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82화 (82/258)

제82화. 사형수 추첨 (2)

웅성웅성.

원형경기장은 붉은 표식을 찾기 위한 관중들로 소란스러웠다. 자기가 사형수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그리고 근처 사람이 사형수가 아니라는 사실에 아쉬워하면서.

“어디지? 어디지?”

“일단 이 바퀴벌레들 중에는 없는 것 같군.”

“하여간 운도 좋은 놈들.”

고개를 들어 올려 지상의 흑색구역을 바라봤지만, 주민들 눈에는 붉은 불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어, 저기 봐!”

이윽고 처음으로 붉은 불빛을 찾아낸 누군가의 외침. 이후에 여기저기서 사형수 표식을 발견한 사람들이 이어졌다.

원형경기장의 소란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주민들의 눈빛엔 전에 없던 살기가 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무기를 쥐고 있던 손에는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

어느새 완전히 고요해진 원형경기장. 이제 좌석을 꽉 채운 주민들의 입은 다물어졌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특별관람석 쪽으로 향했다.

그쪽에서 붉은 표식이 점멸하고 있었다. 킬리언이 시종으로 뽑아갔다는 그 꼬마 아이의 머리 위에서.

“한꺼번에 덤비면 저 새끼도 어쩌지 못할걸.”

“하지만 다른 지휘관들도 있잖아. 바로 옆에 프킨 님도 있고…….”

“우리가 아니어도 프킨 님이 얼려 버리겠지.”

이윽고, 주민들이 하나둘씩 관람석에서 내려와 원형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비어 있던 원형경기장이 주민들로 채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한 걸음씩 내디디며 루빈 쪽으로 다가오는 주민들. 긴장된 얼굴이지만, 눈빛에는 살기를 머금고 있다.

“…….”

루빈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고개를 돌려 요릭의 저택을 바라봐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거기엔 붉은 표식이 없었다.

‘킬리언이 아니라… 나라고?’

붉은 표식은 자신의 머리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저를 향해 다가오는 주민들을 내려다보던 그의 귓가에 프킨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아쉽네, 아쉬워. 이렇게 죽여 버려야 하다니.”

프킨은 루빈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그 뒤편에서는 거한 소킨이 시커멓게 녹슨 역병창을 겨누고 있었다.

스응. 스응. 스응.

프킨의 마법이 시전되기 시작했다. 곧 그의 머리 위로 십여 개의 얼음화살이 부채처럼 활짝 펼쳐졌다.

빙격살.

얼음계열 공격 술식 중 기초. 1성 공격 마법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술자의 경지에 따라 위력은 천차만별.

공중에 떠오른 얼음화살의 활촉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루빈은 자세를 고치고, 암연을 끌어올렸다. 일단은 살아남는 게 먼저다.

‘일단 저놈들부터 죽인다.’

그때. 피융 하는 소리와 함께 첫 번째 빙격살이 날아들었다. 루빈이 검을 들어 쳐내자, 얼음이 산산조각 났다.

두 번째, 세 번째 빙격살도 마찬가지. 프킨의 표정에 짜증이 묻어났다. 그 틈을 타서 루빈은 쿠제에게 전음을 보냈다.

-쿠제.

-예, 도련님!

-경기장을 가로질러 갈 테니까, 맞은편에서 만나.

-알겠습니다!

쿠제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경기장 외부로 돌아 나가자마자, 광기에 전염된 주민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

손에 든 무기를 힘껏 머리 위로 흔들며 환호하는 군중. 두 명의 부대장이 루빈과 대치한다는 사실이 그들을 자극한 것이다. 그 귀하다는 얼음마법사의 전투니, 이만한 구경거리도 없을 테지.

“꼬맹아, 제법 치는구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보자.”

루빈은 침착을 되찾았다. 계속해서 쳐내는 것은 암연의 소모가 너무 크다. 프킨의 마나 양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면서, 암연을 함부로 소모할 순 없다.

곧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판단이 섰다. 남아 있던 빙격살이 일제히 날아드는 순간, 그때를 노린다.

피융!

얼음화살들이 루빈을 스쳐 지나갔다. 루빈은 때를 정확히 노려 프킨의 공격을 유려하게 회피하곤, 곧바로 다음 동작을 이어나갔다.

도약, 그리고 은신.

루빈은 순식간에 프킨과 소킨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난간 뒤쪽, 원형경기장의 군중 한복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제기랄!”

프킨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빙격살을 거둬들였다. 문득 머릿속으로 시장의 하수인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방심하지 말라는 시장님의 전언입니다.”

방심이라. 그땐 그저 시장이 처음으로 기회를 주는 것이니, 그만큼 주의하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였는데.

“조그만 새끼가 사람 귀찮게 하는군.”

“이제 어쩔 거야, 프킨? 꼬마 새끼가 저기 한복판에 있는데.”

“어쩌긴, 죽여야지.”

루빈이 관중들 틈으로 섞여드는 그때부터 아비규환이 시작됐다. 주민들은 붉은 표식을 잡아내기 위해 서로 엉키고 얽혔다.

그걸 이용하기라도 하듯, 루빈은 사람들의 다리 아래로 파고들며 종횡무진 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암술.

‘그림자 운율’.

암연으로 폭증한 시야 감각에 두 다리가 어우러진다. 암살검가식 운신의 기초였지만, 어린아이의 작은 체구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데.’

군중 무리가 너무 빼곡했다. 운신만으로는 완전히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프슈욱!

“내 다리! 끄아아악!”

틈을 찾아낼 수 없다면, 틈을 만들면 된다.

‘그림자 포효’.

약간 둔탁한 공격방식이지만, 부드러움만 강조된 ‘그림자 운율’보다는 지금에 더 제격이었다. 루빈은 주민들의 다리를 잘라내며 행로를 계속 만들어냈다.

-도련님!

전음과 함께 쿠제의 암연이 느껴졌다. 쿠제는 저쪽 외곽에서 퇴로를 만들어내는 중이다. 루빈은 그곳을 향해 나아갔다.

‘아무리 붉은 표식이 날 가리키더라도.’

주민들 속으로 모습을 감춰 버린 이상, 프킨은 함부로 마법 공격을 하지 못하겠지.

루빈은 그걸 노리고 주민 속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흑색탑 주민들을 죽일 작정이 아니라면, 범위 공격을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

-쿠제, 물러서!

루빈이 전음을 날렸다. 바로 앞쪽으로 거대한 얼음바위가 허공을 찢으며 쏟아졌기 때문이다.

‘주민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건가.’

‘빙벽’.

범위 마법 중 하나였다. 쏟아지는 얼음바위는 용도가 다양했다. 상대의 경로를 차단하는 방어 수단인 동시에, 적을 깔아뭉갤 수 있는 공격 수단도 되었다.

즉, 루빈 하나 때문에 수많은 주민들이 얼음바위 아래 깔려 버린 것이다.

“뭐 하는 거냐! 프킨!”

소킨이 창끝으로 바닥을 찧으며 소리쳤다. 프킨은 비릿한 미소로 대응했다.

“멍청하긴. 저딴 벌레들이 중요해?”

“뭐?”

“어차피 오늘부로 흑색탑은 완전히 뒤바뀔 거다. 그냥 넌 앞으로 나나 잘 보필하면 돼.”

“미친, 뭔 소리야?”

“날 보필하라고. 그게 앞으로의 네 역할이다.”

“내가 널 왜 보필해? 진짜 미쳐 버린 거냐?”

소킨의 반박에 프킨은 코웃음 쳤다.

“설마 너, 나랑 같은 체급일 거라고 생각한 거냐? 놀랍군. 저 꼬마 새낄 죽이고 나서 너도 손을 좀 봐줘야겠어. 멍청한 새끼야.”

프킨은 멍청한 얼굴의 소킨을 그냥 무시해 버렸다. 그러곤 계속해서 빙벽의 휘식을 그려 나갔다.

경기장을 헤집고 있는 붉은 표식의 움직임을 따라, 거대한 얼음바위가 쾅쾅쾅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사, 살려줘!”

루빈의 빠른 움직임을 얼음바위가 따라잡지 못하면서 결국 죽어나가는 건 흑색탑의 주민들뿐.

“프킨, 그만해! 요릭 님이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너도 알잖아, 요릭 님이 흑색탑을 얼마나 애지중지 키워냈는지!”

그 말이 얼마나 우스운지, 프킨은 피식 웃어버렸다.

“멍청한 새끼야. 저 중에 10분의 1만 진짜 사람이고, 나머지는 그냥 요릭의 해골들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

“그리고 어차피 요릭은 오늘 죽는다. 이제 내가 흑색구역의 지배자가 되는 거라고.”

쾅! 쾅! 쾅!

원형경기장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쏟아지는 얼음바위에 주민들이 터져 나갔고, 그렇게 흩뿌려진 피는 얼음바위의 색을 붉게 물들였다.

피가 얼마나 넘쳐났는지. 사형수를 따라다니는 붉은 표식이 분간되지 않을 정도였다.

“쥐새끼 같으니라고…. 소킨! 이제 네가 내려가서 꼬마 새끼를 잡아 와.”

“알겠어.”

소킨은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웬 생쥐 같은 새끼가 흑색탑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보이기만 하면, 이 역병창으로 꼬치를 만들어주지. 그는 역병창을 움켜쥐며,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때.

“어? 저기!”

쏟아지는 얼음바위를 피하며 경기장을 맴돌던 붉은 표식이 언뜻 보였다. 사형수 꼬마였다. 녀석이 방향을 이쪽으로 틀어 쇄도해 오고 있었다.

“걸렸다, 이 쥐새끼.”

흐읍, 기합과 함께 소킨이 방어 자세를 취하는 그때. 루빈은 이미 그들 눈앞으로 튀어 오르는 중이었다.

서걱.

핏빛서리가 흩뿌리는 서릿발 속에, 루빈의 안광이 서늘하게 빛났다. 소킨은, 자신의 목이 잘려 나가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

단 한 번의 베기.

소킨은 역병창을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한 채 목이 잘렸다.

“하여튼 멍청한 놈들은 도움이 안 된다니까.”

프킨이 여유로운 눈빛으로 벌레를 쳐다보듯,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킨을 바라봤다.

어차피 소킨이 꼬마 놈을 이길 수 있을 거라 확신하지는 않았다. 죽어도 그만이었으니까. 살아 있어 봤자, 소킨은 흑색탑의 차기 주인으로 올라서는 데 방해만 될 뿐.

“그래도 좀 더 싸우고 죽었어야지, 쯧쯧. 한심한 새끼…. 안 그래, 꼬마야?”

“…….”

그 순간, 루빈은 쿠제와 전음을 나누고 있었다. 쿠제는 쏟아지는 주민들을 피해가며 루빈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쿠제.

-도련님! 금방 가겠습니다.

-여기 말고, 킬리언의 저택으로 가서 떠날 준비를 해.

-예?

-가져가야 할 것들을 챙겨. 아, 데리고 나가야 할 사람도 잘 돌봐주고. 그곳에서 대비하고 있어.

-대비, 라니요?

-요릭이 죽고 나면 흑색탑이 달라질 거야.

그게 무슨 말인지, 쿠제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일일이 설명해 줄 시간은 없었다. 어차피 눈으로 확인하면 될 테니까.

-여기는 내가 혼자서 정리할게.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지금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요릭의 저택. 루빈이 아는 것과 다른 미래가 펼쳐졌다. 이 어긋남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가늠이 안 됐다.

암레트가 자신을 사형수로 지목했다면… 어쩌면 킬리언이 실패할 수도 있는 걸까?

지금 당장은 확인할 수 없었다. 우선은 눈앞의 마법사부터 제거해야 했다.

짧은 심호흡과 함께, 루빈이 핏빛서리를 고쳐 잡았다. 스스스스스, 서리가 맹렬하게 피어올랐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신기한 물건을 갖고 있구나.”

프킨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얼음계열에 특화된 마법사였으니, 얼음을 다루는 보구에 욕심을 내는 건 당연했다.

“네가 나한테 죽어주면서 괜찮은 선물을 주게 됐네.”

루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흠, 그건 내가 하려던 말인데.”

“뭐?”

“나도 너한테 얻어갈 선물이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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