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위더스푼가의 막내딸 (5)
투명막 너머. 셀레스네가 가리킨 심해 바닥에는 크고 작은 바윗덩이가 모여 있었다. 다만, 일반적인 바윗덩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 저거…….”
클로이는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수룡의 비늘을 뚫고 나갈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정도로, 클로이는 투명막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댔다.
그런 클로이의 얼굴에 밝고 연한 푸른빛이 내려앉았다. 투명막 너머에서 쏟아지는 빛이었다. 여러 바윗덩이들 가운데 빛을 내는 바위가 하나 있었다.
“저게 뭐야?”
루빈이 모르는 척 물으며 클로이 곁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돌린 클로이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루든, 저게 바로 마나석이야!”
그러곤 고개를 저으며 덧붙인다.
“아니지, 그냥 마나석이 아니야. 저건 심해 마나석이란 거야! 마나석은 원래 땅속에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이번에도 책 속의 구절을 읊어대는 것처럼 말하는 클로이. 루빈은 클로이가 원하는 만큼 말을 할 수 있도록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그나저나 마나석이라.
루빈 역시 마나석이 마법사들에게 얼마나 특별한 물건인지 알고 있었다. 거대 마나석이 매장되어 있는 땅 위에만 마법사들의 도시가 만들어지고, 마법학교도 세워질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그 풍부함에 따라 마법사들의 능력을 최대 수십 배까지도 극대화시킬 수 있는데, 지금까지 채굴된 것 중 가장 큰 마나석은…….”
마법사는 마나석의 매장량에 따라 마법 능력을 온전히 쓸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마법명가들이 채굴 경쟁을 불사하면서까지 마나석을 선점하려는 것이다.
‘역시 마법사는 마법사인가. 셀레스네도 입을 벌리고 쳐다보기 바쁘네.’
한참 동안 설명을 이어나가는 클로이뿐만이 아니다. 셀레스네도 투명막에 들러붙듯 서서 마나석이 내뿜는 황홀한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냐아아아옹.”
거기에다 눈동자를 반짝이는 고양이 한 마리까지.
“하하, 고양이 눈에도 신기한가 보네요.”
쿠제는 어느새 자기 품에서 내려와 창틀에 매달려 있는 고양이를 잡아끌었다.
“냐아아아아!”
날카롭게 신경질 부리는 고양이. 티나에게는 저게 마나석이든 아니든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반짝이는 것이라면 환장하는 환혈족이니까. 그저 본능을 따르는 거다.
쿵쿵쿵.
그때였다. 아래칸에 있던 아늑이 서둘러 지상층으로 올라왔다.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미리 경고부터 하는 아늑. 그에 다들 긴장하는 얼굴로 돌아봤다.
“잠시 후, 악토니아를 구경하게 될 겁니다.”
“악토니아라고?”
클로이가 흥분해 되물었지만, 아늑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바로 다음 순간, 탑승객들 위로 거대한 그늘이 드리워지면서, 마치 지진을 일으킬 듯한 장엄한 울음이 들려왔다.
그우우우우우.
울음소리만으로도 심해 바닥에 고정된 블루캣호가 크게 요동쳤다.
“어디에 있지?”
탑승객들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천장 너머로 비치는 바다를 살폈다.
장엄한 울음소리를 내었던 악토니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심해의 다양한 물고기들이 경쾌하게 헤엄치기만 할 뿐이었다.
“저기! 저기에 있어요!”
아늑이 악토니아를 찾아내 가리켰다. 암벽 뒤편으로 모습을 감추었던 악토니아의 기다란 목이 드러났다.
“하늘에 그랑버드가 있다면, 바다에는 악토니아가 있다…….”
클로이가 책의 구절을 떠올렸는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말처럼, 그랑버드는 하늘의 지배자였고 악토니아는 바다의 지배자였다.
다만 릴리크 제국으로 통일된 뒤, 그랑버드는 제국의 운송수단 신세가 되어버렸지만, 악토니아는 그렇지 않았다.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은 시도가 있었음에도, 악토니아는 제국의 통제권에 들지 않았으니까.
“제국은 악토니아를 길들일 수 없어서 그들을 해저 괴수로 분류했지만…….”
클로이가 하던 말을 멈추었다. 기다란 목만 드러냈던 악토니아가 비로소 거대한 실체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열 개의 다리. 수많은 해양생물체의 서식지 역할도 하는 거대한 등껍질. 그리고 날카로운 뿔이 솟아있는 해마 같은 머리.
“아늑, 저 악토니아가 배를 공격하지는 않을까?”
셀레스네가 초조하게 물었다. 여차하면 마법을 써서 대항할 생각인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쪽에서 악토니아를 공격하지만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정말이지?”
“게다가 수룡의 비늘도 있으니까요. 수룡의 권능 때문에 악토니아는 이 배를 해할 생각도 못 할 겁니다. 지금 악토니아가 여기에 나타난 이유는 블루캣호 때문이 아니라, 마나석 때문입니다.”
“맞아. 나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 죽은 악토니아의 몸 안에서 마나석이 나왔었다고.”
“저나 와락은 악토니아를 여러 번 봤습니다. 그때마다 녀석들은 마나석 불빛을 즐기는 것 같더군요.”
아늑 말대로 악토니아는 기다란 목으로 마나석이 있는 바위 더미를 감싸고 있었다. 뿔이 솟은 머리를 마나석 근처에 갖다 대며 그우우우, 그우우우우 울어댔다.
감미로웠다. 어쩌면 따뜻한 기운 속에 노래를 부르는 걸지도.
콰드드득.
그때, 한참 감미롭게 울어대던 악토니아가 고개를 들더니 마나석 일부분을 뜯어먹었다. 비스킷을 베어 먹는 것처럼.
지켜보던 사람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한 광경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악토니아를 여러 번 봤다는 아늑조차도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
“하, 마나석을 먹어버리다니.”
마나석을 한입 베어 먹은 악토니아. 포만감을 누리는 걸까? 자기 눈앞에서 유영하는 수천 마리의 물고기들을 여유롭게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악토니아의 떠도는 시선이 뚝 끊어지면서 멈추었다.
“우리를 보는 것 같은데?”
“어, 이럴 리가 없는데.”
가장 당황한 건 아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수룡의 비늘이 씌워진 블루캣호는 악토니아의 관심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차라리 기피 대상이라면 모를까.
오히려 괴수급이 아닌 일반 물고기들이야 블루캣호에 관심을 두고 접근하는 게 가능했다. 미약한 물고기들은 수룡의 권능에 아무 영향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악토니아는 수룡의 권능에 바로 반응하는 생물체. 권능을 거스르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여기로 오는 것 같군요?”
“그건 저도 압니다, 쿠제 님.”
쿠제가 한마디 하자, 긴장감 속에 셀레스네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갑판 위에 있는 전원이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뭘 확인하려는 거지?’
일촉즉발의 상황. 루빈은 암연을 쓸 작정까지 하고 있었다. 공격성이 담긴 암연이라면, 물리적인 충돌 없이도 악토니아를 견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앞서, 루빈은 악토니아가 뭔가를 관찰하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녀석은 지금 화가 난 게 아니다. 뭔가를 찾아내려는 것이다.
악토니아의 눈동자를 계속 따라갔다. 블루캣호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악토니아. 이윽고 그 커다란 눈동자가 한군데에서 멈추었다.
“아가씨?”
클로이였다. 악토니아의 시선은 오직 클로이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클로이 쪽으로 더 다가드는 악토니아를 셀레스네가 가만 놔둘 리 없었다. 그녀가 황급히 마법을 펼치려 했다.
클로이가 팔을 들어 올리며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아냐, 셀레스네. 가만히 있어.”
클로이는 단호했고, 만약 자기 뜻을 어기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그냥… 마법 시전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악토니아는 점점 다가왔다.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클로이 쪽으로 다가왔다.
‘이 생명체도 느끼고 있는 거야.’
루빈의 짐작이 맞는다면, 악토니아를 잡아당긴 건 클로이에게서 풍겨 나오는 음습한 기운이었다.
마법사들이나 거혈인에게는 감지되지 않지만, 암살자들의 암연에는 명백히 느껴지는 그 기운.
‘만약 내가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다면, 악토니아도 좋아할 만한 기운은 아니지.’
그럴 것이다. 심해 마나석이 전해주는 따뜻한 기운과는 정반대일 테니까.
그때. 수룡의 비늘에 닿을 듯이 눈동자를 가져다 대던 악토니아가 우뚝, 멈추었다.
그 커다란 눈동자에 떠오른 건 바로 혐오였다. 내내 거슬렸던 음습한 기운을 마침내 확인했던 걸까?
그 발원지를 찾아냈지만 그걸 직접 만지기는 싫다는 듯 악토니아는 휙, 목을 뒤로 뺐다. 그러더니 망설이지 않고 블루캣호로부터 몸을 밀어냈다.
“설마 가버리는 거야?”
악토니아의 관심을 받는 줄 알고 설렜던 클로이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클로이가 하는 말을 들었을 리 없지만, 악토니아는 매몰차게 돌아서 버렸다. 열 개의 다리를 느릿느릿 휘저으며.
쿠쿠쿠쿠쿵.
휘젓는 여파에 블루캣호가 또다시 크게 요동쳤다. 순간적으로 기울어진 갑판 위에서 모두가 중심을 잡는 와중에, 고양이만 혼자 다리 네 개를 수영하는 사람처럼 움직이며 쭉 미끄러졌다.
흔들림이 멈추었을 땐, 이미 악토니아는 눈앞에서 사라진 뒤였다.
“치, 나는 또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네.”
클로이의 커다란 눈에는 아쉬움을 넘어 슬픔까지 배어 있었다.
“아가씨.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아냐, 셀레스네. 악토니아한테는 공격성이 없었어. 확실히 느껴졌거든. 그냥 호기심이었던 거야.”
“바로 그 호기심 때문에 아가씨를 잡아먹었을 수도 있고요.”
“어차피 그렇게 안 놔뒀을 거잖아. 수룡의 비늘을 뚫자마자 바로 마법을 썼을 거면서.”
셀레스네는 분명 그랬을 것이다. 마법이 아닌 암연이라는 수단의 차이만 있을 뿐 쿠제나 루빈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고.
클로이가 셀레스네와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루빈은 클로이를 좀 더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조금 전에 아주 강렬했는데.’
악토니아가 클로이에게 다가섰던 그때, 음습한 기운이 일순간 증폭됐었다.
악토니아가 사라지면서 다시 잠잠해진 것 같지만, 지금도 여전히 클로이 주변으로 음습한 기운이 떠도는 중이었다.
‘클로이 내부에 있는 건가? 아니면 외부에?’
암연을 직접적으로 클로이에게 닿게 한다면. 그렇다면 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음습한 기운을 감지하지 못하는 클로이라고 해도 암연이라면 감지해 낼 확률이 높았다.
그녀에게는 암연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으니, 단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무엇이라고 느끼는 것에 그치겠지만.
루빈은 하는 수 없이 암연을 넓게 펼치는 정도로 그쳤다. 감각을 극대화해서 조그마한 이상에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아가씨. 다행히 아직 심해 마나석이 남아 있어요.”
셀레스네가 클로이를 다시 투명막 쪽으로 이끌며 말했다.
“잠깐만. 나 기록하고 있단 말이야.”
클로이는 조금 전 겪었던 악토니아와의 일화를 빠르게 양피지에 적어가던 중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글뿐만 아니라,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악토니아의 외형까지 세세한 그림으로 남겨놓았다.
“마나응집력을 높이는 수련을 해보는 게 좋겠어요.”
“셀레스네, 바깥에서도 그렇게 선생님 모드야?”
“아가씨. 심해 마나석 가까이에서 마나응집력을 수련하는 건 흔한 경험이 아니에요.”
“카포티니 학교에 가면 열심히 할 거였는데…….”
클로이는 툴툴대면서도 결국엔 셀레스네의 말을 따랐다. 투명막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 저거 혹시?’
클로이를 주시하던 루빈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린 건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