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위더스푼가의 막내딸 (3)
위더스푼가(家).
그들은 대륙의 모든 마법사 가문들 중에서도 정점에서 있는 자들이었다. 마법명가라는 것 자체로도 귀족들 사이에서 특별한 위치이긴 했지만, 위더스푼가는 더욱 특별했다.
‘황제가 인정한 다섯 개 가문 중 하나.’
일명 ‘제국귀족’.
황제는 다른 왕국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업신여길지언정, 제국귀족에게만큼은 경의를 표했다. 피만 섞이지 않았을 뿐 황족이나 다름없는 대우였다.
“아가씨, 오침에 드실 시간입니다.”
그때, 루빈과 클로이 사이에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날카로운 인상에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클로이 곁으로 다가온 그녀는 빠르게 루빈을 훑어보았다.
“치, 배 안에서도 오침은 건너뛸 수 없는 거구나…….”
“당연합니다. 아무리 바다 위라고 해도 가문의 원칙은 비껴갈 수 없습니다.”
루빈은 잠자코 있었다. 위더스푼가의 시녀일 것이다. 시녀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엄청난 경지의 마법사일 게 분명하겠지만.
“아, 맞다. 서로 소개해 줄게. 이쪽은 내 경호원이자 시녀이자 선생님이자 요리사이자… 또 뭐더라?”
“셀레스네라고 합니다.”
“응, 그래. 셀네스네야.”
셀레스네가 고개를 까딱였다. 예를 표하는 것치고는 거만함이 묻어나는 태도였지만 그녀가 속한 가문의 서열을 생각한다면 그걸 따지고 들 귀족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얘는… 맞다, 너 이름 안 알려줬는데?”
“난 루든 포이넨이라고 해.”
“포이넨? 처음 듣는 가문인데? 너, 신분이 어떻게 돼? 3등귀족? 2등귀족? 설마 왕족이야?”
“3등귀족이야.”
그러자 클로이가 손에 들고 있던 양피지 책을 펼쳐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포…이…넨… 가문… 3등귀족… 특징은…….”
“…….”
그러고도 한참을 무언가 끄적이던 클로이는 이내 양피지 책을 덮고 활짝 웃었다.
“됐다! 좋아, 루든. 나한테 존댓말은 안 해도 돼.”
“아가씨?”
3등귀족이라면 귀족 분류에서는 아래쪽에 속했다. 엄격하게 구분하자면, 위더스푼 가문 같은 제국귀족한테는 극진한 존대를 써야 했다. 위더스푼가 사람들 역시 그런 대우에 익숙할 것이고.
그러나 클로이는 명랑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아가씨의 태도가 못마땅하면서도 익숙한지 셀레스네는 더는 딴지 걸지 않았다.
“클로이, 방금 오침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아, 오침! 실제로 낮잠을 자는 건 아니야. 마나를 축적하는 거니까.”
“마나를 축적한다고?”
“마나석이 풍부하게 매장된 지역이라면 언제든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서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위급상황 때 체내의 마나를 써야 할 수도 있거든.”
어딘가 책의 한 구절을 달달 외는 것 같은 말투지만, 루빈은 그냥 모르는 체했다. 클로이는 친절하게 몇 마디 설명을 더 해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반가웠어, 루든. 난 이만 갈게. 셀레스네가 잔소리하거든. 아, 맞다. 혹시 네 고양이 내가 데려가도 될까?”
한쪽 구석에 드러누워 꼬리를 튕기며 하품을 늘어놓던 티나. 클로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티나는 민트색 눈동자를 전부 드러내며 캬아아악, 숨김없이 짜증을 부렸다.
“미안하지만, 싫다는 것 같은데.”
“그래? 고양잇과 동물들한테 시험해 보고 싶은 마법이 있었는데, 아쉽네.”
“캬아아아악!”
“…확실히 착한 고양이는 아닌 것 같구나.”
클로이가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객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 때, 클로이를 따라 들어갔던 셀레스네가 객실에서 나오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때마침 쿠제도 객실에서 나와 루빈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쿠제는 복도에서 마주친 동승객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셀레스네는 가볍게 무시했다. 몸에 밴 거만함이다.
“포이넨가의 루든 공자님이라고 하셨나요?”
셀레스네가 루빈 맞은편에 서서 물었다.
기억이 안 날 리는 없고, 단지 다시 한번 물어보면서 기세를 잡아보려는 것이었다. 그 저의를 모르지 않는 루빈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잠시 앉도록 하죠.”
셀레스네는 곧장 루빈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슴없이 다리를 꼰 뒤 무릎 위에 고급스러운 양피지 책 하나를 펼쳤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태도가 거슬렸던 쿠제가 나섰지만, 셀레스네의 눈길은 루빈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펜을 버릇처럼 만지작댔다.
“몇 가지를 적어두려 합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루빈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루빈 일행에 관한 모든 걸 파악해 두겠다는 뜻이다. 좋게 말해 파악이지, 사실상 검문을 받는 셈이었다.
“포이넨가, 루든 공자, 3등귀족. 출생지는 어디시죠?”
보아하니, 이런 식의 절차는 셀레스네로서는 일상적인 것 같았다.
‘하긴 위더스푼 가문의 공녀를, 그것도 단독으로 수행하고 있으니 이러는 게 당연하겠군.’
결국 보다 못한 쿠제가 다시 나섰다. 객실에 다녀오느라 쿠제는 이들이 위더스푼 가문 사람들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지금, 검문이라도 하려는 겁니까?”
그래서 루빈은 빠르게 전음을 펼쳤다.
-쿠제. 여자애는 위더스푼가 사람이야. 저 시녀는 일반적인 시녀가 아니라 엄청난 마법사일 거고.
“크, 크흠.”
루빈의 전음을 들은 쿠제가 헛기침을 하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셀레스네는 날카로운 눈으로 쿠제를 노려보았다.
이곳이 배가 아니었고, 셀레스네가 참을성이 없는 시녀였다면… 셀레스네는 단숨에 마법을 시전해 쿠제의 목숨을 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국귀족과 3등귀족의 격차는 그런 일 따위 가볍게 무마시킬 정도로 벌어져 있으니까.
“하인 하나와 단둘이 여행을 다니시다니. 독특하군요. 아니면, 숨겨놓은 능력이라도 있는 걸까요?”
방금 전의 무례함은 넘어가 주겠다는 듯, 셀레스네가 차갑게 미소 지었다.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시녀 하나와 다니는 아가씨, 그리고 하인 하나와 다니는 도련님. 보이는 모습은 똑같아도 클로이와 루빈의 상황은 엄연히 달랐다.
위더스푼 가문이라면, 공녀가 달랑 시녀 하나만 데리고 대륙을 여행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가문이었다.
그녀 이름에 따라붙는 가문의 이름만으로도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아니, 신분을 밝힐 필요도 없다. 불미스러운 일에 엮이기도 전에 셀레스네가 나서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으니까.
반면 루빈 일행은 그렇지 않았다. 귀족의 여정치고 지나치게 가벼운 구성이었다.
루빈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셀레스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겠죠. 신분상에 거짓만 없다면 말입니다.”
가볍게 던진 말이었나? 셀레스네는 그쯤에서 더 추궁하지 않았다.
“자, 다시 하죠. 루든 공자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제가 질문하는 것들에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이런 질문들은 제국귀족의 당연한 권리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때부터 셀레스네의 질문이 연거푸 이어졌다. 잿빛항구를 통과할 때 받은 검문보다 더 세세할 정도였다.
출생지, 출생 연도, 행선지는 기본인 데다 부모님에 관한 사실들까지 빠짐없이 이야기해야 했다.
‘준비해 놓길 잘했네.’
다행이었다. 승선하기 전, 루빈과 쿠제는 위장 신분에 관한 세세한 사실까지 정해놓았다. 얀을 겪고 나니 위장 신분을 더 체계적으로 해놓을 필요성을 느낀 덕분이었다.
물론 위장 신분의 사소한 설정들을 위더스푼가의 시녀에게 늘어놓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은 무엇이죠?”
“그런 것까지 이야기해야 해?”
“신분의 진위 여부를 알아보는 마지막 질문입니다.”
루빈은 곰곰이 생각하는 척을 했다. 선호 음식을 통해 위장 신분을 가려낼 수 있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 신분이나 그 지역 출신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음식을 이야기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이 역시 루빈에게는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루빈은 골몰히 생각하면서 즉흥적으로 대답하는 척 연기했다. 그렇게 몇 가지 음식들을 나열한 뒤에야 셀레스네는 질문을 멈췄다.
“흐음. 그렇군요.”
루빈의 마지막 대답을 들은 셀레스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든님의 대답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맞아떨어지네요. 너무 정교해서 오히려 이상하긴 하지만, 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에서 통과가 된 건지 셀레스네의 표정에 아주 약간의 부드러움이 더해졌다.
“그럼 이제 당부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직도 남은 게 있는 건가. 루빈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짜증을 참으며 눈을 끔뻑였다.
“저는 거의 대부분 클로이 아가씨 곁에 머무를 겁니다.”
“그런데?”
“제국귀족 영애와의 연혼을 바라는 무리가 많다는 사실을 짚고 싶군요. 아직은 어린 나이이지만 혹시라도 아가씨에 대해 흑심을 품고 계신다면…….”
셀레스네가 도중에 말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맞은편 고양이를 향해 있었다.
“왜 그래?”
“아, 아닙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기분 탓인가. 이들이 데려온 고양이가 마치 자신의 말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럴 리가 없으니. 셀레스네는 고개만 살짝 갸웃거렸다.
“걱정 마. 난 클로이한테 관심 없어.”
“그러면 다행이군요. 그리고… 아가씨가 이 배에 머무는 동안, 이 배의 요리는 제가 맡겠습니다. 아가씨께서는 균형 잡힌 음식들을 섭취하셔야 하기 때문이죠.”
클로이의 요리사라고는 했지만 그건 구색일 뿐. 분명 독살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쿠제가 조심스럽게 한마디 건넸다.
“그런데 재료가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만…….”
“걱정 마시죠. 아공간 주머니에 충분한 식재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양으로만 보자면, 이 배를 가득 채우고도 남죠. 다른 분들이 음식의 맛으로 실망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따로 원하시는 음식이 있으시다면 요청해도 좋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 보면, 이미 거혈인 남매와 이야기가 된 부분일 것이다. 와락과 아늑 역시 제국귀족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을 테고.
“또 하나 당부드릴 것은…….”
셀레스네는 정확한 속도,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이 순간부터 클로이 아가씨께서 대화를 요청하시면,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그래야 해? 클로이는 좀 말이 많은 것 같던데.”
그러자 셀레스네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클로이 아가씨께선 축적한 지식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분이십니다.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마디로 아는 척하는 걸 좋아한다는 소리다. 누구라도 3분만 클로이와 마주 앉아보면 저절로 알게 될 성격이었다. 똑똑하고 자존심 센 제국귀족 신분의 여자아이.
루빈은 그런 애와 어울리느니 차라리 객실 안에 틀어박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물어보는 것쯤이야 얼마든지요, 루든 공자님.”
“너흰 어디로 가는 거야?”
“최종 목적지가 궁금하신 겁니까?”
“필리몬드가 최종 목적지 아닌가?”
다소 민감할 수 있는 질문에 셀레스네는 버릇처럼 경계심을 품었다가, 이내 대답했다. 어차피 검문을 통과한 자들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카포티니로 갑니다. 저희 아가씨께서 카포티니 마법학교의 마법생도 신분으로 편입할 예정이시거든요.”
“뭐?”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루빈은 동승자의 정체를 알게 됐을 때만큼 놀랐다. 마법사 가문의 딸이 마법사들의 도시에 간다는 것. 당연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가 않았다.
그 가문이 위더스푼이고, 그 도시가 카포티니라면 더더욱 이상한 일이지.
카포티니는 대륙 서반구에 위치하고, 위더스푼 가문은 대륙 중심, 제국의 땅에서 독자적인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대가문이었다.
‘위더스푼 영지 안에 유명한 마법사들의 도시가 있지 않나.’
도시 이름은 아메릭마나.
급만 따지자면, 카포티니는 중소형의 마법사 도시였고, 아메릭마나는 초대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아메릭마나와 카포티니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마나선을 운용하는 방식도 다를 텐데.’
이게 가장 큰 의문점이었다.
마나선의 차이. 즉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선을 그리는 휘식의 차이. 휘식이 다르다는 것은 마법의 근간이 다르다는 걸 의미했다. 휘식은 그 마법사의 정체성이자 영혼과 같았으니까.
‘카포티니 출신의 마법사들은 삼휘(三揮)의 방식이지만, 아메릭마나 출신은 원휘(圓揮) 아니었나?’
루빈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저들이 카포티니에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궁금증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의문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은 불가능했다.
“놀라시는 거 보니, 마법사들의 세계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으신 것 같군요?”
“조금은. 위더스푼 영지 내에 아메릭마나라는 도시가 있을 텐데, 어째서 카포티니로 가는 거야?”
하지만 당연히 대답해 줄 리가 없지. 셀레스네는 가벼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하필 카포티니로 간다니… 내 목적지를 카포티니라고 솔직하게 말할 걸 그랬나.’
조금 전 셀레스네의 질문들에 대답했을 때. 목적지가 어디냐는 물음에 루빈은 필리몬드라고 말했다.
당연히 그건 거짓말. 이렇게 된 이상 클로이와 엮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가씨, 일어나셨나요?”
마침 금발 소녀가 객실 복도 쪽에서 하품하면서 걸어 나왔다. 마나 축적을 마친 클로이는 파도에 따라 기울어지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천진하게 웃었다.
“나, 배고파. 셀레스네.”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루빈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셀레스네와 눈을 마주쳤다. 어떤 의미가 담긴 눈빛. 위더스푼 가문의 영애가 뽐내는 지식 자랑을 잘 받아주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