 얼굴이 점점 환해졌다.

맞는 말이었다. 단지 지금껏 사명처럼 여기며 무의식적으로 바닷일을 해왔기에 인지하지 못했을 뿐. 제국민 신분의 승객만 태우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무슨 수로 필리몬드로 가는 승객을 구해? 붉은 달 때문에 승객들 발길도 끊긴 마당에?”

“그건 걱정하지 마.”

조금 전 배로 향했던 루빈의 검지가 이번엔 그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 공자님은 카포티니로 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까짓거, 필리몬드에 잠깐 들렀다 가지, 뭐. 마침 거기서 볼일도 있고.”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아늑이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경직된 몸이 일순간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와락은 루빈에게 덥석 달려들어 그 손을 부여잡았다.

“감사합니다, 루든 공자님! 정말 감사해요!”

“서둘러야 할걸. 내가 알기로, 재산을 인정받으려면 120일 안에 신고해야 하거든.”

“아, 그럼 한… 20일쯤 남았네요. 걱정 없습니다! 전속력으로 가면 열흘 안에도 갈 수 있으니까요.”

그제야 루빈이 처음 나타나서 했던 말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제때 도착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은 필리몬드에서 재산으로 인정받기까지의 기한 때문에 했던 말이었다.

“바로 정비에 들어가도록 하죠. 날이 밝기 전에 출항할 수 있도록!”

“아늑, 이번만큼은 예외로 하는 거야. 공동 선장이라고.”

“좋아. 이번 한 번만이야.”

실타래 같던 문제가 깨끗이 해결됐다. 와락은 서둘렀다. 곧장 갑판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고, 내부로 들어가 툭탁툭탁 쿵쿵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침 저기 오는군.”

루빈이 부둣가의 저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두워진 길 위를 서둘러서 걸어오는 쿠제가 보였다.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끌려 나온 중개인이었다.

* * *

“안녕, 반가워! 넌 이름이 뭐야?”

루빈은 악수를 청하는 소녀의 손을 내려다볼 뿐, 응하지 않았다.

동승자가 생길 줄이야.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블루캣호에 다른 승객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난감하기는 거혈인 남매 역시 마찬가지였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중개인 아저씨가 하도 하소연을 하셔서…….”

“그리고… 최상위 신분증을 소지하신 분이랍니다.”

아늑과 와락이 번갈아 속삭였다. 최상위 신분증이라면, 제국통행증보다 두 단계나 높은 신분증이었다.

최상위 신분증보다 높은 건 없었다. 그 위는 오직 릴리크 황가 일족뿐.

그렇다는 건 눈앞에서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 이 여자애가 제국 어디에서도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가문의 일원이라는 뜻이었다.

“이 공녀님은 마법생도라고 합니다.”

심지어 마법생도라니. 십중팔구 돈 많은 가문의 철없는 딸내미겠지.

회귀 전에도 그런 일은 많았다. 거대한 부를 축적한 귀족이 최상위 신분증을 사들여 황족 행세를 하는 꼴 말이다.

루빈은 악수를 위해 내민 공녀의 손을 그대로 놔둔 채 머리를 긁적였다.

“너, 악수의 의미를 몰라? 나한테 무기가 없으니까 너도 무기가 없는지 확인하자는 뜻이잖아.”

루빈과 비슷한 또래였지만, 말투 하나하나에서 자신감이 넘쳤다. 명문귀족가의 마법생도라면 당연히 그렇겠지.

“치, 너 재미없는 애구나?”

소녀는 금세 루빈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의자에서 일어나 블루캣호의 키를 잡은 아늑에게로 걸어갔다.

“와, 나 이거 책에서 읽고 얼마나 궁금했는데!”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이 블루캣호 말이야, 엄청 유명한 거 알지? ‘제국함선열람서’에도 나와 있을 정도거든.”

블루캣호는 이제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저 귀족가 마법생도를 하선시키지 못한다는 건 자명해 보이니, 동승을 원하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내려야 했다.

“도련님, 어떻게 하죠?”

“좀 시끄럽긴 하겠지만, 필리몬드까지는 같이 가는 수밖에 없겠지.”

루빈의 결정이 떨어지자 쿠제가 군말 없이 배정받은 객실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쁘후우우우우우.

때마침 출항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항구에서 벗어난 블루캣호가 빠르게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간다.

“너, 블루캣호의 뿔나팔이 뭐로 만들어졌는지 아니? 바로 해저괴수 중 하나인 악토니아의 발톱이야. 당연히 악토니아는 알겠지? 아주 유명한 이야기인데 이걸 모르나 보네? 엄연히 말하면 발톱으로 만들어졌으니까, 뿔나팔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배 내부를 돌아다니던 금발 소녀가 또다시 루빈 맞은편에 앉더니, 신나게 지식을 뽐냈다.

루빈은 듣는 척 마는 척, 턱을 괸 상태로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때.

금발 소녀가 두 번째로 악수를 청했다. 서로 무기가 없다는 걸 꼭 확인해야 하나. 루빈은 귀찮은 듯 느릿하게 팔을 들어 악수에 응했다.

“그러고 보니까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네? 난 클로이 위더스푼이야.”

“뭐?”

루빈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우쭐거리는 여자애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역시 그런 반응일 줄 알았어. 내 가문 이름을 들으면 다 그런 얼굴이거든.”

“정말 위더스푼 가문이야? 정말로?”

“또 대부분 그렇게 되묻지. ‘정말 위더스푼 가문이야, 정말로?’라고. 너, 그게 얼마나 지겨운지 아니?”

그러면서 클로이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팔뚝을 쓱 훑어 내렸다. 위더스푼 가문의 피가 흐른다는 증거가 거기에 있었다.

프스스슷.

클로이의 왼쪽 팔뚝에는, 제국 최고의 마법명가, 위더스푼 가문의 문양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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