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백색도시의 흑색구역 (3)
“로이넨 가문의 루빈, 맞으십니까?”
시장의 하수인은 두툼한 백색 로브를 둘러쓴 마법사였다. 그는 정중했고, 은근한 굴종심을 드러냈다. 제국의 그림자 아래 숨은 로이넨 가문과 루빈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처럼.
“늦은 밤의 방문이어서 죄송합니다. 시장님의 명령으로 왔습니다. 도련님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시장의 명령엔 선택권이 없었다. 루빈은 곧바로 준비하고 따라나섰다.
예상대로 이 초대는 루빈만을 위한 것이었다. 나서기 전, 객실 안을 슬쩍 쳐다보는 하수인. 경계하는 쿠제와 고양이를 놔둔 채 그는 루빈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백색 마차는 고요한 밤길을 나아갔다.
루빈 역시 시장이 거주하는 탑에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심히 내리시지요.”
마차가 멈췄다. 하수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제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시장님은 정상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루빈은 목을 젖히며 위를 올려다봤다.
밤의 어둠 저 멀리, 탑이 솟아 있었다. 거대도시 어느 곳에서도 보일 만한 백색의 탑. 고층 건물이 많은 필리몬드였지만, 이 탑에 비하면 한없이 작게 느껴질 정도였다.
“조심히 올라가시지요.”
“같이 안 가는 건가?”
“제게는 황족 간의 대화에 함께할 자격이 없습니다.”
황제의 숙부. 그리고 황제의 이복동생의 아들. 그렇다면 황족 간의 대화가 맞는군.
루빈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마법사가 앞쪽에 대고 손짓했다.
루빈 앞으로, 어둠에 가려졌던 길이 나타났다. 걸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뒤편의 불빛이 빠르게 꺼졌다. 루빈의 등 뒤는 금세 어둠에 묻혔다.
길의 끝. 탑 외부를 휘감은 나선형의 계단이 있었다. 정상까지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면, 평범한 이는 날이 밝아도 다 오르지 못하리라.
암연을 펼쳐보라는 뜻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계단 위에 발을 올려놓았는데.
쿠쿠쿠쿠쿵.
루빈이 층계를 올라 열 번째 계단참에 두 발을 올렸을 때였다. 밟고 올라왔던 계단이 하나둘씩 포개지며 루빈 등 뒤로 난간을 만들었다.
벽의 맞은편, 루빈 옆으로 아찔한 허공만 있던 자리에도 돌로 된 난간이 생겼다. 루빈이 오른쪽 난간에 손을 올려놓자 계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선형의 계단이 서서히 감겨 올라갔다.
쿠쿠쿠쿠쿵.
루빈이 걸어 올라왔던 뒤편으로는 허공만이 남았다. 덤덤한 눈길로 뒤를 돌아보는 루빈은 문득 구조가 궁금해졌다.
‘위에 있는 계단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선으로 휘감은 계단 전체가 아래쪽에서부터 위로 끌려가는 구조다. 그렇다면 상층부에 휘감겨 있는 계단도 똑같이 움직이고 있을 텐데, 그 계단들의 행방은 어떻게 되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루빈은 잠자코 기다렸다. 정상에 도착하면 알 수 있을 테니까.
‘필리몬드 시장이자 제국의 법무대관.’
그리고 황제의 숙부, 암레트.
이자를 만난 적은 없다. 루빈이 로이넨서와의 위장별채 생활을 끝내고 암살자로 독립했을 때, 암레트는 이미 죽은 뒤였다.
다만 그에 관한 이야기는 어머니를 통해 충분히 들었다. 그가 어떻게 죽었고, 어째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 내막은 잘 알았다.
‘죽을 만한 자였다.’
쿠쿠쿠쿠…….
계단의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드는 느낌이 들었다. 소리도 점점 작아졌고, 속도로 늦춰졌다.
이윽고 루빈의 눈앞으로 계단의 끝이 보였다. 조금 전에 품었던 의문이 간단히 풀리는 순간이 찾아왔다.
“음.”
상층부의 계단은 탑 정상부의 외곽에 덧붙여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계단이 작동하여 누군가 올라오게 되면, 계단 상층부는 정상의 옆면을 늘리며 면적을 넓히게 되는 구조. 당연히 계단을 타고 내려갈 때는 그 반대였다.
‘하긴 이 계단은 오로지 시장을 위한 거니까.’
계단이 바닥으로 덧붙여지면서 훨씬 넓어진 탑 꼭대기. 저편엔 또 다른 건물 하나가 솟아 있었다.
“저기겠군.”
루빈 앞으로 다시 불빛이 빛나며 길이 드러났다. 길은 건물 입구와 이어져 있었다.
루빈은 길 위를 걸어 나갔다. 내려다보니 탑 아래가 까마득했다. 만약 이대로 탑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마법사가 아닌 이상, 누구도 올라오지 못할 것이다.
법무대관을 위한 경호 인력도 충분했다. 드높은 허공 저편. 탑 정상보다 살짝 높은 상공에 그랑버드 하나가 날개를 펼쳐놓고 있었다.
비행 중인가? 그건 아니었다. 날개의 움직임이 없었다. 그랑버드의 눈도 감겨 있다. 잠이 든 것 같았다.
‘염동마법으로 띄워놓았구나.’
저 거대한 생물체를 오롯이 마법만으로 띄워놓다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그랑버드 위에는 제국군 1개 중대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호위 병력을 가질 수 있는 자는 대륙 안에서도 손에 꼽는다.
‘대체 어떤 자일까.’
어느새 커다란 문 앞에 다다랐다. 육중한 손잡이를 들어 노크를 하려 했는데, 문이 저절로 스르륵 열렸다.
쿠쿠쿵.
백색 카펫이 펼쳐진 하얀 복도가 드러났다. 저 멀리, 복도가 꺾이는 곳에선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저곳에, 그자가 있을 것이다.
암레트의 응접실은 넓었다. 혼자서 사용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많이.
“거기 앉아라. 식사를 곧 끝내지.”
커다란 식탁과 소파, 침대, 벽에 채워진 책들. 그리고 성체 트롤을 통째로 구울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벽난로.
루빈은 암레트가 시키는 대로 기다란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암레트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식사를 마저 했다.
그동안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넓은 것치곤 낭비되는 공간이 많았다. 황제의 직계혈통이자 제국의 법무대관이 기거하는 공간치고는 지나치게 단출한 곳이었다. 곁에서 그를 보좌하는 시종 하나 없다.
타닥타닥.
장작을 태우는 벽난로가 외로워 보일 정도다. 루빈은 입을 다물고 암레트가 식사를 끝내기를 기다렸다.
달그락.
이윽고 식사를 마치는 소리였다. 음식물이 반쯤 남은 접시가 허공으로 부웅 떠오르더니 벽난로를 향해 날아들었다.
쨍그랑!
접시가 산산조각 났고, 장작이 한순간 불티를 퍼뜨렸다. 불길이 넘치며 암레트의 모습을 환히 비추었다.
“…….”
좀 전까지는 몰랐는데, 암레트의 몸은 불균형적으로 살이 붙어 있었다. 거구의 몸에 어깨 위로 살이 울퉁불퉁 뒤틀린 채 붙었고, 뒷목도 돌출되어 있었다.
실루엣만으로는 괴수로 착각할 만한 몸.
대머리에다 병자처럼 하얀 피부, 그리고 얼굴 곳곳의 핏줄은 울룩불룩 돋아나 있었다. 인간의 형체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의, 기괴함 그 자체였다.
“루빈 로이넨.”
암레트는 고개를 돌려 루빈을 쳐다봤다. 뱀과 같은 샛노란 눈동자. 그가 클클,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널 보자마자 시간이 수십 년 전으로 되감긴 줄 알았단다.”
“…….”
“세이렌이 어렸을 때 모습과 똑같구나. 그때는 그 아이도 머리가 짧았지. 너처럼.”
암레트가 손가락을 튕겼다. 벽난로 안에 걸려 있던 찻주전자가 둥둥 떠오르더니, 휘청휘청 날아와 루빈의 찻잔을 채웠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내 말은, 얼마큼 알고 있느냐는 말이다.”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살짝 찌푸려진 얼굴이었다. 루빈은 담담히 말했다.
“제국의 법무대관이자 황제 폐하 그리고 제 어머니의 숙부이십니다. 그리고…….”
계속하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는 암레트.
“제국의 7성 대마법사이십니다.”
‘염동괴제’라는, 회귀 전들었던 암레트의 이명을 루빈은 기억해 냈다. 현시대 기준으로 세상에 다섯 명밖에 없는 7성 마법사. 그중에서도 염동마법의 극한에 맞닿은 자가 바로 이자다. 그 힘의 위력을 루빈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하늘에 띄워놓은 그랑버드 또한 이자의 솜씨이리라. 그만한 크기의 생명체를, 잠에서 깨지 않을 정도의 일정한 힘으로 장시간 띄울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암레트밖에 없다.
지금 이 공간에도 밀도 높은 마나가 가득 차 있다. 파동 하나하나가 샅샅이 느껴질 만큼 선명하게.
‘클로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기절했겠군.’
루빈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암레트가 클클, 기분 나쁜 소리로 웃어댔다.
“내가 널 부른 이유가 궁금하겠지.”
끄덕. 하지만 무슨 이유이든 상관없다는 게 루빈의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암레트를 이용해 흑색구역에 출입할 계획이었으니까.
필리몬드의 시장만이 부여할 수 있는 흑색구역의 통행권. 들어가는 것은 누구든 자유이니, 그곳에서 나올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낸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어쨌든, 그거야말로 필리몬드에 온 진정한 목적이자, 시장을 만나야 했던 이유였다. 무슨 말로 구워삶을지는 차차 생각해 봐야겠지만, 어떻든 루빈은 통행권을 따낼 자신이 있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그런데 예상치 못한 말이 암레트에게서 나왔다.
“루빈, 흑색구역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날 위해서 해줄 일이 있다.”
흑색구역으로 들어가라고?
루빈이 바라던 바다. 하지만 시장 쪽에서 먼저 그걸 지시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의심이 됐다.
처음으로 암레트가 몸을 일으켰다. 휘청휘청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 기괴한 몸뚱이가 책장 쪽을 향했다. 그는 책 몇 권을 옆으로 밀어내며 뒤편에 숨겨져 있던 무언가를 꺼냈다.
“사탕 좋아하느냐, 루빈?”
“…….”
흑색구역에 관한 지시사항이 내려질 줄 알았는데, 대화 흐름이 바뀌었다. 암레트가 찾아낸 건 비스킷과 사탕들이 담긴 바구니였다.
다시 루빈 가까이 앉는 암레트. 바구니를 뒤적여 찾아낸 알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 그것을 아작아작 씹으면서, 허물어진 눈꺼풀에 반쯤 가려진 눈동자로 루빈을 주시했다.
“사탕을 먹어본 적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이렌이 열 살 때쯤이었나. 황궁에 들른 그 아이에게 사탕을 주었다. 그때, 처음 먹어본다 했었지.”
암살검가의 자제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쉽게 달콤함에 다가갈 수 없고, 포만감을 누릴 수 없으며, 여유로움을 멀리해야만 하는 유년기.
“그 아이 표정이 금도 또렷해. 귀여웠지. 흠, 아무리 봐도 너희 암살검가가 황궁 놈들보다 더 혹독한 것 같단 말이지. 안 그렇더냐?”
암레트가 클클클 웃었다. 루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원하는 물음으로 보이지 않았다.
클클거리는 웃음이 기침으로 이어졌다. 쿨럭쿨럭! 루빈이 부축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지만 암레트는 무기력하게 손을 내저었다.
“오늘 내 모습을 안다고 믿을지라도, 내일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암레트는 까마득한 기억 속 문장 하나를 읊었다.
“이 문구를 아느냐?”
“모릅니다.”
“내가 좋아하는 연극의 유명한 대사란다.”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너에게 공부가 될 수 있도록 제목은 말하지 않으마. 그 대사를 찾아낼 때까지 책들을 뒤져보거라.”
왜 이 문구를 말한 걸까. 루빈이 모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루빈은 잠자코 기다렸다.
“나는 어릴 때부터 병약했단다. 형은 건강한 육체를 타고났지만 난 그러지 못했어.”
그때, 루빈의 눈앞으로 암레트의 찻잔이 떠올랐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찻잔을 홀짝거릴 수 있는 자다. 마찬가지로 남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으리라. 본능적으로 루빈은 눈앞의 남자가 굉장히 위험한 자임을 깨달았다. 상상 이상의 힘을 품은 자임을 말이다.
“루빈, 내 몸 안에 든 게 무엇인지… 맞힐 수 있겠느냐?”
이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루빈이 흑색구역에 들어가자마자 범죄자들 사이에서 죽어버릴 놈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최소한의 시험.
하지만 루빈은 답을 모른다. 그럼 암살검가의 방식대로, 답안지를 훔쳐서라도 알아내야지.
‘천천히. 조심스럽게…….’
루빈은 암연을 넓게 펼쳤다. 적의를 완벽히 지운, 암연의 순수한 결정체였다.
목표는 암레트의 몸속. 얇고 넓게 펼쳐진 암연의 막이 스멀스멀 나아갔다.
‘조금만 더…….’
때마침 암레트의 벌어진 입으로 찻잔이 기울어졌다. 그리고 그 틈으로, 루빈의 암연이 연기처럼 흘러들기 시작한다. 조금씩, 조금씩. 희미한 새벽 안개처럼 고요하게.
‘이제 거의 다 들어갔…….’
그 순간. 암연이 턱 막혔다. 막다른 길에 다다른 암연은 갈 곳을 잃었다. 방향성이 없는 암연의 말로는 소멸뿐. 암연은 곧 힘없이 흩어져 버렸다.
‘눈치챘구나.’
암레트의 샛노란 눈동자가 번뜩였다. 병약한 몸뚱이와 어울리지 않는, 맹수와도 같은 기민함이다. 루빈의 실수였다.
“질문을 잊었느냐, 루빈.”
실수를 만회해야 했다. 루빈은 신중하게 대답을 골랐다.
“…심장입니다.”
“호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나. 다행히 그래 보였다.
“정답이다. 꼬마치곤 제법이야.”
암레트가 들이켠 한 모금의 차는 루빈의 암연을 흩뜨릴 속임수였을 뿐. 그는 루빈의 암연이 침투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심장에서 나오는 이상 혈류를 만져보고자 한 루빈의 의도를, 진작에 파악한 것이다.
반드시 심장을 만져봐야만 알아낼 수 있는 답은 아니었지만, 이 모든 걸 암레트는 예상하고 설계했다. 그리고 철저히 모르는 체했다.
‘암레트…. 7성 경지와 상관없이, 음험한 자다.’
그의 샛노란 눈동자가 루빈에게로 향했다.
“나는 암살검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암연에 대해서는 모른다. 다만 무엇이 내 숨통을 불편하게 하는지는 알지.”
“시장님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박동하고 있습니다.”
암레트는 오른손을 자신의 왼쪽 가슴팍에 댔다. 주먹을 그러쥐고, 심장을 흉내 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듯, 그러쥔 주먹이 움직였다.
“스무 살이 가까운 나이였을 때, 심장을 적출해야 했지.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
단 1분이었지만, 몸 밖으로 나왔던 암레트의 심장이다. 그럼에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건, 궁중 대마법사와 엘프족 현인들의 도움 덕이라고 모두가 믿었다.
“그때, 나는 짧게나마 죽었다. 결국 이렇게 되살아났지만.”
하지만 그건 거짓말. 목숨을 부지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암레트 그 자신이었다. 심장이 적출되는 그 순간, 스스로 온몸의 혈액에 마법을 걸어, 순간적으로 몸과 심장을 얼려 버린 것이다.
궁중 대마법사도, 엘프족 현인도 경악할 만한 마법 수준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사실을 외부로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납득할 수 없는, 정치적인 이유로.
“그렇게 심장 적출 수술을 받기 전, 나는 내 목숨을 손에 쥔 자들과 비밀스러운 거래를 했단다.”
순간, 암레트의 눈에 적의가 서렸다.
“내 심장에 마법을 걸어두라고. 도시를 통째로 날려 버릴 위력의, 폭발마법을 걸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