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목걸이 속 존재 (4)
“…그렇단 말이지.”
루빈은 입술을 모으고 가만히 땅바닥을 내려다봤다.
태연하고 덤덤했다. 혼란에 빠지거나 겁에 질리지 않았다. 마령이 바랐던 반응과는 영 딴판이었다.
-자, 이제 심각성을 알았으면 이 검들 좀 치워주는 게 어때? 네가 얼마나 내면세계를 잘 다루는지는 충분히 알았으니까.
마령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지만, 온몸에 겨누어진 수십 개의 검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한 뼘 더 마령에게 다가들었다.
-히, 히익!
괴성을 지르는 마령을 뒤로하고, 루빈은 그의 말을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내면세계가 무너질 수도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무의식의 층이 있다. 말 그대로 의식 저 너머에 감춰져 있는 지대였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거지만, 어느 누구도 직접 확인할 수는 없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루빈은 아기였을 때 검혼 상태의 하네케를 만났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때 하네케가 깃든 공간이 바로 루빈의 무의식이었다.
이후 검날 조각을 되찾게 되면서, 무의식의 층은 본격적으로 두 사람의 장소가 되었다.
‘문제는 내면의 수련장이 생기면서 내 무의식의 지대가 협소해졌다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루빈의 무의식의 층이 두 개로 쪼개진 것이다. 한 곳에는 하네케가 존재하는 내면의 수련장이 구축됐고, 나머지 장소에 루빈의 무의식이 자리 잡았다.
즉, 다른 사람들은 ‘의식-무의식’이라는 두 개의 층이 있을 때, 루빈은 ‘의식-내면세계-무의식’이라는 세 개의 층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조그마한 화분처럼, 결국엔 넘쳐나는 뿌리를 감당하지 못해 깨지고 만다.’
마령의 비유가 그랬다. 화분이 깨질 거라고.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화분이 깨지는 걸로 그치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정말로 최악의 상황은 따로 있었으니까.
‘의식을 잃은 채로 폭주해 버릴 수도 있다니.’
그렇게 된다면, 회귀한 뒤로 루빈이 새롭게 얻어낸 경지들은 모두 세상을 파괴하는 수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루빈은 그저 괴수가 될 뿐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꼬마야, 나는 너의 내면세계가 무너지는 걸 원하지 않아.
당연히 그렇겠지. 클로이의 무의식을 점거하는 것이 원래 목표였던 마령이었다. 그런 마령에게 루빈의 내면세계라고 다를까? 놈은 자기가 뿌리내릴 터전을 원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너지지 않을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네?”
루빈은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마령은 머릿속에 우글거리는 뱀을 마구 움직여 대며 흥분을 드러냈다.
-그럼, 알고말고. 그게 바로 내가 상급 마령이라는 증거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비록 전투형 마령이 아니긴 해도 한때 우리 세계에서는 12참모에까지 들었던 몸이지. 그런 내가 왜 이 할아범한테 진 거냐면…….
스으으응.
루빈은 수십 개의 검들을 다시 움직여 마령의 몸에 닿을 듯이 압박했다.
하네케에게 패배한 자초지종 같은 걸 들어줄 시간이 없었다. 마령세계의 정세 따위는 더더욱 관심 밖이었고.
-크흠, 각설하고! 너의 내면세계를 지금처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지. 아, 받아들인다는 표현이 좀 그런가? 그냥 나한테도 공간을 좀 내어주면 된다는 거다.
그제야 루빈의 검들이 마령으로부터 한 뼘 떨어져 나왔다. 자신의 노림수가 통했다고 생각한 마령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인간들은 마령이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든다고들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지. 무의식의 어지러운 질서를 잡아줄 뿐이야. 너 같은 경우는 내가 은인인 셈이고.
“은인이라.”
-내가 여기에 자리 잡으면, 내면세계가 깨지는 걸 막는 거니까. 더구나 네 생명뿐만 아니라, 여기 이 무지막지한 할아범도 연명하게 되잖아?
루빈은 고개를 돌려 하네케를 쳐다보았다.
틀린 지적은 아니었다. 루빈의 내면세계엔 하네케의 운명도 얽혀 있었다. 내면세계가 무너져 내리면 하네케 역시 소멸될지도 모른다.
-어때, 솔깃하지?
“그 전에 물어볼 게 있는데.”
-그래, 궁금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만약 클로이를 집어삼킬 수 있었다면, 뭘 어쩔 셈이었지?”
-아, 그게 궁금했나? 별거 아니야.
마령은 낄낄대며 말을 이었다.
-뭐긴 뭐겠어? 부잣집 여자애 몸으로 재미나게 살아보려는 거였지. 그런데 하필 마법사였을 줄은… 쳇!
신나게 떠벌리던 마령은 아차, 싶어 루빈의 표정을 살폈다.
-물론 지금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자, 루빈? 나는 어디에 자리 잡으면 될까? 저기면 적당하려나?
마령은 팔을 들어 광야 저 끝을 가리켰다. 최대한 하네케 영역에 침범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앞서가는 마령을 향해 루빈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결정 안 했어.”
-혹시 궁금한 게 더 있는 건가?
“내면세계의 붕괴. 언제 벌어질지 알 수 있나?”
-정말로 그게 궁금해? 나만 여기 살게 해주면 끝나는 문제인데, 뭘 망설이는 거야!
기다렸던 대답이 아니어서 루빈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여차하면 공중에 떠 있는 검들이 일제히 쇄도할지도 모른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는지 마령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얼마가 될지는 나도 몰라. 10년 후가 될지, 그 이상이 될지.
지금 당장 일어날 일은 아니라는 뜻이군. 루빈은 그렇게 짐작했다. 물론 마령이 다르게 대답했더라도 루빈의 결론은 똑같았을 것이다.
마령의 말이 아니더라도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루빈은 이 내면세계의 주인이었다. 마령이 인정할 정도로 이곳을 잘 운용하고 있기도 했고.
‘무슨 문제가 생겨도 내가 모르게 벌어지지는 않을 거야.’
지금 당장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는 다르다. 이제 문제를 파악했으니, 시간을 들여 그 해결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루빈.
하네케가 루빈을 마주 보고 섰다.
대장군은 지금 이 상황을 가볍게 넘기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루빈이 충분한 숙고 끝에 결정해 주기를 바랐다.
설혹 그 자신이 피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였다.
-나는 상관하지 말게. 나는 이 징그럽기 짝이 없는 마령 놈과 이 공간을 공유해도 상관없으니.
“…….”
루빈은 하네케의 이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하네케 눈동자 속엔 모든 걸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자네는 숙원을 완성해야 하지 않나?
복수. 텔마흐에 대한 복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빈 혼자만의 복수가 아니었다. 손자를 잃은 대장군 하네케의 복수 또한 담겨 있었으니.
루빈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복수도 이뤄낼 것이고, 내면세계가 무너지는 걸 지켜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네케가 소멸되도록 놔두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령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네케. 언젠가 제게 말했었죠. 죽고 나서도 영혼이 살아남았으니, 두 번째 인생을 하나의 보너스로 생각하겠다고요. 그 말, 아직도 유효해요?”
-그럼. 당연하네.
하네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루빈과 수련을 막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절 믿어줘요. 대장군을 소멸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면세계를 지켜줘서 고마워요. 다음번에 또 다른 마령이 침범한다면 그때도 부탁해요.”
그렇게 말하며 루빈은 하네케를 향해 몸을 숙여 경의를 표했다.
“대신 그때는, 제 결정을 기다릴 필요 없이 마령을 제거해 주세요.”
그 순간, 마령의 머리에 담긴 뱀들이 다시 팔딱거렸다.
-뭐라고? 너, 정말 후회 안 해?
후회라. 루빈은 마령을 노려보았다.
“네놈을 바로 베지 않은 걸 후회하는 중이다.”
-머, 머, 멈춰! 내가 마령세계로 돌아가게 되면 그 즉시 목걸이는 폭발하게 되어 있어. 나한테 그 정도 대비책도 없었을 거 같아?
“미리 말해줘서 고맙군. 널 없애고 서둘러 쿠제를 도와줘야겠어.”
-그리고! 내가 다시 오면 널 찾아내 꼭 복수할 거야. 나만 오는 게 아니라, 나보다 훨씬 강한 마령들도 같이 올 거라고!
이제 마령은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마령세계로 돌아가면 다시 현실세계로 틈입할 기회는 쉽게 생기지 않는다. 마령술사와의 연결은 마령들로서도 그만큼 고대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루빈과 하네케가 동시에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절규하는 마령을 등지며 걸어 나갔다.
-기, 기다려!
잠시 후. 마령의 외침은 이어지는 파열음에 뒤덮이고 말았다. 검이 겨누고 있던 방향 그대로 쇄도해 마령의 몸을 관통한 것이다.
돌아보지 않아도 루빈은 마령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프스으으으으, 소리와 함께 몸이 짓이겨진 마령은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그와 동시에, 내면세계에도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내면세계로 진입했을 때 루빈을 애먹였던 검은 지대가 사라졌고.
쿠쿠쿠쿵.
루빈의 의지에 따라 내면세계가 새롭게 구축됐다. 전투 흔적이 남아 있던 광야는 원상태로 돌아왔고, 수련장도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루빈, 서둘러 돌아가 봐야겠군.
내면세계를 둘러보며 하네케가 말했다.
“네, 쿠제를 도와줘야죠.”
미소 짓고 있지만, 그 눈빛은 진지했다.
다음 순간, 내면세계 안에서 루빈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네케는 루빈이 있던 자리가 허공으로 채워지자 가만히 수염을 쓸어내렸다.
객실 안.
쿠제 맞은편에 있던 현실세계의 루빈이, 감았던 눈을 떴다.
* * *
“도련님?”
루빈은 대답하기 전에 쿠제가 힘겹게 유지해 온 반구형의 암연을 내려다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던 걸까? 세 시간?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쿠제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쿠제가 이뤄낸 무중력 상태가 깨졌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아직 버틸 만합니다.”
“다행이네.”
루빈은 자신이 쥐고 있던 목걸이를 놓았다. 그러자 반구형의 암연에 따라 목걸이가 바닥에서 살짝 떠올랐다.
“어쩌시려고요?”
“목걸이가 폭발할 거야. 막아야 해.”
루빈은 쿠제가 만든 반구형 암연 속에서 두 손을 펼쳤다. 그리고 쿠제가 했던 것과 똑같이 반구형 암연을 만들어냈다.
쿠제가 만든 돔 안에 루빈의 두 손이 있고, 루빈은 또다시 돔을 만들었다.
‘이중의 돔. 이 정도라면 목걸이의 폭발을 저지할 수 있을 거야.’
루빈은 흘려보내는 암연의 밀도를 조금씩 높였다. 만약 폭발이 일어난다면 일차적인 피해는 루빈이 입겠지만, 상관없었다. 이대로 막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때.
목걸이가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볼록볼록, 뭔가가 뛰쳐나오려는 것 같았다. 쿠제는 루빈이 했던 것처럼 암연의 밀도를 높였다.
두 사람이 만든 이중의 돔이 목걸이를 내리눌렀다. 공기 흐름을 없애 불을 꺼트리는 것처럼, 목걸이 안에 내재된 폭발력을 분질러 버렸다.
파스스스스.
다음 순간, 목걸이가 스스로 까맣게 타들어가 버렸다. 이윽고 목걸이는 뚝뚝 분질러졌고, 두 사람의 손안에서 조각난 목걸이가 둥둥 떠다녔다.
“휴.”
쿠제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탁자 위에서 양손을 빼낼 수 있었다.
“도련님, 감사합니다.”
“아냐. 내가 도와주지 않았어도 너 혼자 폭발을 잠재울 수 있었어.”
루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쿠제의 양손이 털썩 탁자 위에 떨어지며 쿵 소리를 내었다. 세 시간 만이었다.
“그런데 티나는 어디 있지?”
의식이 없을 때의 일이었기 때문에, 루빈은 티나가 객실 밖으로 나갔다는 걸 알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셀레스네 님이 다과를 주겠다며 왔었어요. 그래서 티나 님이 저로 변신해서 다과를 받아오겠다며 나갔는데… 그게 벌써 한 시간 전이네요.”
루빈의 눈이 번뜩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티나가 환혈족인 게 밝혀지는 건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두 사람 모두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