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붉은색으로 물드는 백색탑 (1)
흑색구역의 서북쪽. 쿠제가 꼬마 아이를 데리고 나간 방향과는 정반대 지점.
킬리언이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걷고 있었다.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떤 날보다도 심한 폭설이었다.
푸우욱. 푹. 푸우우욱. 푹.
검은 중절모를 눌러 쓴 그 모습은 흡사 장의사를 연상시켰는데, 아닌 게 아니라 그가 끄는 것도 조그맣고 까만 관이었다.
“어이, 오래 기다렸나?”
서북쪽 장벽 위, 경비병들과 함께 기다리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백색 로브를 펄럭이는 그는 암레트의 충직한 하수인이었다.
대외적으로 보좌관으로 알려진 그의 실제 역할은, 참수대장 킬리언이 가져오는 사형수 시체를 백색탑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임무가 우선이었다.
“표적은 제거했습니까?”
요릭을 말하는 것이다. 킬리언은 오아쿰을 한 모금 들이켠 뒤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는, 아니 두개골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차피 시장한테는 내가 직접 가져가는 거 아냐?”
“그래도 확인할 의무는 있습니다. 뒤에 있는 그 관에 있습니까?”
하수인의 표정에 의심이 떠올랐다. 요릭의 체구에 비해 관의 크기가 지나치게 작았기 때문이다. 두개골만 있는 건가?
휘이이잉.
눈발이 점점 거세졌다. 이제는 상체까지 눈 속에 파묻힐 지경이었다. 킬리언은 어깨에 쌓인 눈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낸 다음, 관의 뚜껑을 열어 보였다.
“확인해 보든가.”
관 안에는 일반인보다 두 배는 커다란 요릭의 두개골이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옆, 기대하지 않은 것도 보였다.
어린아이의 시체. 작은 체구와 얼굴이 낯익다.
‘이름이… 루빈이라 했던가?’
하수인은 루빈을 암레트에게 안내했던 지난주의 기억을 떠올렸다. 암살검가 본가의 막내아들이자, 황실의 가려진 핏줄.
“그 꼬마, 죽었습니까?”
킬리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다르게 물었다.
“죽였습니까?”
“그래, 죽였다. 프킨한테 맡길 만한 일이 아니었어. 두 번 일하게 하지 말라고, 내 몇 번이나 말했는데.”
“…내려가서 살펴봐야겠군요.”
하수인이 장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흑색구역 안이었지만, 킬리언은 그에게 일련번호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
하수인이 눈발을 헤치며 킬리언 쪽으로 다가왔다. 킬리언은 등골이 뻣뻣해짐을 느꼈다.
“…….”
그렇게 한참을 살펴보던 하수인.
육안으로는 암살검가의 막내아들이 확실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머리 위에는 사형수임을 나타내는 붉은 표식까지 떠올라 있지 않나. 아무리 암살검가 놈들이라도 표식을 숨길 순 없다.
그런데…….
“문제라도 있나? 뭘 자꾸 들여다보고 있어?”
“…….”
정말로 죽은 게 맞나? 킬리언이 죽였다고 하기에는 시체의 상태가 너무 깨끗해 보였다.
“의외군요. 시장님의 예상이 빗나갔네요. 그분은 당신이 암살검가 혈통을 죽이지 못할 거라고 하셨는데.”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구만.”
하수인은 루빈의 심장에 손을 갖다 대고 잠시 기다렸다. 심장은 뛰지 않는다.
“못 믿겠으면 직접 찔러보든가.”
검을 건네는 킬리언.
“대신 네 목숨을 걸고 찔러야 할 거야. 나는 우리 가주한테 이 시체를 온전히 운반할 의무가 있거든.”
가벼운 말투였지만, 날카롭게 벼린 검처럼 서늘했다. 킬리언은 강하면서도 신의 있는 자다. 저런 자를 상대로 목숨을 걸 필요는 없지.
하수인은 루빈의 몸에서 손을 떼곤 한발 물러섰다.
“시체가 온전한 것은 황족에 대한 예우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루빈이 황족이라는 사실을 짚는 말이었지만, 바로 그게 킬리언의 심기를 건드렸다. 킬리언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눈 위에 침을 퉤 뱉었다.
“암살검가에 대한 예우일 뿐이지. 황족이랑 엮을 생각은 하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
“…….”
황족과 제국을 향한 멸시라니. 간단히 선을 넘어버리는 킬리언의 말에 하수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후, 뱉었다. 황실의 측근을 앞에 두고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려나.
“못 들은 걸로 하지요. 그나저나, 이게 고룡의 눈물…….”
하수인은 관심을 요릭의 두개골 쪽으로 돌렸다. 두개골 안쪽에서 노란빛이 일렁였다. 맞닿은 손바닥으로 잔잔한 파동이 전해졌다.
하수인의 눈에 본능적인 탐욕이 서렸다. 염동괴제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만 덜했더라도, 그는 그 탐욕을 따랐을지 모른다.
“확인했으면 얼른 움직이지? 흑색구역이 눈에 완전히 파묻히게 놔두라는 것도 시장의 지시야? 그게 아니면 빨리 이 관을 내보내!”
그제야 하수인이 두개골을 내려놓았다. 손을 내젓는 하수인. 그에 따라 장벽의 일부분에 틈이 만들어졌다.
“후, 이게 얼마 만에 나가보는 건지.”
킬리언은 관의 뚜껑을 덮기 전에 루빈을 살짝 내려다보았다.
진짜 시체 같다. 그만큼 ‘그림자 침묵’에 제대로 들어갔다는 뜻이겠지. 킬리언은 루빈을 돕는 차원에서 관의 뚜껑을 서둘러 닫아버렸다.
하수인을 따라 구역 밖으로 나갔을 때. 드디어 킬리언의 왼팔에 새겨져 있던 범죄자 일련번호가 스러졌다. 루빈의 관 위로 떠 있던 사형수의 붉은 표시도 마찬가지.
사형수가 구역 밖으로 옮겨지면서, 흑색구역에 몰아치던 매서운 폭설도 순식간에 그쳤다.
* * *
‘뭐지? 왜 나선계단이 지상에 내려와 있는 거야?’
하수인은 자신의 당혹감을 킬리언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애썼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리며.
이상한 일이었다.
“도착하면 곧바로 통신석으로 알리도록 해라. 나도 그 주정뱅이 놈을 맞이할 준비는 해야지. 다 되면 그때 나선계단을 내려 보내주지.”
그렇게 말했던 암레트였는데.
그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쉽게 엎는 사람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일조차 계획에서 어긋나는 것을 혐오하는 자였다. 수십 년을 곁에서 지켜보았으니, 이 상황이 의아할 수밖에.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
“꿀 먹었냐? 나선계단 내려왔잖아. 오르면 되는 거 아냐?”
킬리언은 지겹다는 표정과 함께 오아쿰을 한 모금 들이켰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외벽에 꼭대기와 이어진 통신석이 숨겨져 있다. 하수인은 그걸 작동시켜 암레트에게 요릭의 두개골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리려 했다.
‘끊어져 있어?’
이상한 일의 연속. 내외부로 마나가 풍부한 백색탑에서, 통신석이 끊기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은 킬리언을 꼭대기로 데리고 가야 했다. 그편이 지상에 남겨두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하수인은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
“올라가시죠.”
“뜸 들이긴.”
하수인이 먼저 나선계단에 오르고, 킬리언이 관을 질질 끌며 뒤따랐다.
쿠쿠쿠쿵.
둔중한 울림. 그와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하는 나선계단.
‘나선계단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걸 보면.’
심각한 문제는 아닌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드는 불안과 초조함은 어쩔 수 없었다.
염동괴제를 모시는 입장이긴 했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음흉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지금 자신을 도려내기로 결정하여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이라면…….
그때였다.
콰쾅!
부드럽게 끌려 올라가던 나선계단이 일순간 굉음과 함께 멈춰 버렸다.
“시부럴! 하마터면 우리 도련님 시체를 떨어트릴 뻔했잖아.”
인상을 찌푸린 킬리언이 난간 바깥쪽을 내려다봤다.
휘이이잉.
거칠게 울리는 바람 소리. 그래도 나선계단은 백색탑의 중간까지는 올라온 상태였다. 내려다보이는 거대도시가 아득했다.
“갑자기 왜 멈춘 거지?”
“…잠시 기다리시죠.”
하수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탑의 외벽 쪽으로 다가가 다른 내장된 통신석을 찾아냈다. 다시 꼭대기와 소통을 시도하려는데.
“…….”
이번에도 작동하지 않는다.
“어이, 무슨 문제가 있는 거 맞지?”
“…여기서 기다리시죠. 제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더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던 하수인이 황망한 동작으로 외벽의 벽돌 몇 개에 마법 주문을 넣었다.
투둑. 투둑. 투둑.
그러자 벽돌 몇 개가 튀어나온다.
백색탑에 상주하는 인원들만 쓸 수 있는 임시 이동수단. 긴급 상황에나 쓰이는 이 난간은, 탑 정상까지 수직으로 치솟는 방식이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여간… 이놈의 도시에서는 잠깐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니까.”
벌컥벌컥.
오아쿰이 거의 바닥났다. 짜증 난 척 얼굴을 찡그린 킬리언은, 하수인을 태운 난간이 솟구쳐 올라가는 걸 지켜봤다. 그런 킬리언의 한쪽 손에는 어느새 시퍼런 검이 쥐어져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수인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이 모든 게 암레트의 속임수는 아니란 뜻이다.
그렇다면 단 하나의 가정만 남는다.
지금, 백색탑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흠, 오히려 잘된 일인가.”
나선계단의 꼭대기에서, 하수인을 제거할 계획이었다. 루빈을 탈출시키려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아서 자리를 비워주다니.
덜컹.
킬리언은 관의 뚜껑을 뜯었다. 큼직한 두개골과 나란히 누운 루빈. 혈색이 스러진 그 얼굴은 아무리 봐도 정말 시체 같았다.
반사(半死)의 상태.
‘그림자 침묵’ 덕이었다. 이른바 ‘거짓된 죽음의 상태’를 일으키지만, 실상은 죽음을 간접 체험해 보는 거나 마찬가지. 극도로 위험한 암술이었다.
당연히 혼자서는 쓸 수 없는 기술이다. 일단은 암살검가의 비약을 복용해야 했고, 깨어날 때 다른 암살자의 도움이 필수적이었으니.
‘척살조 전용 암술을 이 꼬마 놈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킬리언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세이렌의 막내아들이다. 예상을 비켜 가는 데는 도가 튼 녀석.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이윽고.
킬리언의 손이 루빈의 심장 위로 얹어졌다.
‘그림자 침묵’에 빠지면, 심장박동은 마치 멎은 것과 비슷해진다. 암연으로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특히 다른 누군가의 손이 얹어지는 동안에는, 반사 상태라는 걸 들키지 않도록 실제로 심장박동을 멈추기도 했다. 다시 말해,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라는 뜻이다.
‘꼬마 주제에 겁대가리도 없이.’
킬리언은 암연을 집중시킨 손으로 루빈의 심장을 압박했다.
암연과 암연의 조응. 그에 따라 심장을 억누르고 있던 암연의 환이 서서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두근두근두근.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스러졌던 혈색도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파핫!”
루빈의 상체가 튀어 오르며 막혔던 숨이 내뿜어졌다. 콜록콜록. 숨통을 뒤트는 거친 기침이 이어진다.
“여긴…….”
상공에서 부는 바람이 루빈 쪽으로 몰아쳤다. 흩날리는 흑발. 루빈은 관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왔다. 난간 너머를 바라보며 이곳이 백색탑 정상으로 향하는 나선계단 위라는 걸 확인했다.
“새파랗게 어린 게 척살조 흉내도 낼 줄 알고 말이야. 그래, 죽어본 경험이 어떠냐?”
“진짜 죽는 것보단 훨씬 나아.”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거냐?”
피식 웃는 킬리언.
루빈도 그저 웃어주었다. 실제로 죽어본 적 있는 루빈 입장에선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
진짜 죽음과 비교하면 이건 가벼운 낮잠에 불과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