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89화 (89/258)

제89화. 축제 나들이 (1)

‘표백의 아침’ 작전이 공식적으로 끝난 건 이튿날 오전 9시. 태양이 떠오르면서 백색도시가 잠시 주황빛으로 물드는 때였다.

반란 세력이 적출되고 계엄령이 해제됐다는 사실이 거리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마법을 통해 음성을 증폭시킨 진압군이 한 시간 내내 똑같은 알림만 반복하는 식이었다.

“필리몬드 시장이었던 암레트는 흑색구역을 이용한 반란 모의와 시민들을 향한 지속적인 폭압으로…….”

“그에 따라 황제 폐하께서는 필리몬드의 긍휼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긴급히…….”

“이번 ‘표백의 아침’ 작전의 성과를 기념하기 위해,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일주일간 도시에는 더없이 자유로운 축제가…….”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거리로 나온 시민들.

언뜻 보기에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거리였다. 유혈사태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고, 국지전을 치른 도시라기에는 조용하기만 했으니까.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자신들의 도시에 생겨난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감자의 썩은 부위만 도려내듯이 지도층 일부분만 바뀐 정도가 아니었다.

도시의 분위기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웅성웅성.

루빈은 옹기종기 모여 ‘표백의 아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지나쳤다. 블루캣호의 나머지 일행들은 밤새 눈을 붙이지 못하다가 이제 막 잠이 든 상태.

그가 산책 삼아 찾아간 곳은 흑색구역이었다.

‘완전히 사라졌네.’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구역을 둘러싼 광장만 온전했을 뿐, 건물들과 골목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마치 가운데가 움푹 파인 분화구 같았다.

아슬아슬했던 도시의 풍경은 조금씩 누그러지는 중이다. 흑색구역이 사라지고 남은 공터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유적지를 구경하는 관광객처럼 키득거리는 사람들, 멀리 떨어져서 이젤을 펼치고 분주히 거리의 풍경을 기록하는 화가들도 있다.

거리 곳곳에서 노래를 불러대는 시민들이 넘쳐났다. 흥겨운 음악과 환호성이 끊이질 않았다.

다시 블루캣으로 돌아온 루빈. 배는 거리의 분위기와는 동떨어져 고요하기만 했다. 루빈은 돌아다니며 일행들의 상태를 하나씩 살폈다.

‘다들 아직도 자고 있네.’

이윽고 루빈도 선내 의자 위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미뤄둔 잠을 자려는 게 아니다. 내면세계를 방문하려는 것이다.

한동안 내면세계를 살펴보지 못했다. 흑색구역으로 들어간 뒤에도 하네케와 소통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야기만 나누고 조언을 구하는 정도였다. 클로이의 목걸이를 통해 마령이 침투했던 이후, 대략 2주 만이니까, 꽤 오랜만이었다.

꼭 감은 눈앞으로, 곧 내면세계가 펼쳐졌다.

‘흠, 많이 변했네.’

완전히 새로운 풍경. 그사이 훈련장이 완벽히 구축되어 있었다. 병사 수백 명이 동시에 훈련할 수 있을 만한 규모였다.

-루빈. 어떤가?

‘전부 직접 만든 거예요? 건축자재만 갖춰놓아 달라더니.’

루빈의 상상에 따라 무엇이든 조형될 수 있는 내면세계. 그러나 하네케는 그저 건축자재만을 요청했다. 그동안 손수 훈련장을 구축한 모양이었다.

-힘든 건 없었네. 그냥 수련의 일종이었으니.

‘수련의 일종인 것치곤 너무 거대한데요. 군대라도 훈련시킬 생각이세요?’

-그야 모를 일이지. 이래 봬도 제국군을 호령했던 대장군부 수장이었네. 생전 솜씨를 좀 부려본 게지. 여기선 잠을 잘 필요도 없으니 이 정돈 거뜬해.

‘함정도 있네요?’

-마령이 여기에 또 발을 들일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네케의 함정은 생전 그가 군대를 주둔시켰을 때 야영지 외곽에 설치해 놓은 방식 그대로였다. 다만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커서, 마령의 몸체가 아무리 클지라도 틀림없이 사로잡힐 정도였다.

-보아하니, 일이 잘 마무리된 것 같더군.

‘제가 예상했던 흐름과는 달라지긴 했지만, 일단 필리몬드에서 필요한 건 모두 얻었어요.’

-곧바로 카포티니로 출발하는 건가?

‘아뇨. 어머니의 명에 따라 일주일 동안은 더 머물러야 할 것 같네요.’

-채찍 이후엔 당근을 주는 게 황제의 방식이지. 즐거운 축제가 펼쳐질 것 같군. 세이렌도 자네에게 간단한 휴식을 주려는 거겠지.

‘그럴까요.’

하네케 말처럼 세이렌의 의도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한숨 돌리게 된 것도 사실이다. 흑색구역에 들어선 뒤로 아슬아슬한 상황들만 계속 이어졌으니까.

루빈의 얼굴 위로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축제 기간에는 환혈족도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된다고 했으니, 모두 다 같이 시내를 돌아다녀 볼까 봐요.’

-재밌겠군. 그 내막이야 어찌 됐든, 축제는 즐거운 법이니까.

‘그럼, 저는 그러기에 앞서…….’

루빈은 흥미로운 눈빛과 함께 훈련장 앞에 섰다. 하네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안으로 빠르게 뛰어들었다.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대장군이 설계한 훈련장의 원리를 이미 파악했기 때문이다.

모든 과정을 다 돌아 나오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20분.

그렇게 수차례 더 훈련 과정을 밟은 루빈이 다시 하네케 앞에 섰을 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활력 넘치는 루빈의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보던 하네케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저번에 자네에게 얼핏 듣기는 했다만, 좀 더 이야기해 줄 수 있겠나?

‘……?’

-자네가 카포티니로 가는 진짜 이유 말일세.

카포티니를 위장별채로 정한 이유. 하네케는 대략적으로 알고만 있었다. 티나나 쿠제는 그조차도 모르고 있었고.

-누군가를 제거해야 한다고 했잖나. 텔마흐 이전에 죽여야 하는 사람.

‘…페르 로렌치니.’

-페르 로렌치니?

‘제가 제거해야 할 마법사입니다. 페르는 카포티니 마법학교의 생도로 입학할 거예요.’

-로렌치니 가문이라……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하네케로서는 들어본 적 없는 가문이었다. 비록 마법사 사회에 어둡기는 해도,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마법사 가문 정도는 알고 있는 하네케였다.

‘이름난 가문은 아니에요. 20년쯤 뒤에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그를 왜 제거하려는 건가?

‘그자가 암살검가 토벌전의 선봉장이었거든요.’

-마법사가 선봉장이라…….

흔한 경우가 아니었다. 제국군 내에서도 마법사여단은 지원군 성격이 강했다. 마법사가 선봉장이라면, 그건 단 하나의 사실만을 의미했다. 그만한 능력을 지녔다는 거다.

루빈은 페르를 처음 보았던 그때를 떠올렸다. 푸른색 눈동자에 푸른 머리칼을 지닌 마법사, 페르.

전쟁터에서 처음 그를 봤을 때, 머리칼이 붉은색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암살검가 가신들을 죽여 나가며 그들의 피를 뒤집어썼기에 그렇게 보였던 것이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우리한테 그놈의 정보는 없었어요.’

-감춰져 있던 인재였다는 거군.

‘나이는 저와 비슷했지만, 이미 7성에 올라가 있던 괴물입니다.’

-허, 7성이라고?

루빈의 표정이 한결 심각해졌다.

페르의 무서움은 단지 압도적인 경지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능력이 그 정도로 뛰어나다면, 기꺼이 자신의 동료로 만드는 방법도 생각해 봤을 테니까.

그러나 페르 로렌치니는 예외였다.

‘페르 로렌치니는 암살검가를 제거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놈 같았어요.’

-그게 무슨 말인가?

‘암살검가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했다는 뜻입니다.’

본래 암살검가 가신들은 두려움의 감정과 거리가 먼 자들이었다. 혹독한 육성 과정뿐만 아니라, 원초적이든 인위적이든 그들 몸에 흐르는 암연 덕분이었다. 암연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옅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르 로렌치니가 보여준 광기 가까운 모습은 가신들로 하여금 저절로 공포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페르에게 맞선 가신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그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었다. 오직 최대한 많이 암살자들을 죽이는 것, 그것도 최대한 잔혹하게.

루빈이 기억하는 장면 중 하나.

페르가 펼쳤던 손을 움켜쥐는 순간, 그 앞에 있던 네 명의 암살자가 한순간에 몸이 터져 나가며 죽어버리는 장면이었다.

루빈은 나직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은 페르가 카포티니 마법학교 출신이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정확한 입학 시기도 몰라요. 다만, 올해부터 3년 사이에 입학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요.’

-그자가 성장하기 전에 그 싹을 제거하려는 거군.

‘가능하다면, 어째서 암살검가를 증오하게 됐는지도 알아낼 겁니다.’

하네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때였다. 하네케가 고개를 돌려 내면세계의 하늘 쪽을 바라봤다. 루빈도 그 동작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누가 블루캣호를 찾아온 것 같네.

‘다들 자고 있으니, 제가 나가봐야겠네요.’

이윽고 내면세계에서 나온 루빈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갑판 위로 나가보니 어떤 여인이 나루에서 배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여인만이 아니었다. 여인의 치마폭을 붙잡고 서 있는 꼬마 아이 하나도 있었다.

“어!”

루빈을 발견한 아이가 놀라 소리쳤다. 아이의 표정에 반가움이 떠올랐지만, 그건 아주 잠깐뿐. 뭔가가 떠올랐는지, 금세 초조해하는 아이.

하지만 아이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

루빈이 흑색구역을 빠져나가게 도와주었던 그 꼬마 아이였다. 흑색구역에서는 입을 열지 않아 이름조차 몰랐는데, 이렇게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이윽고, 어색한 침묵을 깨트린 건 아이의 엄마였다.

“반갑습니다, ‘대단한 도련님’.”

“대단한 도련님이요?”

“저희 아이가 그러더라고요, 대단한 도련님과 쿠제 님 그리고 착한 술꾼 할아버지 덕분에 살아나올 수 있었다고요.”

“아, 그렇군요.”

루빈은 배에서 내려 그들과 마주했다.

쿠제가 아이를 무사히 집으로 데려다준 뒤, 아이는 빠르게 회복했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살려 보내준 은인을 찾아 필리몬드를 수소문했다.

루빈 일행이 블루캣호를 타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터라 찾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블루캣호는 필리몬드 시내에서는 제국귀족이 타고 온 배로 유명해진 상태였다.

계엄령이 끝나자,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은인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나섰던 것이다.

“도련님, 저희가 집으로 초대를 해도 되겠습니까? 이제 축제가 시작될 텐데, 저희 집에서 축제를 즐기는 게 어떠신가요?”

여인은 정중하게 물었다. 루빈이 잠시 고민하자 여인이 거들었다.

“일행이 더 있다고 들었는데, 모두 오셔도 됩니다. 부디 초대를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도련님. 세 분이 아니었으면 아이는 흑색구역과 함께 이 세상에서 지워졌을지도 몰라요.”

“아주머니, 저희 일행 중엔 거혈인 두 명도 있습니다. 그래서…….”

“괜찮고말고요! 황제 폐하의 넓은 아량으로 축제 기간 중에 거혈인들도 자유롭게 시내를 돌아다녀도 괜찮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일행들에게 의견을…….”

그때였다. 뒤편에서 기분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찬성입니다.”

“어, 쿠제 아저씨!”

“…….”

“하하하, 잘 지냈지?”

갑판 위에 모습을 드러냈던 쿠제는 찬성 의사만 남기고 다시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곧이어 나타난 건 아늑이었다.

“저도 찬성입니다. 아, 우리 초면인가요? 저는 아늑이라고 합니다. 거혈족이자 이 블루캣호의 선원입니다.”

“우와, 거혈족!”

“…….”

뭔가 아늑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루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팔짱을 꼈다.

아늑은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고는, 쿠제가 그랬던 것처럼 금세 모습을 감췄다. 곧이어 나타난 건 예상했던 대로 와락이었다.

“저어어어도 찬성입니다! 루빈 도련님.”

“와락, 내 이름은 루든이야.”

“아, 착각했네요! 루든 도련님!”

찬성한다고 말한 쿠제, 아늑, 와락이 실제로는 누구였는지 빤하다. 진짜 세 사람은 아직 잠을 자고 있을 터. 우연히 루빈의 대화를 들은 티나가 냉큼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찬성 의사를 나타내는 탑승객이 하나 더 있었으니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검은 고양이가 눈을 반짝거렸다.

“냐아아아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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