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87화 (87/258)

제87화. 붉은색으로 물드는 백색탑 (3)

루빈과 쿠제가 나타나기 전. 암레트의 거처에는 고통에 찬 대마법사의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쿨럭! 쿨…럭.

목 너머에서부터 피가 올라와 넘쳐흐른다. 입가에 고인 피를 뱉어내야 하는데… 그 정도의 힘조차 나지 않는다.

크흑크흐흐….

방 안을 채우는 암레트의 허탈한 웃음. 죽어가는 자의 웃음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다.

‘염동괴제. 황제의 숙부. 7성의 대마법사. 릴리크 제국의 법무대관.’

전부 그를 가리켰던 칭호들이다. 거기엔 그를 향한 두려움들이 배어 있었다. 대륙을 지배하는 황제의 혈통이자, 초인의 경지를 향한 두려움이.

그러나 지금은 무력감뿐이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벌레보다 못하다 생각했던 일개 시민들이,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때, 스치듯 떠오르는 한마디.

“오늘 내 모습을 안다고 믿을지라도, 내일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또다시 웃음이 나온다. 기침하듯 입 밖으로 터져 나온다. 저건 요릭이 황실 사람들을 앞에 두고, 광대 짓을 벌일 때 했던 대사였다.

그 시절에는 그저 키득거리며 지켜봤던 연극이었는데. 지금 이렇게 자신을 짓누르는 한마디가 될 줄이야.

“왜 웃지?”

웃음소리만 괴괴하게 울려 퍼지던 방 안을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목소리.

암레트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인을 바라봤다. 그녀의 핏빛 눈동자. 아무런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이다, 세이렌.”

죽음.

황실에 있을 때부터 염동괴제는 늘 죽음과 함께였다. 황실이라는 핏빛 암투의 현장. 그리고 어릴 때부터 앓아왔던 심장병.

살기 위해 심장을 적출해야 했다. 그리고 적출한 심장에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릴 폭발 마법을 내장해야 했다. 오직 생존 하나만을 바라고 내린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마법사가 되고, 필리몬드에서 시장으로 군림했는데도 왜?

사실 암레트는 그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전대 황제가 이 세상에 내놓은 두 명의 조카 때문이다. 절대 권력을 만들어낸 텔마흐, 그리고 그의 이복동생 세이렌.

빛과 어둠 같은 이복 남매였다. 빛 아래에서 세상을 주무르는 절대자와 어둠에 뿌리를 내리고 절대자의 비수로 살아가는 암살자.

두 조카의 존재만큼은, 암레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따라잡지 못하는 힘은 곧 도망쳐야만 하는 공포였다.

“세이렌, 기어이 7성을 넘어섰구나. 8성의 무인이라니, 초인 위의 초인이로군.”

“…….”

“어쩌면 나도 가능했을 거다, 그 경지.”

고룡의 눈물.

그게 제때 도착했다면 말이지. 그랬다면 암레트 역시 8성의 경지가 머지않았을 터.

“자, 이제 말해봐라, 조카야. 내가 죽는 이유를.”

“넌 선을 넘었어.”

“어떤 선을? 아.”

그게 뭔지 떠올랐다는 듯 자조하는 암레트.

“…역시, 기벤라트의 눈물 때문인가?”

“텔마흐가 그따위 장난감에 관심 있을 것 같아?”

그러면서 세이렌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미뤄왔던 청소를 하려는 거겠지.”

언제든 치워버릴 수 있는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건가.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세이렌이 보여준 가공할 경지가 그걸 증명했으니까. 암레트의 마법은 그녀에게 조그마한 타격조차 입히지 못했다.

백색탑의 방어체계는 가볍게 무너졌고, 정예병 1개 중대는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그랑버드와 함께 추락했다.

메워질 수 없는 간극이었다.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힘이었다.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지금 텔마흐는 큰 실수를 저지르는 거야.”

“무슨 말이지?”

“텔마흐는 나를 죽일 게 아니라 너를 죽였어야 했다. 암살검가를 없애야 자신이 안전하다는 걸 모르고… 어리석은 것.”

암레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세이렌의 핏빛 눈동자에 감정이 실렸다. 그녀를 마주하고, 전투하고, 끝내 패배한 뒤에야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감정.

그건 살기였다.

“우리 암살검가를 없애야 황제가 살 수 있다… 당신은 이제껏 그렇게 생각해 왔나? 그래서, 내 아들을 죽이려 했나?”

특히 그녀의 살기는 마지막 한마디에 짙게 배어 있었다.

“그래, 맞아. 네 막내아들을 마주한 순간, 나는 알았다. 이놈을 살려두면 언젠가 제국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리란 걸.”

“…….”

“아무리 지금의 너라 해도 황제에겐 어쩔 수 없겠지. 다만, 앞으로는 어찌 될지 모르겠군.”

루빈. 그 아이는 죽지 않았다.

암레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수인은 쉽게 속여넘겼지만, 킬리언은 루빈을 죽이지 못할 것이었음을 잘 알았다. 게다가 지금 루빈이 백색탑을 오르고 있다는 사실도.

명백한 실수였다. 그 꼬마를 만났을 때, 그때 자신이 직접 죽였어야 했다. 그때 죽이지 않을 거였다면, 그 아이를 사형수로 결정하지 말든지.

안일했다. 너무나 안일했다. 고룡의 눈물에 눈이 멀어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암살검가가 얼마나 위협적인 자들인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세이렌.”

“말해.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고룡의 눈물을 먹을 테냐? 황제에게 맞서기 위해?”

“아니.”

“거짓말을 하는구나.”

암레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손에 쥐지 못한 고룡의 눈물을, 세이렌이 욕심내는 거라고.

“그 결정체는 사탕과 비슷하다지. 황궁에 처음 놀러 온 너에게, 내가 사탕을 주었던 일 기억하느냐?”

“그래.”

“사탕을 처음 먹는다고, 고맙다고 대답했던 그 아이가… 이젠 내게 검을 겨누고 있다니.”

암레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심장이 서서히 멎어가고 있었다.

심장이 멈춘다는 것. 암레트에게 그것은 죽음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심장에 걸어둔 폭발 마법이 발동하는 조건이기도 했으니까.

큭큭큭큭, 하는 웃음소리가 또다시 울렸다.

자신은 이렇게 죽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황실을 위한 마지막 선물은 두고 가는 셈이었다.

심장이 멎고, 폭발 마법이 발현되면 이 도시는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도시의 시민들도 모두 한 줌 재가 될 것이다.

세이렌과 킬리언, 그리고 루빈을 포함해서.

“이제야 알겠다. 왜 텔마흐가 네게 나를 죽이도록 시켰는지.”

“…….”

“내 심장이 멎으면, 폭발 마법이 발동될 테니까. 날 이용해 너와 킬리언을 죽이려는 거였어.”

암레트가 그렇게 말할 때였다.

먼발치에서, 루빈과 킬리언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암레트는 죽어가고 있고, 세이렌은 검을 쥐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둘은 천천히 다가왔다.

“세이렌.”

“가주님.”

세이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암레트는 큭큭큭 웃어댔다.

자신이 죽어가는 지금 이 모습이, 저들 눈엔 어떻게 보일지. 뒤이어 벌어질 참극이 무얼지, 아마 상상도 못하겠지.

“재밌군, 재밌어.”

암살검가의 정점에 올라선 여인, 그런 그녀를 키워낸 로이넨서 그리고 미래의 가주까지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제 심장이 폭발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우스웠다.

심장이 힘을 잃어갈수록, 심장에 고여 있는 마나의 흐름이 점차 강렬해졌다. 폭발 마법이 서서히 깨어난다는 뜻이다.

그때. 세이렌의 덤덤한 목소리가 그의 위로 떨어졌다.

“착각하지 마, 암레트.”

“…착각?”

“폭발 마법의 파쇄법은 이미 몇 년 전에 밝혀졌다. 위더스푼 가주가 황제한테 파쇄법을 바쳤으니까.”

“……?!”

“생각보다 간단해. 심장이 멎은 뒤 2초. 그 안에 심장의 적절한 부분을, 적절한 강도로 도려내면 되거든.”

‘적절한’이라고 간단히 표현했지만, 얼마나 정교한 기술과 까마득한 경지가 뒷받침되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았다.

다만, 그만한 경지로 검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대륙에 몇 없다는 사실이 문제였을 뿐. 암살검가만 보더라도 지금 당장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암살자는 킬리언과 세이렌밖에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다른 검술명가의 가주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황제는 가장 확실한 패를 내놓은 것이다.

“폭발 같은 건 없어. 이만 죽어라.”

세이렌의 낮은 목소리가 한결 아득해진다.

이제 심장이 마지막 박동을 하는 중이다. 암레트는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세이렌의 머리칼, 그 선명한 붉은색만 얼룩처럼 남는 걸 느꼈다.

다음 순간, 암레트의 입이 저절로 벌어지면서 심장이 그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생명이 다함과 동시에 세이렌의 팔이 움직였다.

적색의 머리칼을 흩날리며 검을 내질렀다. 간결하고 정확한 일곱 번의 궤적.

스응. 스응.

무인이 아닌 사람이 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어 보일 테지만, 완벽한 경지의 암연 위에서 펼쳐지는 검격이었다.

“……”

이윽고 숙였던 허리를 펴는 세이렌.

일곱 차례 심장을 도려냈음에도 그녀의 검은 방금 벼려낸 검처럼 깨끗하기만 했다. 폭발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세이렌이 몸을 돌렸다. 루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킬리언을 마주 보며 잔잔한 미소를 보였다.

“오랜만이네, 킬리언.”

* * *

세이렌과 킬리언은 짤막하게 인사를 나눴다. 상황이 급박하여 이야기를 길게 할 수는 없었지만, 상황을 대략적으로 정리해 줄 틈은 있었다.

“앞으로 여섯 시간 뒤, 황제의 진압군이 필리몬드에 도착한다. 도시엔 계엄령이 내려질 거고, 반란 세력은 24시간 내에 처단될 거야.”

“그 반란 세력 말인데. 당연히 거짓말이겠지? 황제가 지어낸.”

“그건 아무도 모르지. 방금 그 수장이 죽었으니까.”

세이렌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암레트는 이미 오래전부터 황제의 제거 대상이었다. 단지 오늘 실행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진실은 역사 뒤편으로 영영 사라지겠지.

“진압군 규모는 얼마나 되지?”

세이렌이 말해준 바에 따르면, 진압군은 제국군 2개 사단에 마법사여단 소속 1개 중대 그리고 거혈족여단 소속 1개 소대였다. 그랑버드 10기를 통한 상륙과 지상군 작전이 동시에 이뤄진다고 했다.

거기에, 위페르 왕국 친위기사단까지 참전, 검술명가 하르뎀가의 가주가 선봉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다 짜여져 있었구만. 처음부터 끝까지.”

킬리언의 말대로, 필리몬드 사태의 각본은 이미 나와 있었다.

암레트는 오래전부터 반란을 준비해 왔다. 하지만 그가 이끄는 반란 세력 내부에는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릴 수 없는 변절자가 생겼다. 제국 입장에서는 영웅이겠지만.

암레트의 친우이자 검술명가 하르뎀가의 가주가 황제에게 밀고한 끝에, 황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하르뎀 가주는 조만간 필리몬드의 새로운 시장으로 추대될 예정.

거기에 암레트의 기행, 불합리, 폭정의 이미지를 만들어준 여러 이야기도 준비된 상태라고 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데.”

그만큼 오래전부터 기획됐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시민들은 그저 하루 동안 집 안에 틀어박혀 있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사이 모든 게 정리될 거니까.

“그럼 흑색구역은 어떻게 되지?”

“소멸. 깨끗하게 사라질 거다.”

“제길! 흑색탑에 무구들이 엄청 쌓여 있는데.”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세이렌은 이미 본가 가신 일부와 필리몬드에서 활동하는 암살자들에게 흑색구역의 암살검가용 무구를 회수해 오도록 지시해 놓은 상태였다.

“흑색구역을 넘나들지 못할 텐데?”

“장벽의 마법은 이미 깨졌어.”

“하!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나만 모르고 있었군.”

“암살검가에겐 필요 없는 정보니까.”

“…늘 그런 식이지.”

세이렌과 킬리언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루빈은 조용히 곁을 지켰다. 대화를 따라가는 데만 집중했다.

이후, 세 사람은 암레트의 거처에서 나왔다. 바람이 불어오자, 잠시 하늘 어딘가로 눈길을 던졌던 세이렌. 문득 루빈에게 말했다.

“로이네크로우를 호출해라. 이제 흩어질 거니까.”

“예, 가주님.”

“킬리언은 나와 함께 이동한다. 루빈, 너는 지상으로 내려가면 거혈인 배에서 하루 더 머물도록 해. 오늘 밤이 지나면 필리몬드엔 며칠간 황제가 허락하는 축제가 펼쳐질 테니까. 그 이후에 카포티니로 이동해라.”

“알겠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없었다. 잘 지냈냐는 안부조차 불필요했다. 남들 눈에는 냉담해 보이겠지만, 이게 암살검가 로이넨의 방식.

잠시 후, 킬리언의 로이네크로우 ‘블랑’이 구름을 뚫고 나타나고.

까아아아악.

뒤이어 티나도 나타났다. 세이렌은 루빈 옆에 내려앉은 티나를 슬쩍 쳐다보았지만, 딱히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어이, 꼬맹이.”

킬리언이 작별인사를 나누기 위해 다가왔다.

“암레트 일은 아쉽게 됐군. 모처럼 척살조 때 기분 좀 내보려 했는데 말이야. 아무튼, 카포티니에서는 얌전히 지내라.”

“알겠어.”

“끝이냐?”

덧붙일 게 있다면 가벼운 미소 정도. 마음에 들었다는 듯 킬리언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쯤에서 루빈은 세이렌을 바라보며 정중한 예를 표했다. 그러곤 티나에게 고갯짓을 하며 난간 쪽으로 다가갔다. 티나 위에 올라탄 루빈은 빠르게 백색탑과 멀어졌다.

그런 뒷모습을 바라보며 킬리언이 어깨를 으쓱였다.

“서두르긴. 아, 맞다!”

킬리언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요릭의 두개골이 저놈한테 있는데?”

“알아.”

“아니, 두개골 안에 뭐가 있는지도 알고 하는 소리야? 그런데도 그냥 보낼 거야?”

기벤라트의 눈물.

그건 루빈의 경지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릴 비약이었다.

하지만 세이렌은 그걸 루빈에게서 뺏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루빈이 킬리언이나 자신에게 그걸 내주었더라도, 받지 않을 작정이었다.

킬리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세이렌은, 백색탑 난간 너머로 뛰어내렸다. 그런 그녀에게 빠르게 날아든 로호가 커다란 날개를 펼쳤다.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실망할 뻔했는데, 다행이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