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방문 (2)
첫 수업 시작까지 이틀 앞둔 주말.
기숙사의 주말은 평일보다 활기가 감도는 법이지만, 이날은 조금 달랐다.
첫 수업을 의식한 것인지 학생들 대부분 마탑지구를 벗어나지 않고 조용히 보내는 쪽을 택했다. 랩소디관에는 긴장감에 침울함까지 더해진 것 같았다.
다만 이건 랩소디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재학생들을 태운 포니아크호가 카포티니 항구에 도착한 건 어제였다. 고학년들은 또 다른 기숙사인 허밍관을 이용했고, 그들이 하나둘씩 들어오면서 학교 안에는 활기가 넘쳐 흘렀다.
조용하고 침울한 랩소디관과 여유롭게 소란스러운 허밍관.
고학년 생도들은 마치 신입생도들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 굳이 허밍관을 놔두고, 랩소디관의 벤치를 떡하니 차지하고 떠드는 것만 봐도 그런 의도를 배제할 수 없었다.
“하…. 저 선배님들 참 거슬리네. 마법으로 붙어도 충분히 이길 것 같은데.”
루빈의 귓가로 오스카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투명천장을 올려다보니 오스카는 창밖을 보며 거슬린다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다.
주제넘은 소리는 아니었다. 고학년 생도들이 마법학을 몇 년 앞서 배우긴 했어도, 그게 마나의 경지를 보장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무인이든 마법사든, 경험이나 지식보단 재능이 중요한 법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신입생들 중에는 고학년을 가볍게 찍어 누를 만한 인재가 많았다.
“루든, 선배님들이랑 좀 놀아볼까?”
오스카가 음흉스럽게 웃는다. 기숙사 입사 첫날에 ‘구속구 제거’로 엄청난 마나를 뽐냈던 일탈이 떠올랐다.
“오스카. 우리 벌점 있는 거 잊은 건 아니겠지?”
“아… 맞다.”
심지어 다른 학년이랑 얽히는 문제는 중하게 다루는 터라 벌점 수위도 높았다.
“어차피 다른 학년들과 겨룰 수 있는 기회는 많아. 그때까지 거슬리는 거 잘 기억해 놔.”
“그래? 정말로 기억해 놔야겠는데. 근데 너… 어디 가냐?”
“내가 말하지 않았어? 오늘 저녁 식사 때문에 나갈 거라고.”
“오늘 저녁…이라면!”
바로 클로이가 초대한 저녁 식사였다.
이 상황을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한 오스카는 기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잘 갔다 와. 죽지 말고.”
루빈도 손을 흔들어주며 기숙사 방을 나섰다.
우선 호숫가로 가서 곤돌라에 올라탔다. 마탑지구를 벗어나기 위해선 호수를 가로질러야 했고, 도심의 물길을 통해 외곽 쪽으로 빠져야 했다.
곤돌라를 운전하며 나아가고 있는 그때.
건물들 틈에서 튀어나온 갈매기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곤돌라 선미에 내려앉았다.
갈매기는 모가지를 연신 돌리며 주변을 충분히 살폈다. 그러더니 부리를 벌려 가며 사람 목소리를 냈다.
“루빈! 나는?”
“티나…….”
“나는 슬슬 고양이로 변신하면 되는 건가?”
블루캣호에서 엮인 인연들이 다시 모이는 오늘의 저녁 식사. 이 자리를 정말로 고대했던 건 루빈도 쿠제도 아닌, 티나였다.
루빈과 함께 기숙사에서 지내는 그녀를 가장 괴롭혔던 건 다름 아닌,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식단이었다.
“루빈, 내가 말했나? 요즘도 내 꿈에 셀레스네가 요리해 줬던 음식들이 나온다니까? 고양이로 변신해서 즐거웠던 적은 그때뿐이라고.”
“…….”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마치 난 함께 갈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안 그래도 너한테 말해주려고 했는데…. 클로이가 명복을 빈대.”
“뭐?”
“필리몬드 사태 때 말이야. 내가 키우던 고양이는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거든.”
“엥? 그럼 새 식구를 들였다고 하면 되잖아. 개나 쥐 같은 거 말이야. 고슴도치도 괜찮고. 뭐로든 변신해 줄게.”
“그때 충격이 너무 커서 그 이후론 아무것도 안 키운다고 이미 말해 버려서.”
“…뭐? 에이, 거짓말이지? 정말 그렇게 말했을 리 없잖아. 앗, 설마 쿠제가…? 쿠제가 그런 거야?”
루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였다. 잔뜩 화가 난 티나는 부리로 곤돌라를 콕콕콕콕 내리찍었다.
“하여간 이 로이넨서 놈을! 셀레스네한테 차인 화풀이를 나한테 한다 이거지?”
“셀레스네한테 고백했던 건 너잖아.”
“아, 그랬나? 가물가물하네. 어쨌든 내가 로이넨 꼬마애 돌보느라 기숙사에서 얼마나 형편없는 밥에 시달리는 줄도 모르고, 날 죽은 고양이로 만들어?”
클로이 품에 안겨 진수성찬을 야금야금 먹을 생각에 부풀었던 티나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어느덧 루빈의 곤돌라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쯤에서 티나도 돌아가야 했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날개를 퍼덕거리며 저 멀리 날아가 버리는 갈매기.
곤돌라가 멈춘 곳은 카포티니 외곽의 나루였다. 나루 뒤편으로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고, 시장의 별장으로 이어지는 한적한 숲길이 나 있었다.
그런데 나루에는 루빈의 곤돌라 말고도 네 척의 곤돌라가 더 있었다.
‘다른 누가 있나?’
본능적인 경계심이 들었다. 사실, 경계심이 들기 전부터 루빈은 암연을 넓게 펼쳐둔 뒤였다. 그것이야말로 감정보다 빠른 본능이었기에.
그래서 저 너머에서 여남은 명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암연에 더 집중하니까 열 명이라는 정확한 인원수가 파악됐다. 그들을 쫓듯이 따라붙고 있는 세 기의 골렘까지.
쿵, 쿵, 쿵, 쿵.
숲길을 걸어가자 금방 그들과 마주쳤다. 황망한 표정에 얼굴이 잔뜩 붉어진 도망자들. 그들 모두 마법학교의 생도들이었다.
어깨에 내려앉은 열쇠벌레의 색깔을 보면 고학년들이었다.
“하아, 하아, 이봐, 너… 신입생도지? 저쪽으로 가면 넌 죽어.”
고학년들은 루빈과 마주하자 몸을 숙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손을 내저으며.
“용기 내서 여기로 온 거 같은데, 우리도 지금 막 골렘들한테 죽을 뻔했으니까 돌아가. 겁주는 게 아니라, 진짜 우릴 죽이려고 했다니까!”
“…….”
“얘, 덜떨어진 놈인가? 너 뭐야?”
“뭐긴 뭐야, 제국귀족 구경하러 온 잔챙이겠지. 아무튼, 그러다 인생 하직하는 거란다.”
“얘들아… 일단 우리부터 피하자. 저기 골렘들 온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개학을 앞두고 기숙사로 복귀한 고학년들이 만용을 부려봤던 것이다.
사실, 카포티니 시에서는 위더스푼 가문에게 제공된 건물을 비밀에 부치지 않았다. 마법학교 간의 교류 과정이었으니, 오히려 모든 걸 공식적으로 진행했다.
‘그렇다는 건 이 일대가 임시적으로 제국직할령으로 구획된다는 뜻이지.’
그것이 제국귀족의 특권이었다. 그들은 카포티니가 속한 왕국으로부터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았다.
직할령 안에서라면, 만용을 부린 마법생도들쯤은 자비 없이 그냥 죽여 버려도 그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쿵! 쿵! 쿵!
어느덧 골렘의 거신이 루빈 가까이 다가왔다. 후다닥 도망쳤던 고학년들은 이미 세 척의 곤돌라에 나눠 탄 상태였다.
고학년들은 이제 골렘에 의해 끔찍하게 죽는 신입생도를 목격하겠구나 싶었다.
“어?”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세 기의 골렘들은 그대로 루빈을 지나친 다음, 나루로부터 2미터 정도에 일렬로 섰다. 이 이상으로 넘어가면 대가가 따른다는 것처럼.
“뭐, 뭐야? 쟤?”
“왜 골렘들이 공격을 안 하지?”
루빈은 무심한 눈으로 고학년 생도들을 돌아봤다. 도통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그 표정들을 뒤로하고, 다시 숲길을 걸어 나갔다.
‘저긴가.’
얼마 뒤, 숲길 저쪽의 저택으로부터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쿠제와 셀레스네였다.
“도련님!”
“루든 도련님!”
루빈은 두 사람에게 걸어가며 주변을 살폈다.
고학년들을 내쫓은 건 골렘들만이 아니다. 파견 나온 제국군 위병들이 곳곳에서 보였고, 위더스푼 가문 자체적으로 운용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잔챙이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철통 보안이었다.
* * *
저녁 식사는 안온한 분위기 속에 흘러갔다. 주된 이야기는 2년 사이 루빈에게 일어난 일들이었다. 쿠제와 짜놓은 설정이 정교했기 때문에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티타임으로 넘어가자, 클로이가 눈을 밝히며 물어왔다.
“루든! 블루캣호의 선장으로 누가 됐을 것 같아?”
입학식 때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의 클로이. 제국귀족이라는 신분을 떼어놓고 보더라도, 열세 살이라는 나이를 잊게 할 만큼 성숙한 티가 났다.
블루캣호 때의 활발함은 그대로였지만.
“아늑이 이겼을까?”
“땡! 와락이 이겼대. 와락이 선장이 된 이후로 아늑은 제국여단에 입대했대.”
클로이에겐 재밌는 소식이었지만, 루빈으로선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텔마흐와의 전쟁에 거혈족 여단까지 투입된다면, 아늑을 적으로 마주해야 할 거라는 뜻이기도 했으니. 루빈은 언젠가 꼭 손을 쓰리라 다짐했다.
“루든, 그때 말이야. 필리몬드에서…….”
블루캣호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지던 대화가 자연스럽게 필리몬드로 넘어갔다. 그러자 클로이 특유의 명랑했던 분위기가 잦아든다.
‘내가 죽은 줄 알고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했지.’
죄책감이라. 이전에 쿠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필리몬드에서 너희랑 헤어지고 나서, 법무대관… 아니, 암레트. 그 사람을 찾아갔거든.”
자칫 반역자를 높여 부르는 게 아닌가 걱정됐는지, 호칭을 고치는 클로이. 루빈은 태연하게 되물었다.
“정말?”
“응, 제국귀족은 황족이 있는 도시에 가게 되면 꼭 알현해야 하거든.”
“그런데?”
“근데 그때 내가 실수를 한 줄 알았어.”
“실수라니?”
“같은 마법사이고, 염동력으로 대마법사에 오른 사람이기도 해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암레트 할아버지랑 친했어. 그래서… 블루캣호에서 겪은 일들을 막 이야기했는데…….”
블루캣호에서의 이야기라면, 분명 루든에 관련된 이야기도 나왔을 터.
“그러다 배를 같이 탄 친구 이야기도 했고, 네 마나를 바로잡아 준 이야기도 했어. 그런데 그 순간… 암레트 할아버지의 표정이…….”
“표정이?”
“…심각했어.”
그럴 만도 했다.
암살자가, 그것도 암살검가 본가의 가주, 세이렌의 막내아들이 ‘마나’를 지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클로이는 암레트의 표정이 왜 심각해졌는지 몰랐겠지만, 루빈은 그 심각성의 무게를 잘 알았다.
‘섭리에서 벗어난 일이나 다름없지.’
암연이 담긴 환에 마나가 섞인다는 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늘과 바다가 뒤바뀌는 일이나 다름없을 만큼.
“여기서 제가 첨언하자면.”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셀레스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섯 제국귀족의 연혼(連婚)은 황가의 주요 관심사입니다. 황실과 혼사를 맺을 가능성이 높은, 잠재적 황가로 보는 것이죠. 비록 아가씨가 아직 나이가 어리시긴 하나, 암레트는 만날 때마다 자신이 직접 신랑감을 정해주겠노라고 공언했죠.”
그래서 이들은 암레트가 루빈을 죽여 버린 줄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3등귀족 주제에 감히, 제국귀족의 영애에게 추파를 던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들어맞았네. 클로이 때문은 아니었지만 암레트가 정말로 날 죽이려고 했으니까.’
루빈은 클로이와 셀레스네를 바라보며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다 오해였잖아? 아무도 안 죽었어.”
“그렇긴 하지만, 저로선 아직도 받아들여지질 않네요. 제가 직접 필리몬드로 가서 사망자 서류까지 확인을 했거든요.”
가능했다면, 시신까지도 확인했을 셀레스네였다. 하지만 그랬어도 루빈의 죽음이 꾸며진 거라는 사실을 밝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아무리 위더스푼이라 해도, 황제의 그림자는 쫓을 수 없다.
암살검가란, 황제가 직접 내버리기 전까진 결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그림자이니.
“…….”
루빈은 쿠제와 눈을 마주쳤다. 충분히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는 일어날 때라는 의미였다. 우선 가벼운 화제로 돌렸다.
“클로이 너는 괜찮아?”
“뭐가?”
“당장 다음 주부터 첫 수업이잖아. 긴장되지 않아?”
그러자 클로이의 눈이 빛났다. 기다리고 있던 대화 주제라는 듯이. 루빈은 아차 싶었다.
“솔직히 나는… 엄청 기대 중이야! 내가 알기로 카포티니 교육은 다른 마법학교들과 다른 부분이 많거든. 아메릭마나랑만 비교해 봐도, 입학 나이부터 많이 차이가 나. 아메릭마나는 여섯 살부터 입학할 수 있거든. 그래서…….”
클로이의 말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다시 눈을 마주친 쿠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귀가 시간이 예상보다 늦어질 것 같았다.
클로이의 저택에서 나온 뒤.
루빈과 쿠제는 각자의 곤돌라에 오르기 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 마을엔 투니오 가문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 이름을 아는 사람도 없었고요.”
역시 예상대로였다.
오스카의 신분은 위장된 것이었다. 아마 그 너머엔 페르 로렌치니라는 숨겨진 이름이 있을 것이다.
“쿠제. 이것 좀.”
루빈은 쿠제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넨 다음, 자신의 곤돌라에 올라탔다.
“카포티니랑 가장 가까운 거점창고가 어디에 있지?”
“베야네그로입니다.”
“그럼 그쪽을 통해 거기에 적힌 것들을 구해줘. 명목은 암살자 수업으로 하면 되겠지?”
“네. 그런데 뭔가 필요하신 거라면, 베야네그로보다는 근처에 있는 암살자의 위장별채를 이용하는 게 더 수월할 겁니다.”
“웬만한 위장별채에서는 구하지 못할 거여서 그래.”
“네?”
그제야 쿠제는 고개를 숙여 루빈이 건넨 종이를 읽어 내렸다. 루빈이 요청한 물건들은 빼곡히 썼음에도 다섯 줄이 넘을 만큼 꽤 많았다.
너무 많아 구하기 힘들겠다고 선뜻 생각한 쿠제는, 곧 진짜 문제가 따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도련님, 대체 이걸… 왜?”
쿠제가 알기로, 이 재료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과물은 단 하나뿐이었다. 너무 위험해 암살자들 사이에서도 금기시되는 그것.
하지만 쿠제의 진짜 의문점은 따로 있었다.
“아니, 그보다 이걸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