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노년의 암살자 (2)
쿵! 쿵! 쿵!
거한이 기계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그가 내리칠 때마다 핀 트롤 사체가 토막 났다.
작업이 끝나자, 이번엔 오우거의 뒷다리를 올려놓고 팔을 휘둘렀다. 쿵! 쿵! 쿵! 작두라고 해도 믿을 만한 거대한 식도가 오우거 뒷다리를 쩍쩍 갈라놓았다.
“푸줏간의 통념을 깨는 곳이군요.”
쿠제가 슬쩍 말했다. 그나마 바깥 세계의 푸줏간과 비슷한 거라곤, 온갖 고깃덩이들과 우락부락한 푸주한들뿐.
마치 연극 무대처럼, 일렬로 된 계단식 의자에 사람들이 앉아 구경하고, 무대라고 할 만한 곳에선 푸주한들이 열심히 도축 중이었다.
루빈과 쿠제도 의자 하나를 골라 앉았다. 근처 사람들의 일상적인 말들이 들려왔다.
“소문 확실한 거여?”
“아, 거참. 진짜라니까. 오늘 특별한 선물이 올라온다고 했다니까?”
“근데… 그걸 우리가 타낼 수 있느냐가 문젠데.”
“그니까 최대한 두둑이 준비해 왔지? 너랑 나랑 합치면 꽤 되니까.”
그러면서 두 사람은 조그마한 나무 상자를 조심히 열어보았다.
“도련님.”
두 사람의 대화를 관찰하고 있던 쿠제가 조용히 루빈을 불렀다. 그로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지금 저들이 마치 금화를 헤아리듯 만지고 있는 건 사람의 치아 무더기였으니.
“알고 계셨습니까?”
“여기에서는 치아가 화폐야. 한정된 재원이거든.”
루빈이 덤덤하게 말하는 그때.
또각또각.
푸주한들 사이로 나이 지긋한 여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흑색구역에 들어와서 본 사람들 중 가장 말끔했다. 흰색 옷은 아니었지만, 빳빳하게 다려진 연회복을 입은 중년의 여인.
“자, 돈 좀 있는 분들 모이셨나?”
여인의 털털한 말 한마디에 여기저기서 외침이 이어졌다.
“준비됐으니까 빨리해! 소문이 확실해?”
“아랫님들이 올려 보내준 선물부터 보여줘.”
“이제 사람 고기는 지긋지긋하다고!”
쏟아지는 외침에 여인이 파리를 떨쳐 버리듯 손을 휘저었다.
“알았다, 새끼들아. 앵앵거리기는. 모처럼 흑색탑에서 올라온 게 뭐냐면 말이지…….”
여인이 뒤를 돌아서자, 푸주한 중 하나가 성큼성큼 무대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무표정한 푸주한. 그가 들고 있는 건 토실토실한 흑돼지 두 마리였다.
“오오!”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벌렸다.
“게다가… 네놈 새끼들이 어설프게 요리할까 봐, 특별히 우리 푸줏간에서 정육도 해주라는 흑색탑 아랫님들의 자비로운 지시도 있었다!”
그 말에 또다시 사람들이 오오, 소리쳤다.
“자, 그럼. 경매를 시작해야지? 시작가 30부터.”
“30!”
“35!”
돼지 두 마리를 먹기 위한 치열한 경매가 이어졌다. 경매를 진행하는 여인을 유심히 살피던 쿠제가 넌지시 물었다.
“혹시 저 나이 든 여인이 그 로이넨서입니까?”
“저 여자? 아냐.”
루빈은 주변 사람들이 핏대 세워가며 조금씩 경매가가 높아지는 걸 둘러봤다.
“킬리언을 만나려면 술집에 가야 해. 술집에 들어가려면 표가 필요하고. 여기서 표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군.”
회귀 전에는 푸주한들에게서 치아로 술집 입장표를 구매하는 방식이었다. 지금은 그로부터 9년 전이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거길 가봐야 하나.’
루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따라 일어나는 쿠제는 살짝 불안한 기색이었지만, 루빈은 여전히 덤덤했다.
“이동하자.”
“그런데 돼지가 어디서 나왔을까요? 농장이 있는 것 같진 않던데요.”
그건 루빈도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9년 뒤의 흑색구역이라면, 중심부 한쪽에 축사가 운영되고 있었다. 당연히 그걸 소유한 자는 지금의 요릭과 같은 흑색구역 지배자였고.
하지만 지금의 방식은 다른 것 같았다. 농장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까 그 여자가 흑색탑이라고 했지. 그건 또 뭐지?’
생경한 명칭에 뒤늦게 의문이 뒤따랐다. 흑색구역으로 들어온 뒤로 탑이라고 할 만한 건 눈에 안 띄었는데.
그때 루빈을 지나쳐 후다닥 무대 쪽으로 내달리는 중년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벌게진 눈으로 손에 든 호주머니를 휘휘 내저었다.
“90! 90! 90에 내가 된 거 맞지?”
“흐음, 일단 세어 봐야지.”
“받아!”
푸줏간 사장이자 경매관리인이기도 한 여자가 호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탁자에 와르르 쏟아진 건, 그동안 사내가 부하들을 부려가며 모아온 인간 치아였다.
그런데 눈을 가늘게 뜨고 치아를 세던 여인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쥐새끼처럼 무슨 짓이냐? 어금니 하나가 모자라잖아.”
“뭐? 마귀 같은 년아. 확실해?”
“세어보든가.”
흑색구역의 통화 가치로 보면 어금니가 일반 치아보다 높았다. 인당 개수가 한정돼 있으니 희귀할 수밖에. 비유하자면, 금화와 은화의 차이와 비슷했다.
아무래도 여인 말처럼 어금니 하나가 모자라는지, 사내의 목에 핏대가 세워지며 부들부들 몸이 떨렸다.
“어, 어디 갔지?”
“3분 주지. 그 안에 못 구해 오면 경매 취소야.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알지? 네놈 아가리 속에 든 허연 것들은 모조리 뽑히는 거야.”
옆에 선 푸주한이 거대한 쇠집게를 집어 들자, 사내의 얼굴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기다려! 기다리라고!”
그러면서 사내는 푸줏간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을 불러왔다. 그러곤 그중 한 놈을 지목했다.
왼쪽 팔이 없는 부하였다. 팔 잘리기 전에 새겨졌을 일련번호가, 이제는 어깨까지 올라와 있는 자였다.
“야. 너, 입 벌려.”
“네? 형님, 그게 무슨…….”
“새끼야, 입 벌리라고!”
뒤따라온 부하들이 외팔이를 부둥켰다. 우두머리는 조그마한 조각칼을 꺼내 외팔이의 입안에 쑤셔 넣었다.
“끄아아아악!”
끔찍한 신음이 울려 퍼졌지만, 푸줏간 내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익숙한지 그러려니 지켜보았다.
“자! 됐지! 어금니 하나 더했다?”
어금니를 받아 든 중개관리인은 또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장난하지 마.”
“하, 진짜!”
“세공하지 않은 치아는 안 받는 거 알면서. 너, 잇몸으로 씹고 싶어?”
사내는 고래고래 욕설을 내질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이 여자는 하급관리에 속했다. 칼을 들이대 봤자 손해를 보는 건 사내 쪽이었다.
“기다려, 기다리라고! 그래도 우리, 꽤 오랫동안 알았잖아? 금방 구해 올 테니까.”
“한 시간. 더 이상은 못 봐줘. 알잖아? 나도 말단이라고.”
사내는 부하 하나를 불렀다.
“너, 여기 딱 붙어 있어. 세공사 만나고 올 테니까. 아, 그리고 이 새끼 어금니 다 뽑아놔. 이왕 하나 뽑은 거, 두세 개 더 뽑는다고 별일 있겠어?”
사내는 성큼성큼 계단식 의자를 건너뛰며 푸줏간 밖으로 향했다. 붙잡힌 외팔이가 또다시 울부짖었지만 소용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지켜보는 쿠제를, 루빈이 흔들었다.
“가자, 쿠제. 우리도 세공사한테 가야 하니까.”
흑색구역의 세공사.
그 또한 푸줏간 사장과 같은 하급관리 중 하나였다. 흑색구역이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는 덕분에, 그는 이 무법지대에서 비교적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야, 이거 세공해 줘!”
돼지 두 마리를 낙찰받기 위해 헐레벌떡 뛰어온 사내가 세공사한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세공사는 안경을 삐쭉 올리며 사내를 노려봤다.
“이게 미쳤나. 네가 사는 세상은 공짜로 돌아가냐?”
그때, 뒤이어 또 다른 손님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세공사는 모처럼 마주한 백의에 눈을 반짝였다. 루빈과 쿠제는 순서를 기다리기 위해 뒤편에 줄 섰다.
“이 관리자 새끼들, 다 뒈져 버려라.”
그러면서 사내는 주머니를 뒤적여 엄지만 한 크기의 금덩이를 마지못해 꺼내, 세공사 앞에 툭 내려놓았다.
쿠제의 눈이 또 커지는 순간이었다. 돼지 두 마리를 위해 치아를 뽑고, 그걸 세공하려고 금덩어리를 내다니. 미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 이 정도는 해야지.”
금덩이를 챙긴 세공사는 빠르게 어금니 세공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이 어금니가 흑색구역에서 통용되는 화폐라는 문양을 새긴 다음, 다시 돌려주었다. 사내는 헐레벌떡 나갔다.
루빈의 차례가 됐다. 둘을 눈여겨보던 세공사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삐죽 올렸다.
“어서 오쇼.”
“술집 입장표를 받고 싶은데. 얼마면 되지?”
루빈의 한마디에 세공사가 입술을 오므리며 장난스러운 탄성을 내뱉었다.
“오늘 들어온 허연 비둘기한테서… 그것도 꼬마 새끼한테서 말이지, 술집 입장표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제대로 찾아왔구나.’
루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얼마면 되지?”
백색 로브 안쪽에 손을 넣어 주섬주섬 뭔가를 찾았다. 루빈의 그런 동작에, 세공사는 오른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지점에 올려두었던 무기로 손을 뻗었다.
아무리 꼬마라고는 하지만 여기는 흑색구역이니까. 세공사가 하급관리라는 걸 모르는 미친놈들도 종종 있기 마련.
“뭐 하는 거냐, 꼬마야?”
“값을 치러야지.”
루빈 손에 들려 나온 건 작은 호주머니였다. 뭔가가 두툼하게 채워져 불룩했다. 루빈은 그걸 세공사 바로 앞에 내려놓았다.
“허, 돈이 있었다고? 설마 금이나 보석 같은 건 아니겠지? 여기선 그딴 거 쓸모없어.”
“걱정 마.”
세공사가 호주머니를 끌렀다. 이윽고 호주머니를 내려다보던 그 눈이 끔벅거렸다. 호주머니를 가득 채운 건 각종 치아였다. 인간의 치아. 심지어 세공된 상태였다.
“너희들, 뭐 하는 놈들이지? 왜 내가 3년 전에 세공했던 치아를 가지고 있는 거야?”
세공사는 자신의 작업 흔적을 알아보았다. 안 그래도 오래전 세공했던 치아들이 흑색구역 안에서 돌지 않아 이상하게 여기던 차였다.
루빈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 지난밤, 루빈을 백색탑까지 안내했던 시장의 하수인이 건네준 거라고 밝힐 필요는 없으니.
“이게 필요할 겁니다. 그게 흑색구역의 화폐랍니다. 몇 년 전 시장님께서 구해놓은 겁니다.”
아마 시장은 요릭과의 거래를 통해 흑색구역의 화폐를 얻어놨겠지.
톡톡.
루빈은 세공사의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세공사의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흥미를 느끼는 동시에 경계심까지 살짝 더해졌다.
“우리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
“뭐, 그야 그렇지.”
“이 정도 돈이면 술집 입장표는 충분히 살 것 같은데.”
입장표 두 장을 사기에 충분한 정도가 아니었다. 구역의 돈의 흐름에 영향을 끼칠 만한 양이었다.
“아, 그 전에.”
루빈은 다시 호주머니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세공사가 입맛을 다셨다.
“흑색탑이 뭐지?”
“뭐?”
세공사의 눈빛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흑색탑도 모르면서 술집 입장표를 사려는 거였어? 설마 너희… 진짜 술을 마시려는 건 아니겠지?”
“아, 술집과 흑색탑이 관련 있다는 뜻인가?”
“흠.”
세공사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애송이들이었어.’
무려 흰색 옷을 대놓고 입고 다니는 놈들이다. 갑자기 입장표를 찾질 않나, 3년 전에 사라진 이빨들을 들이밀지 않나.
진작 알아봤어야 했다. 놈들은 이 흑색구역이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이런 애송이들에게 호구 잡혀서는 안 되지.
“맨입으론 안 되지. 여기선 사소한 정보도 다 거래 대상이야.”
“그래서?”
“세 개 더. 전부 어금니로.”
“치졸하군.”
“싫으면 꺼지시든지.”
루빈은 피식 웃어버렸다. 내뱉은 말과는 달리, 세공사의 얼굴은 잔뜩 안달이 나 있었으니까.
개에게 뼈다귀 던져 주듯, 루빈은 주머니에서 이빨 몇 개를 꺼내 툭 던졌다.
“어금니 네 개. 대신 제대로 설명해야 할걸? 내 마음에 안 들면, 이거 전부 들고 그대로 청소부한테 갈 거니까.”
‘청소부’가 흑색구역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세공사도 잘 알았다.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청소부 놈들은 이빨 외엔 섬기는 자가 없다. 놈들을 상대하려면 의뢰인보다 더 많은 이빨을 지불하는 수밖에 없다. 그건 정말 상상도 하기 싫었다.
“…거래할 줄 아는 꼬맹이 손님이셨구만. 그런데 어차피 흑색탑에 갈 거라면, 그딴 이빨 무더기 따윈 무의미하다는 걸 명심해. 거긴 바깥세상이랑 똑같거든. 치아는 개뿔, 금이 없으면 비렁뱅이 신셀 면치 못할 거다.”
“오지랖 고마워.”
“아무튼, 정말로 흑색탑에 들어갈 생각이라면 일단 들어갈 수 있을지부터 걱정해야 할 거야.”
“입장료가 또 따로 있나?”
“바깥에서 떵떵거리고 살았던 모양인데, 흑색탑에 들어가려면 금이나 이빨만으로는 안 돼.”
“흠. 통과의례가 있다는 뜻인가?”
아마 그건 술집에 입장한 이후에 치러지는, 흑색탑에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겠지. 세공사는 속 시원히 대답해 주지 않았다.
“아직 거래가 안 됐잖아? 값을 지불해야 물건을 주지. 안 그래?”
그러면서 시계를 톡톡 두드렸다.
“서둘러야 할 거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거든.”
“좋아, 거래 조건을 바꾸지. 입장표에 설명까지. 단, 여기 있는 이빨 대신 이 옷을 줄게. 어때?”
옆에서 듣고 있던 쿠제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루빈을 바라봤다.
세공사의 말대로 어차피 흑색탑에서는 이빨이 불필요할 텐데, 왜 이빨로 지불하지 않는 거지? 아니, 그보다 입고 있는 이 백의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
그러나 쿠제의 예상과 달리 세공사는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꿀꺽 침을 삼키고, 미세하게 눈동자가 떨린다.
“아니면, 이 옷을 그냥 푸줏간 사장한테 넘길까? 꽤 눈독 들이던데. 너도 그걸 원치는 않잖아?”
허풍이 아니다. 푸줏간 경매관리인이 몇 번이나 루빈의 옷을 쳐다봤는지 말하면, 아무도 믿지 못할 거다. 게다가 루빈은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세공사 또한 이 옷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도 눈치챘다.
이 옷이 뭐라고. 잘은 모르지만 엄청난 사치품인 건 분명했다.
“좋아! 거래하지. 입장표에 설명까지.”
결국 세공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아는 만큼 다 말해. 흑색탑의 정세까지 말해줄 수 있으면 좋고.”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일단은…….”
“시간은 충분한 거야?”
루빈은 세공사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아까 세공사의 말로 추측해 보면, 흑색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시험을 치러야 하고, 그 시험은 특정 시간에만 치러지는 것 같았다.
“걱정 마. 아직 한 시간은 더 남았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일단 조심히… 그 로브나 넘겨주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