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흑색탑의 미래 (4)
“나랑 쿠제는 창고에 있을게.”
“귀찮은 것들…. 적당히 하고 빨리 골라.”
요릭의 저택을 다녀온 뒤. 루빈은 다시 거점창고로 내려갔다. 오늘 안으로 마음에 드는 무구를 골라내라는 킬리언의 말이 있었지만, 그건 모를 일이었다.
“도련님, 이것 좀 보십시오.”
쿠제가 붉은빛이 감도는 단검 한 자루를 찾아냈다. 창날과 비슷하게 생겨서, 손잡이 부근에 손가락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있는 단검. 흔히 ‘쿠나이’라 불리는 무기였다.
“티나한테 딱 맞겠는데.”
“좀 작지 않을까요? 전 비수로 쓰면 어떨까 싶었거든요.”
쿠제의 우려처럼 검신의 길이는 고작 손바닥 정도. 쿠나이 중에서도 작은 편이었다.
하지만 루빈이 알아본 가치는 달랐다. 붉은빛이 감돈다는 건 ‘적광석’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의미한다. 대륙 북부에서만 채굴되는 ‘적광석’은 무기 재질로 최상급에 속했다.
“작은 고추가 매운 법이지. 챙겨둬.”
잠시 후, 루빈은 쿠제의 손 위에 또 다른 단검 하나를 얹었다. 마찬가지로 손바닥만큼이나 작았다.
“이것도 티나 님 건가요?”
“응, 하나만 주면 섭섭해할 거야.”
“카람빗이군요.”
독수리의 발톱처럼 안쪽으로 굽어진 단검. 길이가 짧고 무게중심이 낮아, 역수로 쥐든 정수로 쥐든 적은 힘으로도 몇 배의 위력을 낼 수 있는 무기였다.
게다가 무엇보다 티나가 좋아할 만한 확실한 이유도 있었다.
“아, 보석 세공품이네요. 티나 님이 침 흘리며 좋아할 게 분명합니다.”
“응. 환혈족이니까. 뭐, 티나가 직접 쓸 일은 없겠지만.”
쿠나이처럼 재질이 우수한 건 아니지만 검신에 푸른빛 보석이 세공되어 있었다. 반짝임이 강해 무구라기보다는 장신구에 가까웠으나, 티나라면 당연히 이쪽을 선호할 것이다.
한 시간쯤 지난 뒤.
이번엔 쿠제가 자신에게 맞는 무기를 찾아냈다. 마찬가지 적광석 재질의 곡도였다. 일반 곡도와는 다르게 양날 형태로 제련됐다.
“파르판?”
곡도의 검신엔 ‘파르판’이라는 이름이 각인되어 있었다. 대장장이의 인장이거나 검의 이전 주인 이름일 터. 쿠제는 ‘파르판’이란 검명을 그대로 이어 쓰기로 마음먹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파르판을 휘두르는 쿠제를 보며 루빈도 만족했다.
쿠제든 티나든, 당장 쓸 만한 무기가 없었다. 이름난 보구들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무구를 얻을 때까지 임시로 쓰기엔 더없이 좋을 것들이었다.
이젠 루빈 차례. 창고 깊숙이 더 들어갔다.
‘글레이튼의 팔찌의 행방을 알아내긴 했지만.’
아직 손에 넣은 것은 아니었다. 갖게 되리란 보장도 없었고. 상황에 따라 빼앗거나 싸워야 할 수도 있다. 루빈도 당장 쓸 만한 무기가 필요했다.
‘여기가 끝인가?’
저벅저벅.
발소리가 벽을 타고 되돌아온다. 어느덧 창고 가장 깊숙한 지점까지 와버렸다. 창고 구석, 꽤 커다란 상자가 눈에 띄었다.
상자를 끄집어냈다. 반쯤 파손된 마법 자물쇠 때문에 완전히 열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손을 집어넣어 단검들을 하나하나 쥐어보는데.
“……!”
어라. 루빈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냉기였다. 열기로 착각할 정도의 극한의 냉기가 순간적으로 온몸을 휘감았다. 그렇게 냉기의 근원지를 찾아 손을 휘젓다가 발견한, 또 다른 상자.
‘상자 안에 상자?’
단검들이 쌓여 가려져 있던 아래에서, 가까스로 꺼낼 수 있었다. 상자를 열자 또 다른 상자가 나왔다. 그리고 또다시 뿜어지는 냉기.
‘설마…….’
“도련님, 괜찮으세요?”
쿠제가 걱정하는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냉기에 온 신경을 빼앗겨 누가 다가온다는 것조차 몰랐다.
“요 꼬맹이가 기어이 찾아냈구만?”
킬리언도 함께였다. 묘한 웃음 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원래 세이렌한테 가야 하는 건데.”
그랬겠지.
루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회귀 전, 어머니 손에 쥐어져 있던 단검. 어머니의 두 명검 중 하나였던, 전설적 보구.
검명, ‘핏빛서리.’
베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린다는 이 단검은, 7성 경지를 넘어섰던 회귀 전 세이렌조차 완벽히 길들이지 못했다.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써보고 싶구나.”
딱 한 번뿐이었지만, 과거 세이렌의 푸념이 똑똑히 기억났다. 분명 더욱 강한 힘이 숨겨져 있으리라.
‘만약 그 힘을 알았더라면… 어쩌면 결과를 바꿀 수 있었을지도.’
결전의 날, 그때의 장면이 떠올라 루빈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순간 핏빛서리의 냉기가 다시 퍼져 나왔다. 처음보다 훨씬 누그러진 기세로. 이를 알아챘는지 킬리언이 너스레를 떨었다.
“녀석도 네가 맘에 드는 모양인데?”
“……”
가져도 될까? 루빈은 고민했다.
가주의 허락 문제가 아니다. 이게 다시 어머니에게 간다 해도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똑같이 반복되겠지.
하지만 자신이라면, 분명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알아내야 한다. 그러려고 회귀한 것이니.
“이걸로 하겠어.”
“예상했다, 꼬마야. 어차피 이 창고에서 네가 못 가져갈 건 없어. 로이넨 혈통의 특권이니까. 다만…….”
킬리언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루빈과 멀찍이 떨어진 자리였다. 바로 앞에 오아쿰 한 병을 놓고, 그 옆에는 자신의 검을 빼놓았다. 그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건 갖고 싶다고 그냥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냐.”
“……?”
“시험을 통과해야 하거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해하지 못한 쿠제가 끼어들자, 킬리언이 피식 웃었다.
“귓구멍이 막혔냐? 세상엔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물건이 있다고. 의지와는 별개로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루빈 도련님을 시험하겠다는 뜻입니까? 저 무구를 가져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암살검가에서의 시험이란, 실력을 증명하라는 뜻.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그건 곧 ‘결투’를 의미했다.
“…물러나십시오, 도련님.”
어느새 쿠제의 손에는 ‘파르판’이 들려 있었다. 이자가 전설적인 가신이었다 하더라도, 조금 전에 얻은 이 무기를 쓰는 한이 있더라도. 루빈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멍청한 놈.”
킬리언은 고개를 내저으며 쯧쯧거렸다.
“내가 아니라, 저 검이 루빈을 시험할 거라는 뜻이다, 얼간아.”
검이 시험한다? 주인을 가려내기 위해서? 쿠제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무기 안에 마법이라도 담겨 있다는 뜻입니까?”
“그랬으면 오히려 쉽지. 마법은 파훼할 방법이라도 있으니까. 하지만 저건 아냐. 뭐랄까. 평생 함께할 임자를 시험하려는 무구의 어떤… 순정이랄까?”
“그게 뭔 소립니까?”
“무구에 깃든 영혼을 말하는 거야, 쿠제.”
루빈이 끼어들어 설명하자 킬리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제법 똑똑하구나, 꼬마야. 저 얼간이보단 네가 훨씬 낫네. 누가 세이렌 아들놈 아니랄까 봐.”
영혼이 깃든 무구, ‘영혼무구’는 대륙을 통틀어도 그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만큼 희귀하고 강력하다. 흔히 ‘보구’라 불리는 것들보다도 훨씬 더. 이것이 ‘신의 무구’, 또는 ‘고룡의 무구’라고도 불리는 이유였다.
다만 강력한 힘을 지닌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아무나 다룰 수 없는 것이다. 루빈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킬리언이 말한 ‘시험’이라는 것도 아마 저것에 깃든 ‘영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나저나, 어머니의 핏빛서리가 영혼무구였다니. 상상도 못 했다.
“그래서, 어쩔 거냐? 잘 생각해라, 꼬마야. 그건 장난감이 아니야.”
킬리언이 경고했다. 한껏 진지한 얼굴이었다.
“네가 책에서 본 옛날이야기 수준의 시험이 아니라고. 네가 아무리 로이넨 핏줄이라도, 곧장 뒈져 버릴 수…….”
“하는 중이야.”
“…뭐, 하고 있다고? 지금?”
정확히 말하자면, 이 단검 상자에 손을 넣었을 때부터 시험은 이미 시작됐다. 처음 느꼈던 냉기가 그 증거다.
“도련님! 그 손, 당장 빼십시오!”
“괜찮아, 쿠제. 그대로 거기 있어.”
안절부절못하는 쿠제와 달리, 킬리언은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당장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저렇게 태연할 수 있나? 꼬맹이인 주제에?
루빈의 대담함은 인정한다. 하지만 저것이 패기일지 만용일지는, 킬리언이 아니라 저 단검이 결정할 것이다.
‘벌써 얼어붙었나?’
루빈의 얼굴이 빠르게 창백해졌다. 킬리언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의 쿠제를 꽉 붙들었다. 시험이 시작된 이상 누구도 멈출 수 없다.
“오아쿰이 필요하면 말해라, 꼬맹이. 몸을 녹여줄 테니까. 그리고 정말 못 견디겠다 싶으면 바로 말해. 내가 팔을 깨트려 주마.”
“뭐라고요?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닥쳐, 얼간이. 그래야 산다.”
킬리언은 지금껏 핏빛서리의 주인이 되겠다고 나섰던 얼간이들을 떠올렸다. 알고 덤비든 모르고 덤비든, 애송이든 베테랑이든 상관없이 그들의 결말은 똑같았다. 꽝꽝 얼어붙었다가 깨져서는 냉동 육편이 돼버리는 운명.
하지만 끝끝내 검의 시험을 넘어선다면…….
글쎄. 그건 아무도 모른다. 옛날이야기가 적힌 책 내용처럼, 고룡의 힘을 얻게 되려나. 어쨌든, 그 추측 하나만으로도 목숨이나 팔을 걸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혹시라도 내가 네 팔을 깨트리게 된다고 해도 원망은 하지 마라. 팔 하나 잃는 걸로 끝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다.”
킬리언은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지만, 스스로 안일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주에게 가야 할 귀품을 다른 무구들과 함께 관리한 잘못은 명백하니.
아들의 팔이 날아갔다고 해서 자신을 책망할 세이렌이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찜찜한 게 가시는 것도 아니었다. 세이렌의 아들이라면, 이유를 막론하고 지켜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몇 분이 흘렀을까. 루빈의 안색이 갈수록 창백해졌다. 시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새파랗게.
“어이. 너 괜찮냐? 말 좀 해봐.”
이윽고 킬리언이 나섰다. 대꾸도 없었다. 루빈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상자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킬리언은 슬슬 다가가며 제 검을 뽑았다.
“…….”
꽝꽝 언 몸뚱이에서 팔만 깨트리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빠르고 정확한 검격이 필요할 거다.
킬리언은 내면에 잠들어 있던 환을 활성화했다. 6성 경지의 단단한 환이 눈처럼 녹아들며, 이윽고 암연이 온몸으로 순환하기 시작했다.
“뭐 하는 겁니까?”
쿠제가 그걸 느끼지 못할 리 없다. 킬리언이 한 손을 들어 제지하며 노려보았다.
“저리 꺼져. 도련님을 죽인 로이넨서란 불명예를 달고 싶은 게 아니면. 루빈, 대답해라. 들리면 고개라도 까딱이라고.”
“…….”
여전히 묵묵부답. 킬리언은 결심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디디려는데.
“괜찮아. 그대로 있어.”
힘이 실린 루빈의 목소리였다. 그러더니 루빈의 암연이 어지럽게 분출됐다. 창백한 안색은 그대로였지만, 확실히 생기가 느껴졌다.
“너 이 자식, 설마 이제 시작하려는 거냐? 아깐 시작했다더니, 다 구라였어?”
핏빛서리의 시험에 든 얼간이들을 수없이 봐왔던 그다. 그 누구도 시험 도중엔 생기를 띨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이제야 루빈이 검을 쥔 거라고, 핏빛서리가 루빈을 얼리는 건 지금부터일 거라고 킬리언은 생각했다.
하지만.
“…후.”
경직됐던 루빈의 몸이 부드럽게 풀려 나간다. 송장처럼 시퍼렇던 안색도 빠르게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짙은 암연이 흉흉하던 냉기를 빠르게 몰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킬리언의 섬세한 암연은, 루빈의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숨을 감지해 냈다.
“설마.”
“끝났어.”
“…끝났다고?”
아직도 어리벙벙한 킬리언의 얼굴. 상황파악이 늦는 듯하다. 그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루빈은 상자에서 손을 휙 빼냈다.
영혼무구, 신과 고룡의 무구라 불리며 수많은 얼간이들을 얼려 버렸던 ‘핏빛서리’가, 시퍼런 빛을 내며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날뛰던 냉기도 이제는 잠잠해진 상태. 분명 루빈이 ‘통제’하고 있는 것이리라.
“어머니한텐 잘 말씀드려 줄 거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농담하는 루빈을 보며, 킬리언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