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84화 (84/258)

제84화. 사형수 추첨 (4)

완전히 어둠에 잠긴 흑색탑. 요릭이 죽으면서 드러난 흑색탑의 실체였다. 프킨의 마법까지 사라지니, 사방이 캄캄했다.

그때, 저편에서 익숙한 암연이 느껴졌다.

“…이 뒈져 버릴 새끼들!”

킬리언이었다. 그는 길을 가로막은 해골들을 말 그대로 박살 내고 있었다. 암살자답지 않은 움직임이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짐작하게 했다.

곧 학살을 끝마친 킬리언이 소리쳤다.

“어라? 꼬맹이, 안 죽었냐?”

“응, 보다시피.”

루빈의 온몸에 낭자한 전투 흔적들. 갈라진 바닥과 얼음 파편들, 한가운데 널브러진 소킨과 프킨의 사체까지.

“오호, 너도 한바탕했구나!”

“한바탕이랄 것까지야.”

킬리언은 흐뭇하게 웃으며 오아쿰을 들이켰다.

“아무튼. 이제 진짜 지하도시가 됐네. 킬리언, 넌 다친 데 없어?”

“그럴 리가 있나. 말짱해. 네가 사형수로 뽑히지만 않았어도 요릭을 더 부드럽게 죽였을 거다.”

그 말에 루빈은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다시 떠올렸다.

사형수 추첨. 킬리언이 아니라 자신이었다니. 알고 있던 미래와 완전히 비켜나 버렸다.

어째서지?

“왜 암레트가 널 죽이려는 거냐? 왜?”

킬리언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루빈으로서도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글쎄.”

루빈은 빠르게 기억을 되짚었다. 일전에 백색탑 정상에서 암레트와 나누었던 대화 중에 뭔가가 있었나?

세 명의 사형수 후보 중에서 누가 좋겠느냐고 물어왔던 암레트.

‘시민들의 마음을 얻어내는 죽음’이 첫 번째, ‘암레트 본인에 대한 복수를 막아주는 죽음’이 두 번째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황제를 안심시킬 죽음’. 그날, 루빈은 세 번째 사형수 번호를 골랐었다. 암레트는 내 결정을 두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지.

“그렇지, 그렇지. 이번 기회에 이놈을 죽이면 텔마흐도 꽤 흡족해할 거야.”

그렇다면… 설마 텔마흐가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뜻인가? 때가 너무 이른데. 아직 준비해야 할 게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으, 징그러운 새끼들.”

킬리언이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킁킁? 킁킁?

죽음괴수들이었다. 완전히 백골이 된 놈들도 있고, 반쯤 썩어 심한 악취를 풍기는 반백골도 있었다. 놈들은 하나같이 코를 킁킁거리면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추적했다. 그게 놈들의 본능이다.

파샥! 파샤샥!

앞을 가로막는 죽음괴수들 대가리를 부수던 킬리언이 루빈을 돌아보았다. 이제 어쩌겠느냐는 뜻이다.

‘너무 많아. ‘그림자 포효’로 하나씩 뚫는 건 한계가 있어. 이럴 땐 무시하고 빠르게 치고 나가는 게 좋겠어.’

루빈이 먼저 ‘그림자 운율’을 펼쳐 나갔다. 킬리언도 뒤따랐다. 킁킁거리던 죽음괴수들은 잔향만을 겨우 맡았을 뿐이다.

그렇게 도착한 킬리언의 저택.

‘역시 둘러싸고 있었네.’

킁킁? 킁킁! 끄어어어어.

수백이 넘는 죽음괴수들이 저택을 에워싸고 있었다. 당연했다. 저 안에서 쿠제가 아이와 함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죽음괴수들은 산 사람의 피 냄새를 가장 잘 맡는다.

쿵쿵!

저택 문을 부수려는 놈들. 견고한 문이지만 언제까지나 버틸 순 없을 거다. 아무리 쿠제가 지킨다고 해도, 저대로 돌파당하면 아이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루빈은 멀찍이 떨어져서 입구를 틀어막은 죽음괴수들을 주시했다.

‘어쩌지?’

쿠제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신호를 보내야 하나? 아니면 정면돌파를 해야 하나? 하지만 정면돌파 하기엔 놈들의 머릿수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때,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킬리언.”

꿀꺽꿀꺽. 오아쿰을 들이켜던 킬리언이 말해보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디 있지?”

“뭐가 말이냐?”

“비밀통로 말이야.”

킬리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젠가 요릭을 죽일 거였으면, 이런 상황도 대비했을 거잖아.”

“…하여간 잔머리는. 저기다.”

킬리언이 가리킨 곳은 골목 맞은편의 작은 헛간이었다. 돼지들을 키워내는 축사로도 쓰이는 곳이었다.

루빈은 왜 저기에 비밀통로를 만들어놨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흑마법엔 돼지 피가 즉효라더니.’

네크로맨서의 흑마법에 의해 소생된 자들은 돼지를 혐오했다. 너무 역겨워서 기피할 정도로.

‘가장 작은 추격자’라는 별칭이 붙은 유령쥐와 똑같은 경우였다. 돼지 피를 뒤집어쓰면 유령쥐가 추격하지 못하는 이유도, 유령쥐의 탄생 과정에 흑마법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킬리언은 축사 안으로 들어가 돼지들을 몰아냈다. 지푸라기 밑으로 단단한 철문이 나왔다.

“여기다.”

철문을 들어 올릴 때 끼이익 소리가 크게 울렸지만, 둘 다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죽은 자들은 귀가 먹었으니까.

루빈과 킬리언은 단숨에 뛰어내렸다.

벽 곳곳에 돼지의 피가 칠해져 있는 지하 통로가 나왔다. 물기가 찰박거리는 바닥을 걸어 나갔다. 잠시 후, 킬리언이 보여준 적 없던 서재가 나왔다.

암연이 느껴지는 동시에 인기척도 감지됐다. 저쪽에서도 루빈의 등장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이윽고 반갑게 소리치는 쿠제.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도련님!”

“쿠제. 이 통로, 알고 있었어?”

“이 꼬마 아이가 알려줬습니다. 술꾼 할아버지가 신신당부를 했다고 하네요. 대낮에 갑자기 거리가 어두워지면, 서재에 들어와 있으라고요.”

“뭐? 술꾼 할아버지? 저 꼬맹이 새끼가.”

킬리언이 버럭 했지만, 아이는 익숙한 듯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래서, 애한테 동화라도 들려주고 있었냐?”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뭐? 진짜야?”

쿠제와 아이를 번갈아 쳐다보던 킬리언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 동화 따위나 읊고 있었다니.

꼬마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여왕거미한테 물린 노비 아이 몸에서 거미줄이 나오게 되는데, 그 능력으로 오크들을 때려잡고 마을의 파수꾼이 된다는 이야기예요.”

“그게 동화냐? 끔찍하군. 수준 이하 로이넨서가 지어내는 이야기가 그럼 그렇지.”

킬리언이 쏘아붙여도 둘은 개의치 않았다. 시선을 교환하는 두 사람의 눈빛에선 친근함마저 묻어났다.

루빈이 끼어들어 상황을 정리했다.

“아직 안 끝났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정해야 해.”

타닥타닥. 타닥타닥.

그륵. 그르륵.

서재 한가운데 피워놓은 모닥불 소리 너머로, 죽음괴수들의 울음소리가 끼어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흑색탑을 벗어나야 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킬리언이었다.

“이제 여긴 시체들의 도시가 됐어. 흑색탑은 끝난 거지.”

“이 저택도 오래 버틸 순 없을 겁니다. 빨리 움직일수록 좋죠.”

아직까지는 죽은 자들이 저택 문을 부수지 못하고 있지만, 잠깐일 뿐이다. 길어야 오늘 하루 정도.

지금 이 순간에도 산 자들의 피는 죽음괴수들을 자극하고 있다. 그럴수록 놈들은 더욱 격렬해질 거다.

킬리언이 루빈을 바라보며 물었다.

“넌 어떻게 할 거냐?”

“흑색탑부터 빠져나가야지.”

“그걸 묻는 게 아냐. 암레트가 널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고. 필리몬드에 계속 머무르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일 텐데. 빠져나갈 좋은 수라도 있냐?”

“킬리언. 그건 나중 문제입니다. 일단 흑색구역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성공해야 해요.”

쿠제의 말이 맞았다. 킬리언에게조차 간단치 않은 게 흑색구역 밖으로 나가는 일이었으니까.

장벽 위에는 필리몬드의 정예병들과 골렘들이 경계하고 있음은 물론, 암레트의 강력한 방어 마법도 새겨져 있다. 게다가 루빈 머리 위에 떠오른 붉은 표식도 있지 않나.

“사형수 표식이 있는 한 통행증은 아무 쓸모가 없어.”

“알고 있어.”

루빈은 주머니에서 두 장의 통행증을 꺼냈다. 암레트의 마법 인장이 서려 있는 통행증이다.

원래대로라면 이것으로 흑색구역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겠지만, 루빈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쿠제. 이 통행증으로 먼저 나가.”

“예? 도련님은요?”

“난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리고 이것도.”

다시 내미는 두 번째 통행증. 루빈은 옆에 앉은 꼬마 아이를 가리켰다.

“그 아이를 집에 데려다줘.”

“…예?”

곧 말뜻을 이해한 쿠제가 거세게 반박했다.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도련님. 도련님을 놔두고 나갈 수는 없습니다.”

완강한 태도로 고개를 가로젓는 쿠제. 하지만 루빈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날 믿어. 나갈 방법이 있으니까.”

루빈의 시선이 킬리언에게로 향했다.

“킬리언. 요릭의 두개골은 네가 직접 암레트한테 전달할 거지?”

킬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릭 암살의 진정한 목표는 두개골에 담긴 ‘기벤라트의 눈물’이니까. 요릭에게 한 차례 배신당한 바 있는 암레트인 만큼, 킬리언 외엔 아무도 믿지 않을 터.

“하수인이 마중 나오긴 할 테지만, 아마 두개골은 내가 직접 운반하게 되겠지.”

“좋아. 또 궁금한 게 있는데. 다른 사형수들, 지금까지 네가 직접 올려 보냈지? 백색탑으로 말이야.”

“대체 뭐가 궁금한 거냐? 당연하지! 내 별명이 괜히 참수대장인 줄 알아? 그냥 죽이기만 했으면 백정이라 불렸을 거다!”

산 채로든 죽은 채로든, 참수에서 운반까지 킬리언의 몫이라는 뜻이었다. 예상대로였다.

“알겠어.”

“뭐냐? 꼬맹이, 뭐라도 찾아낸 거냐?”

루빈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흑색구역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어.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 * *

필리몬드 광장. 명소로 꼽히는 이곳은, 오늘도 흑색구역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일전에 루빈이 온 적이 있는 음식점의 테라스에도 흑색구역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빈 좌석을 찾을 수 없었다.

여러 귀족들 사이에서 혼자 앉아 있는 중년 여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흑색구역을 내다봤다.

“에이씨, 이놈들은 언제 나오는 거야?”

루빈과 쿠제가 흑색구역으로 들어간 지 6일째. 티나는 매일같이 이 음식점에 와서 몇 시간을 죽치고 있어야 했다.

그녀는 매번 올 때마다 새로운 외형으로 변신했다. 첫날엔 중후한 남자, 둘째 날엔 아리따운 여인, 셋째 날엔 거구의 사내 등. 이젠 무얼로 변신할지 정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오늘이 사형수 뽑는 날이었구나.”

오늘따라 왜 이리 사람이 많나 싶었더니.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흑색구역 안에만 쌓이는 ‘속죄의 눈’이었다.

티나가 손을 들어 음식점 주인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부인?”

“저기요, 원래 저렇게 눈이 많이 내리나요? 벌써 두 시간째인데.”

그 말에 음식점 주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흑색구역을 쳐다봤다. 그로서도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보통은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그치는데.

“그렇군요. 이상하네요.”

“역시 뭔가 문제가 생긴 거 맞죠?”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사형수가 죽으면 눈이 그칠 테니 일단 기다려 보시지요.”

티나는 곧바로 음식값을 치르고 나왔다. 그녀는 귀부인답지 않게 성큼성큼 걸어 흑색구역의 경계 쪽으로 걸어갔다.

그야말로 폭설이었다. 돌아다니는 범죄자들의 다리가 푹푹 빠질 정도였다. 티나는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진짜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그녀가 루빈과 쿠제와 같이 흑색구역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던 것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흑색구역에 들어서자마자 부여되는 범죄 일련번호는 고차원의 표식 마법이다. 그래서 무엇으로 변신하든 일련번호는 떼어낼 수 없었다.

“어?”

그때였다. 티나는 흑색구역의 장벽 너머에서 미세한 암연을 느꼈다. 누군가가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 중이었다.

티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암연을 따라 달렸다. 구역의 서쪽 끄트머리에서 움직임이 멈췄다.

“오, 드디어 나오는 건가?”

티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가만히 기다렸다. 곧 두우우웅, 소리와 함께 장벽의 한쪽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작은 틈이 만들어졌다.

“헉, 헉.”

튀어나온 것은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사내. 어깨와 이마 위로 눈이 한 뼘이나 쌓인 상태였다. 사내가 눈을 털자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쿠제!”

“오랜만입니다, 티나. 이번엔 귀부인이시네요.”

“왜 이리 늦은 거야!”

기뻐할 새도 없이 쿠제는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이내 백색 로브를 뒤집어쓴 꼬마 아이가 뒤따라 나왔다.

“루…빈?”

꼬마는 대답이 없었지만, 이미 그렇게 생각한 티나는 반가움에 펄쩍펄쩍 뛰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본다면 미쳐 버린 귀부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러든 말든. 티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아이의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주었다.

“칠칠맞지 못하게, 옷은 왜 이렇게 큰 걸 걸친 거야? 음……?”

멈칫하는 티나. 루빈 몸집이 이렇게 작았나?

천천히 백색 로브를 들추자 그 아래서 낯익은 얼굴이 드러났다.

“루빈이 아니잖아? 어, 너는……?”

“기억하시죠? 그 아이예요, 티나 님.”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티나의 두 눈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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