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흑색탑의 미래 (1)
킬리언이 물었다.
“어째서 오러를 갖고 있는 거냐, 꼬맹아?”
킬리언이 술병을 움켜쥐었다. 서늘한 적대감이 배어나는 눈빛이었지만, 루빈은 태연했다. 의자를 끌고 와 킬리언 맞은편에 앉았다.
“좋아, 대답해 줄게.”
이건 정보 교환이었다. 루빈은 원형경기장에서 느꼈던 6성의 경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감지되지 않는 암연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킬리언만의 고유한 능력인지, 아니면 6성 암연만이 갖는 특성인지. 그걸 알아낼 수 있다면, 루빈이 숨겨왔던 비밀 중 하나쯤은 내어줄 수 있었다. 물론 약간의 세공을 거쳐서 말이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본가에서 암연과 오러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거냐?”
“아냐, 그랬으면 더 좋았겠지.”
“그럼 네가 돌연변이라는 뜻인데.”
벌컥벌컥. 킬리언이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 들이켰다. 그러면서도 그 흐릿한 눈빛은 루빈에게 꽂혀 있었다.
“크하……!”
킬리언이 탁자에 내려놓은 파란색 유리병에서 익숙한 주향(酒香)이 났다.
루빈의 유모 퓌레도 가끔씩 홀짝거리던 로이넨 가문의 특제 술, ‘오아쿰’. 파출리와 블루베리를 이용한 담금주였다. 킬리언은 흑색탑에 살면서 그걸 직접 주조한 듯했다.
탁자 위에는 100병도 넘는 오아쿰이 올라와 있었고, 바닥에도 마찬가지로 수십 개의 빈 병이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킬리언이 입을 열었다.
“암연과 오러, 둘은 무의 경지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가는 길이 달라.”
오러는 ‘몸 밖의 한 점’으로 응집하는 힘.
암연은 ‘몸 안팎으로 확산’하는 힘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러는 오로지 무기에만 집중시킬 수 있는 힘, 암연은 신체 부위를 비롯해 몸 밖으로 퍼뜨릴 수 있는 힘이란 뜻.
“이론적으로는, 검식이 육체에 자연스럽게 배어날 때 비로소 오러 발현이 가능해지지. 하지만 거기엔 필수적인 조건이 있잖아?”
“…….”
“바로 암연이 없는 자여야만 한다는 거.”
암연을 지닌 자는 오러를 발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성질이 다른 이 둘은 서로 배척하지는 않지만, 결코 하나의 환에 담길 수 없다. 물과 기름의 관계라 보면 되었다.
이것이 킬리언이 그동안 지니고 있던 개념이었다. 오늘 원형경기장 한복판에서 흑칠의 오러를 뿜어내는 루빈을 목격하고 나서, 와르르 무너졌지만.
“너, 대체 뭐냐?”
루빈을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 않았다. 세상에 있어선 안 될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 루빈은 무심히 대답했다.
“암연 덕이야.”
“뭐?”
“암연 때문에 내가 오러를 발현시킬 수 있는 거라고.”
루빈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킬리언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신경질적으로 딸꾹질을 해댔다.
암연 때문에 오러가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암연 덕에 오러를 발현시켰다니. 말장난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그 순간, 킬리언은 자신의 감각을 의심했다. 루빈에게서 ‘두 겹’의 암연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하나가 아닌 둘이라고?’
믿을 수 없어서 처음엔 쿠제의 암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쿠제에게선 그의 암연이 따로 감지되었다.
“지금 무슨 속임수를 부리는 게지?”
속임수라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반세기를 암살검가의 가신으로서 살아온 킬리언에게 두 겹의 암연이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았다.
하나의 몸에 하나의 환. 이건 자연의 섭리였다.
그렇다면 이 꼬마는, 하나의 환에 두 겹의 암연이 깃들었다는 뜻인데, 그건 돌연변이이자 별종이었다. 차라리 하나의 태양이 두 개로 쪼개졌다는 말이 더 믿길 만큼.
반면 루빈은 덤덤했다. 자신의 두 암연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킬리언이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물론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서.
“난 암연을 두 겹으로 쪼갤 수 있거든.”
“뭐?”
“하나는 4성, 다른 하나는 3성쯤.”
뒤에 덧붙인 말은 사실이었다.
다시 태어나면서 얻은 암연은 어느덧 4성.
회귀 전 암연은 본래 5성이었지만, 6할 정도만 운용 가능한 지금으로서는 3성이라 해야 맞으니.
“이게 뭔 개소리야?”
하지만, 킬리언이 감지하기에도 그랬다.
이윽고 그는 여기에 어떤 속임수도 없으며, 자신이 착각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나 참. 암연을 두 겹으로 쪼갠다니, 암연이 무슨 과자 쪼가리도 아니고. 살다 살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는군. 차라리 환이 두 개라고 하지 그러냐?”
뜨끔했지만, 루빈은 속내를 감추었다. 환이 세 개라고 사실대로 말하면, 아마 자신을 해부하려 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럼 오러는 대체 뭐냐? 암연 덕에 오러를 쓸 수 있게 됐다고?”
“그건 나도 몰라. 암연을 쪼개다 보니까 환에 작은 틈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하나의 환에 암연과 오러를 동시에? 하! 이제 무슨 말을 해도 믿고 싶어지는군. 세이렌이 괴물을 낳았어. 일 나누기 이는 삼, 뭐 그런 거냐?”
“글쎄. 어쩌면 잠시 고였다가 곧 증발해 버릴 수도 있겠지.”
루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대신, 두 암연은 개별적이야. 서로 합칠 수 없거든.”
두 겹의 암연은, 이를테면 왼팔과 오른팔과 같다. 하나씩 다른 역할을 수행할 수는 있지만, 두 팔이 하나가 되진 못한다.
합할 수 있다면, 루빈의 암연은 단숨에 7성이 되었겠지. 그랬다면 킬리언에게 허무하게 당하지도 않았을 터.
축복인가, 저주인가. 킬리언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처음 본 현상에 호기심 가득한 아이처럼 두 눈을 빛낼 뿐이다.
“아예 가능성도 없는 거냐? 두 암연을 합치는 것 말이다. 하나의 환 안에 쪼개진 채로 공존하는 거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없을 거야.”
킬리언의 말대로, 하나의 환에 두 겹의 암연이 담긴 거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개의 환에 담긴 별개의 암연이다. 이를 합치는 건 위험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루빈은 길리필드 수목원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안개고목에 순결한 암연을 주입했을 때, 아주 잠깐이지만 두 암연이 한데 섞였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거긴 암연의 기원지와도 같은 곳이었으니까.’
아무 데서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리고 난 합쳐지지 않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거든.”
“왜 그렇지?”
“언젠가 두 암연을 각각 6성에 도달시킬 거니까.”
“하, 건방지긴.”
벌컥벌컥. 킬리언은 또다시 오아쿰을 들이켰다. 크하, 하며 쓴웃음을 짓는 그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았다.
암연은 암살자의 원천이다. 경계하고, 탐색하고, 감지할 때 쓰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투의 그 찰나마다 육체의 극한을 넓혀준다. 둔한 감각을 종잇장처럼 날카롭게 해주기도 하고, 신체 부위를 감싸 힘을 증폭시켜주기도 한다.
다만 암연에는 절대적인 양이 정해져 있다. 암연을 넓게 퍼트리며 경계할 땐, 그만큼 신체 부위에 두를 암연이 부족해진다. 암연의 총량을 치밀하게 계산하며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루빈의 생각이야말로 효율적이었다. 하나로 통합하여 높은 경지에 올라가는 것보다, 각각의 암연 경지를 올리는 것이 활용성 면에서 훨씬 이롭다.
‘하지만 그것도 5성까지만이지. 둘 다 6성이 된다면…….’
괴로운 기억이 떠오른 것처럼, 킬리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서둘러 오아쿰 병을 쥐고 벌컥벌컥 마셨다.
“야, 꼬맹이.”
“……?”
“내가 왜 술을 마시는 것 같나?”
“그야 술을 좋아하니까? 특히 오아쿰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큭큭, 오아쿰을 좋아하는 건 맞지.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냐.”
킬리언은 다 마시고 남은 빈 병을 바닥에 눕힌 다음, 그걸 의미 없이 굴려 버렸다. 데구루루 굴러간 병이 벽에 탁 부딪히며 멈췄다.
“하여간 세이렌도 자기 아들한테 어지간히 무심했군. 너, 방금 두 암연 모두 6성을 이룩하겠다고 했지?”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1성부터 5성까지 10년 만에 주파한 천재조차, 늙어 죽을 때까지 6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으니까.
그래서 6성의 경지를 ‘신의 놀음’이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시 태어나면서, 지난 생에 가로막혔던 성장의 길이 열렸다. 루빈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내는 중이었다.
“진심이냐?”
“그래. 6성이 되어야만 너처럼 무결한 암연을 다룰 수 있는 거라면, 더더욱 그래야지.”
“좋아, 꼬맹아. 그럼 솔직하게 말해주지. 지금 내 상태를 말이다.”
“상태?”
“네가 지금 ‘무결한 암연’이라고 말했던 거 말이야. 난 그걸 ‘혹한의 암연’이라고 부른다.”
혹한의 암연? 처음 듣는 명칭이었다. 하지만 명명하는 거야 사람 마음이니까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명심해라, 세이렌도 말해주지 않는 걸 알려줄 테니까. 암연이 6성에 다다르면, 그에 따른 대가가 있을 거다. 치르지 않을 수 없는 대가 말이야.”
대가라고? 루빈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그저 더 강해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보상을 받을 수 있지. 네 암연이 얻게 될 보상 말이야.”
고난을 극복해 내면, 더 강한 무언가를 얻게 된다는 말인가? 내 궁금증을 읽었는지 킬리언이 피식 웃었다.
“호기심이 생겼나 본데? 설명해 주지. 6성이 되면서 난 ‘성공적으로’ 대가를 치렀다. 덕분에 다른 암살자들에게도 ‘감지되지 않는 암연’을 갖게 되었지. 일종의 특성이랄까.”
특성. 강화된 암연. 대충 그런 것들을 얘기하는 듯했다. 6성이라면, 그리고 대가를 치른 자라면 누구나 얻는 특전으로 이해됐다.
“그런 걸 그렇게 쉽게 밝혀도 되는 거야? 네 약점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제법이라는 듯 껄껄 웃는 킬리언.
“왜, 너 같은 꼬마한테 내가 목이라도 따일 것 같으냐? 누가 세이렌 아들내미 아니랄까 봐.”
악의가 느껴지는 농담은 아니었기에 루빈도 따라 웃을 수 있었다. 루빈은 다시 대화 흐름을 잡았다.
“혹시 그 특성이라는 거, 사람마다 다른 거야?”
“호오, 제법이구나. 그래, 맞아. 아마 네 어미는… 나랑은 완전히 다르겠지.”
“너도 모른다는 뜻이군.”
“그래. 6성이 된 뒤로는 세이렌과 대련해 본 적이 없으니까. 특성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 추측도 할 수 없어.”
“그렇다면 그 ‘대가’라는 것도 사람마다 다른 거겠지?”
킬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새로운 오아쿰 병을 땄다. 벌써 몇 병째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문득 루빈은 킬리언이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자신이 왜 술을 마시는 것 같으냐는 질문.
그에게 묻자, 명쾌한 답이 나왔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지. 대가라고 했지만 차라리 ‘저주’라고 부르는 게 나을 거다. 그만큼 고통스럽거든.”
“어떤 고통이지?”
“나는 몸속이 꽝꽝 얼어붙는 기분으로 매일을 살아간다. 아마 세이렌도, 나와 비슷하거나 더 고통스러운 저주를 감당하며 살아가겠지.”
오랫동안 시달려 온 끔찍한 고통. 킬리언은 이 풋내기 암살자들에게 그걸 꺼내 보여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몸을 반으로 갈라서라도 말이다.
그걸 본다면, 그 누구도 6성의 ‘ㅇ’자도 꺼내지 못할 테다.
깨어 있는 매 순간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몸속을 파고든다. 피부 아래서 혹한의 설원이 펼쳐져 있는 것만 같은 극한의 고통을, 그저 견뎌내야만 했던 킬리언이다.
대륙의 명의도, 치유마법의 대가도, 암살검가의 의사도 소용없었다. 그나마 술. 도수가 상당한 오아쿰만이 잠깐의 평온을 가져다줄 뿐.
그런 고통을, 이 꼬마가 짊어질 수 있을까?
“난 암연이 두 개야. 내가 6성이 되면 저주도 두 개가 되겠네.”
“하! 이제야 좀 겁이 나나 보지? 아무나 짊어질 수 있는 고통이 아니니…….”
“상관없어.”
루빈의 나직한 말이 방 안에 울렸다.
“뭐라고?”
“그런 저주 따위, 상관없다고.”
“…한 치 앞도 모르는 꼬맹이 새끼야.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나중엔 날 찾아와 애원하겠지. 내가 잘못 생각했었다고, 제발 이 고통을 끝내달라고 말이야.”
루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허풍이 아니었다.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진심으로 상관없었다.
그게 텔마흐를 향한 복수를 완수한 다음이라면 더더욱. 그게 무슨 고통이든 웃으며 즐길 준비가 이미 오래전부터 되어 있었다.
오히려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금 루빈이 보고 있는 것은 두 개의 저주가 아닌, 두 개의 보상이었으니까.
‘각각 다른 두 개의 특성이라.’
구미가 당겼다.
어떤 특성을 얻게 될지.
또 그걸 어떻게 활용할지.
“킬리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돌려 말하고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징징거려도 좋아. 언젠가 너랑 정식으로 싸워 이겨서 그렇게 해줄게.”
그 말에 킬리언은 큭큭 웃으면서도, 동시에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한낱 꼬맹이가 지껄이는 말일 뿐인데, 이상하게 위안이 되지 않나.
심지어 저 말투, 저 눈빛.
세이렌의 어릴 적 모습과 묘하게 겹친다. 담대한 두 모자(母子)의 모습이 마치 오아쿰을 들이켰을 때처럼 아주 잠깐, 추위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하여간 로이넨 핏줄이란.’
서로 얻어내야 할 정보가 오간 이후.
이제는 본래의 용건을 밝힐 차례였다. 루빈이 편지를 꺼내자, 킬리언은 짧게 친 수염을 만지작대며 나직하게 말했다.
“크흠, 시장이 보낸 편지겠지.”
역시 예상하고 있었군. 난투를 위해 위장하고 있던 킬리언이었으니 그럴 거라 생각하긴 했다.
사실, 킬리언은 지난 밤 루빈이 시장을 만났을 때부터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흑색탑으로 자신을 찾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요릭을 설득하는 일은 쉬웠다. 하루하루 심심해 죽겠다는 자였으니까. 참수대장 킬리언이 사자머리를 쓰고 직접 난투에 참여하겠다는데, 그런 짜릿한 볼거리를 마다할 리 없었다.
“드디어 결심했군. 자, 받아.”
편지를 읽은 킬리언이 무심한 태도로 그것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덕분에 루빈도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암레트의 마법 인장이 새겨져 있었고, 그 뒤에는 단 두 문장이 적혀 있었다.
-요릭을 죽여라. 그 시체를 백색탑으로 보내라.
“언제 실행할 거지?”
“요릭은 6성의 네크로맨서다. 음화된 마나를 다루는 고약한 놈이지. 보통이 아닐 거야. 부대장들도 한가락 하는 새끼들이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임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킬리언은 오아쿰을 홀짝거리며 가벼운 콧노래를 불렀다.
“이제야 지긋지긋한 흑색구역에서 벗어날 때가 왔구만.”
루빈은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언제? 사형수 추첨일 이후일 수도 있나?”
일주일에 한 번, 속죄의 눈이 내리면 열리는 사형수 추첨일. 그럼 며칠 안 남았다.
“아마 그럴 거다.”
루빈은 잠시 고민했다.
앞으로 펼쳐질 일들을 얘기해 주어야 하나?
암레트가 이번 추첨에서 뽑힐 사형수로 누구를 내정해 두었는지. 그게 바로 킬리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로 인해 조건부 임무가 발동, 요릭과 암레트 둘 다 죽이게 될 거라는 사실까지도.
‘그만두자. 어차피 내가 개입하든 안 하든 펼쳐질 일이니까.’
이렇게 결정한 루빈은 킬리언에게 거점창고를 이용하겠다고 말했다. 흑색탑에서는 참수대장이라 불렸지만, 본래 역할은 암살검가 거점창고의 관리인인 킬리언이다. 그가 씩 웃었다.
“창고에? 녀석, 날 잘 잡았네. 마침 물품이 쌓여서 다음 달쯤 반출시키려던 참이었는데.”
“그래? 잘됐네.”
거점창고의 무구들은 일정 시기가 되면 본가와 방계가문으로 반출된다. 딱 좋은 시기에 방문한 셈이다. 여기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을 선점할 수도 있고 말이다.
저택 지하로 내려가기 전, 킬리언은 한쪽에 서 있던 쿠제를 소리쳐 불렀다.
“어이! 덜 떨어진 로이넨서! 너도 따라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