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입학 준비물 (4)
“허…….”
베니테즈의 놀라움 가득한 눈동자. 교수는 연파공을 멈추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정확하게는, 바닥이 아닌 루빈이 만든 얼음 위였다.
허리를 숙여 단단한 얼음의 표면을 만져보았다. 이토록 견고한 결빙이라니. 이건 얼음계열에 전념하는 마법사들이나 가능한 경지였다.
“계속 나를 놀라게 하네요, 루든 학생.”
루빈은 어깨를 으쓱이며 얼음 위를 걸었다. 호수 바깥으로 나오는 그때, 머릿속으로 하네케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무래도 이 친구는 자네 움직임을 마법으로 오해하는 것 같군.
‘그런 것 같네요.’
그럴 만했다. 암연을 통한 폭발적인 움직임이나 호수 위에 길을 만들어낸 핏빛서리의 능력. 마법사의 머리로 납득하기엔 마법밖에 없었다.
루빈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착각이었다. 운신 마법을 제대로 배워보려면, 베니테즈 교수의 눈에 드는 게 중요했으니까.
“어쩔 수 없군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잠자코 기다리는 루빈의 모습에, 베니테즈가 한숨을 내쉬었다.
학생의 능력을 미리 파악했다면 이런 일까지는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학생과 했던 내기를 무를 수는 없는 일.
피이잉.
베니테즈는 새끼손가락에 차고 있던 반지를 빼내어 그걸 손바닥 위에 띄웠다. 잠시 공중에 머무르던 반지에서는 물감 같은 게 흘러나왔다. 아공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별빛이 수 놓인 밤하늘 같은 아공간 안에는 베니테즈가 수집해 온 여러 마도구들이 빛을 내며 둥둥 떠다녔다.
교수는 마도구들이 루빈 눈앞으로 와서 잠시 멈추었다가 이내 다시 흘러가도록, 아공간을 조작했다.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도 좋아요. 루든 포이넨 학생. 참고로, 이 마도구들 중엔 하급품은 없어요. 중급과 상급뿐이죠.”
정말로 그랬다. 마도구들은 베니테즈 교수가 방학 동안 열심히 대륙 동부를 돌아다니며 틈틈이 수집한 것이었다.
화염계열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갖춰진 마법로브, 마법 시전 속도를 증가시키는 목걸이, 일시적으로 기억력을 증가시키는 귀걸이 등등…….
‘중급이나 상급품이라면, 그만큼 사용하기가 힘들 거라는 뜻이군.’
어떤 마도구는 상급품에 가까울수록 필요 마나의 조건이 높아진다. 만약 마나가 충분히 성장하지 않고 지금 이 정도라면, 평생 가도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바로 글레이튼의 팔찌가 그랬으니까. 이런 전설적인 마도구들은 착용자의 경지와는 무관했다. 그저 마나만 지니면 마도구의 능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었다.
“흐음…….”
루빈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영영 쓰지 못할 마도구를 뽑을 수도 있으니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그때.
“잠시만요!”
루빈은 마도구들을 휙휙 넘기는 베니테즈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흠, 뭔가가 있었나요?”
그러면서 베니테즈는 흘려보냈던 마도구를 다시 되돌렸다.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푸른빛이 감도는 구슬. 마나가 흐른다거나 마법이 설치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보기엔 그냥 장식품인 것 같았다.
“아, 이거… 이건 마도구가 아닌데.”
-저게 뭔가?
하네케의 물음도 이어졌지만, 루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베니테즈가 아공간 속으로 팔을 집어넣어 구슬을 꺼내는 걸 지켜보았다.
“루든 학생, 이건 그냥 기념품이에요. 제국 수도에 방문했다가 어느 골목에서 우연히 얻은 거죠.”
구슬은 아름다웠다. 구슬의 중심부에 불꽃을 형상화한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문양, 확실해요.’
-아는 물건인가? 저 교수 말처럼 기념품이 아니라?
‘기념품? 절대 아니에요. 이건 ‘그리폰의 심장’입니다, 하네케.’
-뭐? 그리폰이라면……?
이 정도에서 하네케와의 대화를 멈춘 루빈은 베니테즈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교수와의 만남은 이 정도면 적당했다. 뜻밖의 행운까지 얻게 됐으니, 이 자리를 떠야 할 때였다.
“두 달 후, 학기가 시작하면 뵙겠습니다. 베니테즈 교수님.”
“루든 포이넨. 학생의 이름을 잊을 일은 없겠군요. 그런데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요? 여기 이 로브랑 목걸이만 해도…….”
“아닙니다. 원칙대로라면, 저한테는 기회조차 없었던 거잖아요. ‘최초’로 발견한 귀족학생은 아까 그 여자애였으니까. 그러니까 이걸로 만족하겠습니다.”
둘러대는 말이었다. 사실 루빈으로서는 가장 좋은 마도구를 얻어낸 셈이었다.
베니테즈 교수가 이 푸른 구슬이 그리폰의 심장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아무리 애걸복걸해도 내주지 않았을 터.
“그럼 가보겠습니다.”
“알겠어요, 저는 자정까지 날 찾아줄 다른 학생을 기다려 봐야겠군요.”
루빈은 다시 곤돌라에 올라탄 다음, 카포틴 호수 가운데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잠시 멈추고 푸른 구슬을 꺼내보았다.
푸른 구슬 중심에 새겨져 있는 문양을 다시 살펴보았지만, 틀림없었다. 이건 그리폰의 심장이었다.
-루빈. 아까는 농담하는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군. 그리폰이라면 사멸한 종이지 않은가?
‘적어도 지금은 그렇죠.’
그리폰. 맹금류의 상반신에 커다란 날개를 지녔지만, 하반신은 범의 모습인 생명체.
하네케 말처럼 지금은 그 흔적을 오래된 서적에서나 찾을 수 있는 사멸한 종이었다. 가장 마지막에 나타났다는 기록만도 천 년 전이었다.
한때는 기수를 태우고 하늘을 휘저었다고 전해지지만, 이제는 그 이야기마저 전설로 치부됐다.
-적어도 지금은? 그러면 미래엔 다르다는 말인가?
‘믿기지 않으시겠죠. 하지만 회귀 전의 제가 똑똑히 봤습니다. 살아 있는 그리폰을요.’
아니, 단순히 목격한 것만이 아니었다. 회귀 전 루빈은 외눈의 푸른 눈동자를 지닌 그리폰과 싸우기까지 했으니.
‘푸른눈.’
암살자들은 그리폰을 가리켜 그렇게 불렀다. 그 이름을 말할 때마다 분노와 적개심을 가득 담아 이를 갈았다.
수십 명. 푸른눈에 의해 수십 명의 암살자가 죽어야 했다.
-수십 명이나? 그렇다면…….
‘맞아요. 황제와의 전쟁에서 적으로 맞섰어요. 페르 로렌치니를 경호하는 게 그리폰의 역할이었으니까요.’
암살검가 토벌전의 선봉장이었던 페르 로렌치니. 마법사 혼자만의 능력도 엄청났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전투가 있을 때마다 늘 페르의 곁에는 푸른눈이 버티고 있었다.
푸른눈은 그림으로 보았던 그리폰과는 살짝 달랐다. 맹금류의 상체가 그림 속 독수리와는 달리, 푸른색의 깃털로 이루어져 있었다.
‘저는 페르와 대적해 본 적이 없어요. 놈과 저의 전장은 매번 비껴갔으니까요. 하지만 놈과 푸른눈이 떨어지게 된 어느 날, 비로소 내 손으로 그리폰을 죽여 버렸습니다.’
단 하나의 그리폰에 수준급의 암살자들조차 부상을 입었지만, 가장 큰 피해는 로이네크로우들이었다.
상공을 가로지르며 치렀던 치열한 전투에서 로이네크로우들 수십 마리가 죽어 나갔으니.
“…….”
푸른 구슬을 쥐고 있는 루빈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직접 그리폰을 죽여 버린 그날, 루빈이 직접 뽑아낸 게 바로 이 심장이었다.
엄청난 희생 끝에 그리폰의 푸른 구슬을 적출하고 나서야 푸른눈은 살육을 멈추었다.
그 당시 루빈은 심장을 적출하자마자, 분노에 차서 그걸 곧바로 소멸시켰다.
-자네 말대로 이게 그리폰의 심장이라면, 이걸로 그리폰을 부활시킬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페르가 학교에 있는 동안, 베니테즈 교수한테서 이 심장을 얻어낸 건 확실한 것 같네요.’
다행이었다. 오늘 베니테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공간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이 그리폰의 심장은 언젠가 페르의 차지가 되었을 테니까.
-그러면 이제 그걸 소멸시킬 셈인가? 회귀 전처럼?
‘아뇨.’
-그러면 어쩔 셈이지?
루빈은 푸른 구슬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푸른눈이 부활하는 미래는 그대로 실현될 것이다. 회귀 전과 똑같이 온 세상에 그 위용을 보여줄 것이다.
단, 페르 곁이 아닌 루빈의 곁에서.
‘회귀 전엔 페르가 부활시켰다면, 이번엔 제가 할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면서?
‘저는 모르지만, 페르는 다르겠죠.’
페르를 만나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겼다.
* * *
“신입생 나들이는 잘 갔다 왔나?”
며칠 뒤, 로젠탈러가 위장별채를 찾아왔다. 거구의 관리요원은 담배를 뻐끔뻐끔 내뱉으며 루빈을 바라봤다.
“재밌었지?”
“그럭저럭.”
“친구들은 사귀었고? 웬만하면 좀 활달한 마법생도 역할이면 좋겠는데.”
그 말에 루빈은 피식 웃었다.
“로젠탈러, 내 역할까지 간섭하진 마. 원하는 정보는 다 알아서 전달해 줄 테니까.”
“그렇게 자신 있다면, 나야 좋고.”
로젠탈러는 학교에서 겪은 일들을 세세하게 보고하기를 원했지만, 루빈은 몇 가지 일들을 빼놓고 보고했다.
에릭 이엘로스와의 마찰이나, 숨은 상인으로 만났던 베니테즈 교수에 관하여. 그리폰의 심장 또한 당연히 숨겼다.
칙명부가 루빈을 이용하는 것처럼, 루빈 역시 칙명부를 이용할 뿐이다.
“곧 기숙사에 들어가겠군. 어쩌면 오늘부터일지도 모르겠고.”
“기숙사에 들어가면 칙명부와 연락은 어떻게 이뤄지지?”
“역시 암살검가답네. 기숙사 들어간다는 생각에 애들처럼 들뜰 줄만 알았는데.”
이후 로젠탈러는 루빈에게 자신과 접선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우선, 쿠제를 통하는 것. 쿠제는 비마법서적 전문 관리인으로 일하며 학교구역 경계까지는 출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루빈이 지속적으로 쿠제가 있는 곳까지 갈 수는 없으므로 이게 주된 접선 방법은 아니었다.
그래서 로젠탈러가 생각해 낸 방법은 도시 외곽 쪽에 폭죽업자를 섭외하는 것이었다. 카포티니에서는 매일 저녁마다 폭죽을 터뜨리는데, 그걸 이용하는 것이다.
“지령이 있을 땐, 저녁 7시쯤 일정한 색깔 배열로 폭죽을 터뜨릴 거다. 그걸 보고, 쿠제한테 접선 장소를 전달받으면 돼. 혹시라도 접선방식에 변동사항이 생기면 그때마다 알려주지.”
“그럼 이제 용건은 끝인가?”
“아니야, 하나 더 있어.”
로젠탈러가 또 다른 용건을 입 밖으로 막 꺼내려 할 때였다.
열어둔 문 안으로 조그마한 날벌레 하나가 날아 들어왔다. 몸에 닿는 빛에 따라 몸의 색깔이 변하는 날벌레였다.
피리리링. 피리리링.
기묘한 울음이 꽤 커다랗게 울렸다. 날벌레는 날개를 퍼덕이며 로젠탈러와 루빈 사이로 날아왔다.
“내 예상이 맞았군, 오늘로 기숙사에 들어가는군.”
로젠탈러가 말했다.
날벌레는 로젠탈러 쪽으로 몸의 방향을 돌렸다가 냉큼 뒤돌아서 루빈 쪽으로 향했다. 마치 주인을 찾는 것 같았다. 피리리링. 소리를 내며 루빈의 눈앞에서 계속 날개를 퍼덕였다.
이윽고.
날벌레의 몸이 금빛으로 뒤덮였다. 그 모습에 루빈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떠올렸다.
“열쇠벌레.”
카포티니 기숙사 시스템 중 하나였다. 열쇠벌레는 이름 그대로 하나의 열쇠였다.
열쇠벌레가 찾아오면, 그날부로 카포티니에서 지내고 있던 학생들은 기숙사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잠깐 기다려, 네가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에 할 말이 있으니까.”
로젠탈러는 열쇠벌레를 좀 밀어두라는 의미의 턱짓을 했고, 루빈은 거기에 따랐다. 루빈이 손으로 살짝 밀쳐두자 열쇠벌레가 파라라락 날개를 퍼덕이며 루빈으로부터 몇 미터 떨어졌다.
그다음, 로젠탈러는 칙명부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방음 마도구를 실행시켰다.
열쇠벌레에 녹음 마법 같은 게 내장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마법사들에 대한 의심이 많은 로젠탈러였다.
“벌써부터 지령을 주는 거야?”
“겁먹을 건 없어, 루빈. 이건 간단한 일이니까. 마법학교 기숙사 내부에 대한 기록을 남겨. 재주껏 묘사를 해도 좋고.”
“마법학교 기숙사라면, 이미 많이 알려져 있잖아?”
“아니, 최근에 카포티니 기숙사에 변화가 생겼거든.”
“변화?”
본래 카포티니가 기숙사로 쓰는 건물은 두 동이었다. 하나는 ‘랩소디관(館)’이었고, 다른 하나는 ‘허밍관(館)’이었다.
50년 전부터 랩소디관이 개보수 과정을 거치면서 기숙사로는 오직 허밍관만 쓰였다.
“공사가 끝난 건 작년이야. 그래서 작년 입학생들부터는 랩소디관을 기숙사로 쓰고 있지. 참고로, 랩소디관은 상당한 수준의 마법건축술이 적용된 건물이라더군.”
칙명부에는 랩소디관에 대한 기록이 누락된 게 많았다. 또 어떻게 개보수되었는지 아직 파악되지도 않았다.
“계속 지내면서, 어떤 시설들이 있는지 보고해. 기숙사 시스템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또… 걸리지 않을 자신만 있으면 의뭉스러운 장소도 들어가 봐도 좋고.”
거기까지 들은 루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령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기숙사로 가면 된다.
루빈이 방음 구역에서 벗어나자, 열쇠벌레가 금색 몸체를 빛내며 피피피핑 다가왔다.
이윽고 루빈이 위장별채를 나섰다. 새로운 담배를 꺼내 피우는 로젠탈러는 멀어지는 루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