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반 배정 (1)
“지금쯤 무도회가 시작됐겠군요.”
교장실 안으로 중후한 목소리가 울렸다. 에겔러. A반의 담임이자 설계마법학 교수였다.
“무도회를 못 보다니 아쉽네요.”
뒤이어 입을 연 사람은 목소리마저 냉랭한 솔라나 교수.
“솔라나 교수님께서 학생들의 춤에 관심이 많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베니테즈 교수님이 저를 오해하셨나 봐요. 제가 구경하고 싶은 건 춤이 아니에요. 춤을 매개로 한 정치와 권력의 현장이죠. 무도회는 절망과 냉대, 그리고 아집과 질투가 흘러넘치는 아주 흥미로운 전쟁터 아니겠어요?”
베니테즈 교수는 솔라나의 차가운 견해에 어깨를 으쓱였다. 공격마법을 전담하는 솔라나 교수다운, 가시 돋친 말이었다.
그때, 큼직한 그림자가 탁자 위에 드리워졌다.
카포티니 마법학교의 교장, 키건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키건은 교장실의 응접용 탁자에 둘러앉은 네 명의 교수를 바라봤다. 에겔러, 솔라나, 베니테즈, 그리고 가이젠 교수.
네 사람이 여기 모인 이유는, 그들이 각 반의 담임교수들이기 때문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무도회가 끝난 뒤, 학생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반을 배정할 겁니다.”
반 배정식. A부터 D까지, 네 개의 반은 무작위 추첨에 따라 배정된다. 안배된 사항이라고는 귀족과 평민의 비율뿐이다.
그렇다고 반 배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추첨으로만 진행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예외적으로, ‘선점’이 가능한 학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두 달 동안 충분히 숙고하셨겠죠?”
담임교수들은 반 배정 전에 원하는 학생을 선점할 수 있다.
단 세 명.
학급 정원에 비하면 미미한 숫자지만, 누구보다 그 영향력을 잘 알고 있는 교수들이었다.
처음에는 엇비슷해 보이는 학급도 학기 말이 되면 수준 차이가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역할이 바로, 이 자리에서 선점된 세 명의 학생들이었다.
“사실 올해는, 특별히 감안해야 할 사항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굳이 생도들의 무도회가 한창인 이 시간에 ‘학생 선점’을 진행하는 겁니다.”
다른 교수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대로라면 학생을 선점하는 것도, 반을 배정하는 것도, 시간적인 여유 속에서 치러진다. 대개 무도회가 끝난 그 주의 주말쯤이었다.
하지만 이번 입학은 키건 교장이 통제하기에 규모가 너무 컸다.
유능한 마법생도들이 많은 데다가 이엘로스, 델린 가문이라는 유력 가문들의 압박.
그리고 무엇보다 클로이라는 제국귀족 교류학생이 몰고 온 파장까지.
‘무도회랑 동시에 하지 않았으면, 담임교수들은 무수히 많은 정치적 영량력에 휘말렸을 터.’
베니테즈 역시 이렇게 갑자기 ‘학생 선점’이 진행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의도를 생각해 보니, 이게 최선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키건 교장님.”
“말하세요, 솔라나 교수.”
“클로이는 어쩌실 거죠? 솔직히 말해 저희 넷 중에 클로이를 첫 번째 선점 학생으로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요?”
그 말에 에겔러와 가이젠이 호응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베니테즈는 가만히 있었다.
“아, 베니테즈 교수는 생각이 달랐나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학생이 학급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베니테즈에게로 의아함이 담긴 시선이 쏟아졌다. 역대 최고의 재능을 두고 잘 모르겠다니?
이를 본 솔라나 교수는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럼 베니테즈 교수만 빼고, 나머지 셋이서 순서를 가려내어 클로이 학생을 선점하도록 허락해 주세요, 교장님.”
다소 무례해 보이기까지 한 태도였지만, 사실 솔라나는 여기에 있는 그 누구보다 학교에 오래 재직한 사람이었다.
엘프의 핏줄이 섞여 있어서 삼십 대로 보일 뿐, 실제로는 에겔러나 키건보다 훨씬 선배였다. 물론 실제 나이가 삼십 대였을 때에도 저런 식의 성격이긴 했지만.
“그건 곤란하겠는데요, 솔라나 교수.”
교장 키건의 대답이었다.
“왜죠?”
“사실 클로이 학생은, 카포티니와 아메릭마나 사이에 사전 협의된 내용이 있습니다.”
“사전 협의요? 설마, 클로이 학생이 원하는 교수가 따로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래요. 그리고 하필 그 교수가 클로이를 부담스러워하는 베니테즈고요.”
솔라나가 얼굴을 팍 구겼다.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것은 물론, 아랫입술까지 지그시 깨물었다. 다른 두 교수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여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이 클로이를 원했던 이유는 위더스푼의 명예나 권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대륙 곳곳에 마법 천재라는 이름을 떨치고 있는 클로이였으니 교육자로서는 당연한 욕심이었다.
“키건. 요청 사항이 있네.”
에겔러가 나직하게 말했다. 기품이 자연스럽게 배어나는 그는 키건의 오랜 친우였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산적 같은 키건 대신, 중후한 멋이 있는 에겔러를 마법학교 교장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말해, 에겔러.”
“클로이가 선점된 마당에, 베니테즈 교수가 예정대로 선점 순번을 첫 번째로 갖는 건 문제가 있을 것 같아.”
선점 순서는, 지난 3년간의 연구 실적에 따르기로 되어 있었다.
올해는 그간 연구 실적이 압도적으로 좋았던 베니테즈가 첫 순서였고, 그다음이 솔라나, 에겔러, 가이젠 순이었다.
“에겔러 교수의 의견에 저도 찬성합니다. 각자 한 명씩 총 세 번이었으니까, 베니테즈 교수는 클로이로 그 기회를 하나 쓴 걸로 치죠.”
“저도 찬성합니다.”
조용하던 가이젠 교수까지 거들었다. 키건은 수염을 만지작대며 베니테즈 교수를 쳐다봤다. 동의하느냐는 무언의 물음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원래 제가 선점하려던 학생도 두 명뿐이었으니까요.”
“그럼 다행이군. 자, 그럼 솔라나 교수부터 시작하면 되겠지요?”
“제가 첫 번째로 선점할 생도는…….”
솔라나는 학생들에 관해 정리된 문서를 뒤적거렸다. 그러던 중에, 올해 신입생도 중 재능 있는 학생으로 꼽히는 에릭 이엘로스의 문서도 지나갔다. 다른 교수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엘로스 가문이 얼마나 위험 부담이 높은지 잘 알고 있었다.
‘재능은 있지만…….’
그들이 끼칠 정치적 영향력을 감안하면, 에릭 이엘로스는 양날의 검.
‘위험 요소를 끌어안고 학급을 이끌 필욘 없지.’
이윽고 그녀 입에 나온 건, 이름 있는 마법가문이자, 이엘로스 가문보다는 훨씬 다루기 쉬운 귀족가의 자제였다. 다들 충분히 납득할 만한 선택이었다.
“제 첫 번째 선택은…….”
뒤이어 에겔러 교수가 자신의 첫 번째 선점 학생을 말했다. 그 역시 에릭 이엘로스를 뽑지 않았다. 마찬가지 유능함과 안전함 중 후자를 택한 것이다.
다음 순서는 가이젠 교수. 그는 망설임없이 선점 학생을 호명했다.
“에릭 이엘로스를 선점하겠습니다.”
“……?”
“진심입니까?”
“그렇습니다.”
가이젠 교수를 뺀 나머지 교수들의 시선이 서로 얽혔다.
다른 교수들은 가이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 학교로 부임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얼마큼의 야욕을 가졌는지 모르는 것이다.
사실 카포티니라 해서 교수들 모두 평민을 옹호하고, 귀족을 적대하는 건 아니었다. 이 역시 정치 집단이었고, 그 안에는 각자의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몇몇 유력 귀족가의 정치적 영향력은, 무엇보다 다루기 어려운 요소였다. 독이 발린 장미와도 같달까. 이런 점에서, 가이젠 교수의 선택은 과감하면서도 무모해 보였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추스른 건 키건 교장이었다.
“흠, 기대되는 선택인데? 그럼, 다들 이렇게 첫 번째 학생들을 고른 건가요?”
모두가 고갤 끄덕였다.
다음 순서. 드디어 처음으로 선택을 하게 된 베니테즈 교수가 학생들 정보가 적힌 종이를 테이블 가운데에 내놓았다.
그중 한 군데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루든 포이넨? 이 학생은 누구지?”
“3등귀족이긴 한데, 마법가문은 아닌데?”
내로라하는 마법학 교수들조차 모르는 가문의 학생이라니. 재능이 없거나, 있더라도 보잘것없을 확률이 높았다.
“클로이를 데려갔다고 너무 안일한 선택을 하시네요, 베니테즈 교수.”
“하하, 두고 보시죠.”
베니테즈는 여유롭게 웃으면서도 내심 놀랐다.
‘마법가문이 아니었다니?’
이건 베니테즈도 예상하지 못한 정보였다. 두 달 전, 공원에서의 활극으로 인해 루든이 당연히 마법가문 출신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다른 누군가에게 마법을 배웠다는 건가?
뭐든 상관없다. 루든이 클로이나 에릭 못지않은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직접 확인했으니까.
다행히 다른 교수들은 루든이라는 숨은 천재를 모르고 있었다. 베니테즈는 자신의 지도 아래 운신 마법을 익히는 루든의 모습을 상상하고는 실실 웃었다.
“이제 다시 솔라나 교수부터 고르세요. 두 번째 선점입니다.”
키건이 다시 순서를 진행시켰다. 솔라나, 에겔러, 가이젠이 뽑은 두 번째 학생들은 누가 보아도 그럴 만한 재능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선점.
이번에도 의외의 선택은 베니테즈에게서 나왔다.
“에, 누구요?”
솔라나 교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오스카 투니오라고 했습니다.”
“오스카 투니오… 이 학생도 들어본 적 없는 친구인데?”
“학생들 키우는 일에 취미라도 붙이셨나 봅니다.”
“베니테즈 교수한테는 우리가 모르는 정보가 있나 보죠.”
눈먼 의혹 속에서 베니테즈는 태연했다. 그는 이번에도 확신에 차 있었다.
“베니테즈, 정말로 그대로 결정할 거야?”
“네, 교장님.”
“이 회의가 끝나면 무를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지?”
베니테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교수들은 그러려니 했다. 의아하긴 했지만, 나서서 걱정해 줄 일은 아니었으니.
학급이란 생도들만의 경쟁 구도가 아니다. 교수들도 자신의 역량을 걸고 경쟁하고 있었기에, 솔직히 베니테즈가 패착을 두는 거라면 그들로서도 나쁠 건 없었다.
이어서 나머지 교수들은 그럴 만한 생도들로 세 번째 선점을 마쳤다. 이의제기할 만한 여지가 없는 선택이었다.
“그럼… 이로써 학생 선점을 종료하지요.”
키건은 교장실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걸어두었던 결계 마법을 풀었다. 설계마법학의 에겔러도 따라 일어나 이중으로 쳤던 결계를 해제했다.
이제는 외부에서도 접근이 가능했다.
“지금의 결정을 곧바로 반영하여, 나머지 반 배정 추첨을 준비하도록 하지요.”
똑똑똑.
교장을 보좌하는 사무원이 방문을 두드린 건 그때였다.
“교장님, 무도회가 끝나갑니다. 귀빈들도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금방 나가도록 하지. 자, 다들 돌아가도 좋아요. 베니테즈 교수는 잠깐만 기다리고.”
그 말에 베니테즈를 제외한 세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라나는 교장실을 나서기 전, 남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교장님, 혹시라도 베니테즈 교수의 결정을 번복시켜 줄 생각은 아니시겠죠? 제가 이름 똑똑히 기억해 뒀습니다. 루든 포이넨과 오스카 투니오. 이 두 학생이요.”
“걱정 말아요, 솔라나 교수.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믿어보죠, 그럼 저는 위더스푼의 영애가 누구와 춤을 췄는지 그거나 알아보러 가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죠.”
솔라나 교수까지 나간 뒤.
키건은 커다란 몸을 일으켜 다시 교장실 곳곳을 돌아다녔다. 또다시 교장의 손에 의해 결계가 만들어졌다.
베니테즈는 다시 만들어진 결계가 조금 전 회의 때보다 더 견고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베니테즈. 할 말이라는 게 뭐지?”
조금 전, 베니테즈의 전음이 있었고 그것이 회의 후에 밀담이 이어진 이유였다.
“자네의 선점 학생들 때문이라면,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는 아무래도 상관하지 않으니까.”
그건 교장으로서 더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베니테즈가 아무 생각 없이 결정하지 않았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고.
하지만 베니테즈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그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것이었다.
“페르 로렌치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교장님.”
교장 키건의 눈빛이 한순간에 진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