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86화 (86/258)

제86화. 붉은색으로 물드는 백색탑 (2)

“그나저나 왜 나선계단이 멈춘 거지?”

“백색탑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군.”

“문제?”

“그래. 그것 때문에 하수인이 잠깐 자리를 비운 거야. 하여간 네놈은 운도 좋다니까.”

쿵.

킬리언은 다시 관의 뚜껑을 닫았다. 이제 관 속에는 요릭의 두개골만 남았다.

“꼬맹이, 이제 네가 할 일은 최대한 빨리 필리몬드를 뜨는 거다. 하수인이 널 보기 전에.”

“넌 어쩔 계획이지?”

“나? 일단 나는 이 대갈통을 암레트한테 전달해 줘야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기벤라트의 눈물인지 똥물인지를 잡수실 수 있게.”

가장 중요한 건 당장 루빈을 피신시키는 일이었다. 놈들이 시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루빈은 이미 멀리 도망간 후겠지.

“그러니까 빨리 네 로이네크로우를 불러. 너, 로이네크로우에 탈 순 있지? 네가 여길 내려가려면 그 방법밖에 없을 거야.”

하지만 티나를 부를 생각은 없었다. 필리몬드는커녕 지상으로 내려갈 생각도.

루빈은 말없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핏빛서리를 꺼내어 상태를 확인했다. 서리가 스스스 피어올랐다. 그걸 본 킬리언이 미간을 좁혔다.

“너, 뭐 하는 거냐?”

“안 갈 거야.”

“뭐?”

귀를 의심하는 킬리언을 정면에서 바라봤다. 그러곤 다시 말했다.

“안 내려가겠다고.”

“그럼 어쩔 건데?”

“올라가야지. 암레트 죽이러.”

킬리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 정말 미치겠군.”

루빈은 지금 농담을 하는 게 아니었다. 머리 위로 사형수의 표식이 생겨났을 때, 루빈은 백색탑 정상에 올라 암레트를 대면하기로 마음먹었다.

‘황제를 안심시킬 죽음…. 암레트는 그 명목으로 나를 사형수로 지명했어.’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황제가 눈엣가시로 보고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저 암레트 혼자 내린 판단에 불과한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황제의 계획이라면,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위협이 앞을 가로막을 테니까. 그건 두고 보면 된다.

지금은 당장의 문제가 급하다.

바로 암레트라는 존재.

회귀함으로써 새롭게 생겨난 적.

미래가 뒤틀리며 피어난 위협 요소.

“기껏 영혼무구를 얻었다고, 네가 그 늙은이를 죽일 수 있을 것 같냐?”

술기운이 가라앉은 킬리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물론 아니었다. 이 몸은 아직 여리고 약하다. 준비되려면 아직 멀었다.

하지만 오늘이 그를 죽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점은 분명하다.

오늘을 놓치면, 하루가 지날 때마다 암레트를 죽일 가능성도 점차 줄어든다. 애초에 죽었어야 할 암레트가 살아남은 미래? 거기다 기벤라트의 눈물까지 차지하게 된다면…….

‘무조건 죽여야 해.’

지금 죽이지 않으면, 회귀 전보다 더 비참한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킬리언. 암레트가 날 죽이려 하면, 넌 어쩔 거지? 날 위해 싸워줄 건가?”

“뭐?”

“암살검가 로이넨의 막내아들을 공격하는 자를 가만히 지켜볼 수 있느냐고.”

암레트 제거에 성공할 확률?

루빈으로서는 1할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 게 사실이다. 두 겹의 암연, 오러의 발현, 영혼무구 핏빛서리, 글레이튼의 팔찌까지.

이런 기연들로도 7성 대마법사와의 아득한 격차는 극복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그건 루빈 혼자서 암레트에게 검을 겨누었을 때의 이야기.

“지금 나를 끌어들이는 거냐? 네가 뭐라고?”

킬리언에게 루빈은 자기가 모셨던 자의 아들일 뿐이다. 로이넨 혈통. 다른 암살자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목숨을 바칠 이유가 되겠지만, 적어도 킬리언에게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오직 로이넨가의 주인에게만 복종한다.

그녀의 아들이 아니라.

“로이넨 혈통이라고 으스대는 것 같은데…….”

루빈은 킬리언의 말을 잘랐다.

“알아. 로이넨 혈통이 아니라, 로이넨의 정점만을 따른다는 거.”

“알면 헛소리 말고 그냥 여기서 냅다 꺼지라고. 나중에 상황이 바뀔 때까지 시체처럼 살아가라. 그게 네가 할 일이다. 암레트를 죽이는 일은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아.”

킬리언은 오아쿰을 홀짝였다. 이미 오래전에 텅 비었음을 알면서도. 백색탑 중턱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이 유난히 따가웠다.

“내가 오늘 암레트한테 죽으면, 너는 뭘 잃는 거지?”

루빈의 나직한 물음. 가볍지만, 동시에 무거운 질문이다. 킬리언은 가볍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기 목숨을 걸고 협박하는 꼴이라니. 피식 웃음이 났다.

“너 같은 거 하나 잃는다고, 세이렌이 눈 하나 깜짝…….”

“암살검가의 그저 그런 아들. 로이넨의 그저 그런 혈통을 잃는 거라고 생각하나? 잘 들어, 킬리언. 내가 오늘 죽으면, 넌 로이넨의 미래를 잃는다.”

미래를 잃는다.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킬리언의 표정이 마구 일그러졌다.

“네가 돕든 안 돕든, 난 싸울 거다.”

결국, 킬리언은 한계에 다다랐다.

“제기랄! 세이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어쩌다가 이런 탕아 새끼를… 아냐, 아니지. 이건 가주의 잘못이 아니지. 데이몬을 족쳐야 하나? 아니, 유모 문제인가? 그래. 로이넨서를 족칠까?”

도리언이었다면, 매피스였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살리려고 애쓰지도 않았을 거다. 아니, 그따위 형편없는 놈들이었다면 애초에 흑색탑까지 도달하지도 못했겠지.

하지만 루빈은 달랐다.

솔직히 말해서, 흑색탑에서 목격한 루빈의 경지, 잠재력. 그건 분명 같은 나이의 세이렌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었다. 역대 최고의 암살자라는 세이렌 로이넨과 말이다!

“망할 꼬마 놈… 빌어먹을 로이넨!”

킬리언을 설득했다는 걸 깨달은 루빈이 차분하게 말했다.

“킬리언, 한 번. 어쩌면 두 번.”

“또 뭔 소리냐?”

“암레트의 공격을 받아낼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그 안에 끝내야 해.”

그러니까, 이 꼬마가 암레트의 공격을 받아낼 동안 저보고 끝장내란 소린가? 제대로 미친 게 분명했다.

“백색탑 정상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관에 들어가 있는 게 낫겠지?”

루빈은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관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그때.

“뭐야, 저거…….”

킬리언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루빈도 동작을 멈추고 그 시선을 따라 하늘을 바라봤다.

휘이이잉.

바람 소리가 아니다. 그들 시야에는 거대한 새가 있었다. 그랑버드가 그들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저건… 비행이 아냐!’

추락 중인 그랑버드. 암레트를 경호하기 위해 황실에서 파견한 정예병 1개 중대. 그 병력을 탑승시킨 채로 추락하는 것이다.

거대한 몸체만큼이나 커다란 두 눈동자가 처참하게 훼손되어 있다. 부리 또한 산산이 바스러진 상태.

“시부랄! 대갈통 들어! 당장 위로 뛰어!”

콰콰콰쾅.

그랑버드가 백색탑 외벽과 충돌했다. 순간, 백색탑이 크게 휘청이는가 싶었지만, 방어 마법 덕인지 붕괴는 가까스로 면했다.

콰콰콰쾅!

굉음과 함께 그랑버드가 지상에 떨어졌다. 시민들의 거주 구역 위로 떨어지면서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비명과 울음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퉁, 퉁, 퉁, 퉁!

충돌과 함께 나선계단에 새겨져 있던 마법이 파쇄되는 소리였다. 이대로 있다간 곧바로 추락이다.

“아직 살아 있냐? 꽉 붙잡아!”

“……!”

“도대체… 도대체가! 가만히 있게 놔두질 않는다니까!”

뒤쪽에서부터 하나씩 낙하하는 계단. 지금 당장은 정상으로 향하는 게 급선무다. 둘은 ‘그림자 운율’을 펼치며 쾌속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헉, 헉.”

백색탑의 정상.

계단이 모두 끊어지기 전에 무사히 정상에 올라온 루빈과 킬리언. 그들이 마주한 건 무거운 적막이었다.

지금 지상에서는 그랑버드의 추락이라는 재난으로 인해 아비규환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그 소란이 여기까지 올라오지는 못했다. 바람만이 이곳의 유일한 생존자인 것처럼 휘이잉 울어댔다.

“저기가 암레트의 저택이다.”

백색탑 꼭대기 중심부. 저택 쪽을 향한 채로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방금까지 킬리언을 안내했던 그 하수인이었다.

“이미 죽었어.”

깔끔한 걸 보니 추락의 여파 때문은 아니다.

암레트의 광기? 폭주? 염동 마법을 거둬 그랑버드를 추락시킬 정도로 미쳐 버린 그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마법이 아니야.’

검의 흔적이 보였다. 심장 위를 그대로 그어 나간 검의 궤적. 단순한 검술이 아니었다. 예시를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경지의 검격.

아마 놈은 자신이 베였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을 거다.

“…루빈. 상황이 바뀌었다. 그만 돌아가. 객기 받아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킬리언도 눈치챈 듯하다. 이전에는 보인 적 없는 단호함을 내비치는 걸 보니.

“내가 널 도와주기로 마음먹은 건 널 살리기 위해서였지, 널 돕기 위해서가 아냐. 여기까지다. 그만 돌아가. 명령이다.”

로이넨 직계 혈통에게 명령이라니, 우스운 농담이었지만 루빈은 웃지 않았다. 따르지 않는다면 기꺼이 루빈을 제압할 기세였으니까.

오아쿰 병을 탑 아래로 내던진 킬리언은, 제 검을 내려다봤다. 이것이 마지막 임무가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서.

“누군가 암레트를 습격한 거야.”

“나도 알아, 꼬맹아. 그러니까 당장 꺼지라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암레트는 죽어가고 있다.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킬리언은 모를 것이다. 백색탑을 이루는 마나가, 폭포 같은 기세로 누수되고 있음을.

“…….”

루빈의 눈길이 향하는 곳은 요릭의 두개골. 그 속에서 노랗게 빛나는 고룡의 눈물.

암레트가 죽으면… 저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때.

루빈과 킬리언, 두 사람이 본능적으로 반응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암레트의 새하얀 저택으로부터 강렬한 암연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루빈은 자기도 모르게 핏빛서리를 꽉 쥐었다. 맹렬한 기세로 서리가 피어올랐다.

“설마…….”

“어쩌면……!”

두 사람은 곧바로 튀어 나갔다. 저택을 감싸고 있던 방어 마법은 이미 파쇄된 상태. 그들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루빈은 기억을 되살려 곧장 암레트의 방으로 향했다. 황족이 지내기에는 단출했던, 암레트의 거처로.

“크흐으윽. 큭큭큭.”

우는 거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울린다.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고개를 돌린 암레트가 루빈을 발견하곤, 끔찍한 미소를 지었다. 눈동자가 텅 비어 있다.

“…….”

그리고 죽어가는 염동괴제를 내려다보는 낯익은 뒷모습.

얼굴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어깨까지 내려와 있는 붉은색 머리, 핏빛을 연상시키는 그 머리칼이 그녀가 누구인지 말해주었으니까.

그르르르.

맹수의 울음소리가 구석에서 흘러나왔다. 붉은 눈, 세상 모든 로이네크로우의 왕인 ‘로호’가, 제 주인의 사냥을 관람하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