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109화 (109/258)

제109화. 첫 수업 (1)

월요일, 마법 수업 첫날이 밝았다.

햇빛이 창가에 비치자 랩소디관의 신입생도들이 부스럭부스럭 일어났다. 긴장해서 그런지 다들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피피피핑.

수업 시작은 9시부터였지만 열쇠벌레들은 두 시간이나 앞서 움직였다. 서두르라는 듯 계속해서 한 방향을 가리키면서.

천장 쪽에서 오스카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원래 이렇게 재촉하는 놈들인가?”

“담임교수를 봐야 하니까 그런가 본데.”

“아, 담임교수. 솔직히 난 솔라나 교수만 아니면 돼.”

그건 오스카만의 바람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 역시 똑같이 생각했다. 깐깐하고 히스테릭한 솔라나 교수만 아니면 된다.

담임교수란, 교수들로서도 자존심을 걸어야 하는 자리였다.

네 개 반은 주기적으로 경쟁수업을 치르는데, 그것이야말로 솔라나 교수가 집착하는 수업이었다. 매년 솔라나 교수가 담임을 자처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B반으로 배정되면 웬만한 기사단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훈련한다던데? 그것도 공격마법만.”

“그래? 근데 오스카, 다들 서둘러 나가는 것 같은데. 우리도 갈까?”

시간이 그다지 여유롭지는 않았다. 루빈의 한마디에 오스카가 헐레벌떡 옷을 갖춰 입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마법생도 로브까지 둘러쓰고.

“바로 따라갈게, 밑에서 기다리고 있어!”

건물 밖으로 나오니 분주히 걸어가는 학생들이 보였다. 오전 늦게 수업이 배정된 고학년들은 느긋하게 움직일 테니, 이 학생들은 전부 올해 신입생들이라 보면 되었다.

피피피핑.

열쇠벌레들은 각 신입생도들을 학교 구역의 가장 서쪽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여기가 카논관(館)인가 본데.”

마법학교에는 강의용 마탑이 총 네 곳 있었다. 각각의 이름은 ‘카논관’, ‘하모니관’, ‘녹턴관’, ‘심포니관’.

학년마다 마탑이 정해져 있었고, 그중 카논관은 신입생들의 전용 마탑이었다.

“왜 마탑 이름에 음악 어휘를 갖다 쓴 거지? 기숙사 건물들도 그렇고.”

“역사 수업을 듣다 보면 알게 되겠지. 설립자의 취향 아닐까?”

“그런가? 어, 여기서부터 반이 갈리나 봐.”

카논관 1층엔 각 반으로 향하는 네 개의 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껏 같은 방향으로 걸어왔던 생도들이 엇갈리는 중이다.

그 한가운데서 오스카가 중얼거렸다.

“우린 아마 다른 반이겠지?”

“어째서?”

“그냥. 왠지 그런 느낌이랄까.”

루빈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오스카는 초조한 눈으로 두 열쇠벌레의 향방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루빈은 반 배정 결과를 어느 정도 확신했다.

근거는 얼마 전 공개적으로 치러졌던 반 배정에 있었다.

“이 순간부터 귀족 생도와 평민 생도의 구분도 사라질 거다. 너희는 동일한 마나의 축복을 받은 마법사로서, 신분의 간극이 완전히 부러진 셈이다.”

키건 교장의 말과 함께, 공중에서 한데 뭉쳐진 신입생도들의 입학 목걸이.

그리고.

“이제부터 반 배정을 진행할 거다.”

그것이 폭발하면서 각 열쇠벌레로 날아든 파편들. 남들 눈에는 그저 펑, 소리와 함께 흩어진 무질서한 파편들처럼 보였겠지만, 루빈에겐 아니었다.

‘분명 규칙이 있었어.’

파편들의 모양과 궤적엔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암연으로 시력을 극대화시킨 루빈은 그걸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수많은 파편 중 루빈과 오스카의 것이 똑같은 모양이었다는 것도.

“어, 우리 같은 반인 건가?”

오스카가 흥분하여 소리쳤다. 두 열쇠벌레가 가리키는 방향이 같았기 때문이다. 둘 다 동쪽 계단이었다.

“그런 거 같은데.”

“오, 예!”

한차례 주먹을 내지른 오스카는 루빈의 어깨를 힘껏 휘감았다. 루빈 또한 웃어주었다.

‘잘됐어.’

진심이었다. 표적과는 가까울수록 좋은 법. 페르와 같은 반에 배정된 건 행운이었다.

제거하기 전에, 회귀 전엔 알지 못했던 정보들을 캐내기에도 용이할 것이다.

하지만.

‘잠깐, 그럼 클로이는?’

여기에 클로이가 섞여든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클로이로 인해 모든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게 될 확률이 높아지니까. 그럼 마음껏 활동하기가 훨씬 어려워진다.

반 배정 당시엔 오스카 파편만 신경 쓰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했는데.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루든!”

때마침 등 뒤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빈은 철렁하는 마음으로 몸을 돌렸다.

클로이가 밝은 미소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신입생도 무리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어? 쟤, 걔잖아, 제국귀족!”

“제국귀족? 그 위더스푼 애?”

“그래! 쟨 어느 반일까? 같은 반이면 좋겠다.”

수군거림 속에서도 클로이의 눈엔 루빈밖에 보이지 않는 듯했다.

“안녕, 루든!”

“어, 안녕.”

“혹시 너도 이쪽이니?”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루빈. 클로이는 환호성을 질렀다.

“잘됐다! 나도 여기거든! 이게 몇 번째 우연이람?”

제국귀족답지 않은 행실이었지만, 다른 학생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순식간에 신입생도들의 이목이 루빈에게 쏠렸다.

“어? 저 남자애. 위더스푼 애랑 같이 춤췄던 애잖아.”

“어, 맞네. 뭐지? 둘이 원래부터 아는 사이인가?”

“쟨 제국귀족처럼 안 보이는데…….”

쏟아지는 관심. 난생처음 눈앞에서 보는 제국귀족까지. 옆에 선 오스카는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달달 떨었다.

“어허어엇, 아, 안녕하십니까?”

“어, 너는?”

“아 저, 저는…….”

말을 더듬는 오스카에게, 클로이는 막 생각났다는 듯 활짝 웃어주었다.

“아아! 너, 루든 룸메이트 맞지? 이름은 오스카 투니오!”

“어헉…! 제 이, 이름까지 알고 계시다니. 어… 이 손의 의미는……?”

“악수! 나한테 무기가 없으니까 너도 무기가 없는지 확인하자는 뜻이지.”

처음 만난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며 악수의 사전적 의미를 짚어내는 건 여전했다.

“그럴 리가, 제가 어찌 무기를…….”

익살을 부리는 것처럼 보여도, 오스카는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클로이가 큭큭 웃었다.

“너, 루든이랑 성격이 많이 다른 것 같아.”

“제가 좀 더 낫다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풉. 루든이 나한테 말해줬는데, 너 엄청 재능 있다며?”

“재능이요? 제가요? 뭐가요?”

“마나 말이야. 아니야?”

“아, 하하! 틀린 말은 아니죠.”

“과연 루든 말대로 ‘그 정도’인지 기대할게. 그리고 나한테 말 편하게 해. 어차피 우린 다 동등한 신입생도잖아. 그게 이 학교의 전통이기도 하고.”

“그, 그럴까? 아, 아니… 그럴까요?”

“풉. 앞뒤가 바뀐 것 같아.”

“아, 내, 내가 그랬나?”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제국귀족의 그림자 앞에서도 굽실거려야 할 신분 차이였지만, 오스카는 금세 능글맞게 웃었다.

그런데 그때.

“너희, 계속 그렇게 길을 막고 있을 거야?”

계단 아래쪽에서부터 날아드는 날카로운 목소리. 오스카와 클로이가 뜨끔하면서 뒤를 돌아봤다.

달리아 델린. 클로이만 없었다면, 올해 신입생도 중에서 단연 눈에 띄었을 델린가의 영애였다. 그녀가 뾰족한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안녕, 달리아?”

“…그래, 안녕.”

달리아도 제국귀족을 대하는 게 편치만은 않은 듯,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앞쪽에 있는 루빈과 오스카가 다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클로이와 달리아가 따라왔다.

이로써 이들 네 명이 같은 반이라는 사실은 확실해졌다. 클로이가 잔뜩 신난 투로 말했다.

“루든에 달리아까지! 아는 사람들하고 같은 반이어서 다행이야. 에릭도 같은 반이려나?”

“아니, 에릭은 다른 쪽으로 올라갔어. 조금 전에 밑에서 봤거든.”

“아쉽다, 인사했으면 좋았을 텐데. 걘 어느 쪽으로 갔어?”

“남쪽 계단으로. D반이라는 뜻이지.”

달리아의 확신하는 말에 루빈과 오스카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동서남북 계단의 방향으로 반을 알 수 있는 거야?”

“당연하지. 몰랐어? 아, 하긴. 학교에 대한 정보가 없었겠네.”

클로이는 제국귀족이라서. 오스카는 평민이라서. 루든은… 뭐, 거기까진 알 바 아니고. 달리아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는 동쪽이니까…….”

“C반.”

“그러니까 우리 담임은…….”

“베니테즈 교수라는 거지.”

오스카와 달리아가 그렇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 네 사람은 계단 끝에 다다랐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네 사람이 함께 올라오는 모습이 의외라는 듯 놀라는 얼굴이지만, 은근한 만족감이 서려 있는 표정. 바로 베니테즈 교수였다.

“다들 반갑군요. 빈자리로 가서 앉아요.”

클로이와 오스카는 쾌활하게 ‘네!’ 하며 대답했고, 루빈과 달리아는 가볍게 목례만 했다.

네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자, 베니테즈는 교실 앞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사이 교실을 둘러본 반 신입생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내가 상상하던 거랑 완전 다른데.”

“역시. 이 교실에도 뭔가 숨겨진 마법이 있을 거 같아. 기숙사 투명천장처럼!”

교실은 널찍한 동굴과 비슷했다. 벽면과 천장은 울퉁불퉁했고, 창문이랄 것도 없었다.

창 대신 그냥 우연히 만들어진 것 같은 큼직한 틈이 있었고, 그곳을 통해 바깥 풍경이 보였다. 때때로 바람도 들락거렸다.

“이곳이 이번 학기 동안 다양한 수업이 펼쳐질 공간입니다. 어쩌면 기숙사보다도 더 친숙해질 장소죠.”

베니테즈는 칠판 앞에 서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베니테즈입니다. 카포티니에서 운신마법학을 담당하고 있어요.”

베니테즈가 담임교수라는 사실에 대해, 생도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만족과 모호. 만족해하는 쪽은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다. 베니테즈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터라, 괜찮은 배정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반응이 모호한 쪽은 평민들 중에서도 마법사 사회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부류였다. 그들은 베니테즈가 누구인지, 운신 마법이 무엇인지조차 잘 몰랐다.

사실 이런 생도들은 베니테즈보다 클로이를 더 의식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평민들이라 할지라도 대륙의 다섯 제국귀족은 모를 수 없었으니까.

“마법학교의 학기 초에는 많은 게 혼재되어 있어요. 정보의 불균형과 신분의 어긋남, 마나의 격차 같은 것들 말이죠. 하지만…….”

베니테즈는 교단에서 내려와 생도들의 책상을 하나씩 지나쳤다.

“학기가 끝났을 때 여러분들은 한데 어우러져 있을 겁니다. 그게 개교 이후 한 번도 바뀌지 않은 본교만의 철학이죠.”

툭.

툭.

교수가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 책상 위에는 손바닥 크기의 세공된 석판이 놓였다. 그 옆으로 깃펜도 하나씩 놓였다.

“앞에 있는 석판과 깃펜을 들고, 이 반의 모든 생도들을 찾아가 이름을 물으세요. 그리고 석판에 써넣으면 됩니다.”

이건 아이들이 서로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빠르게 친해질 수 있도록 베니테즈가 고안한 방법이었다.

“참고로, 이 석판과 깃펜엔 한 가지 마법이 깃들어 있습니다.”

“무슨 마법인가요?”

한 생도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묻자, 베니테즈가 활짝 웃었다.

“설계 마법이요. 두 사람의 말이 열 번 넘게 오가야 사용할 수 있는, 조건부 마법입니다. 그러니 속임수를 쓸 생각은 하지 마세요.”

최소한 열 번의 대화를 주고받아야 이름을 써넣을 수 있다. 알고 지낸 사람들끼리는 쉬운 일이지만, 처음 만난 사이는 그마저도 쉬운 게 아니다.

“교수님, 언제까지 하면 되나요?”

“오후 수업이 끝나기 전까집니다.”

하교 전까지라고는 해도, 학급의 인원수를 감안하면 시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학생들 사이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자, 그럼 저는 이만 퇴장하지요. 작년에 비하면 시간을 넉넉히 주는 겁니다. 얼른 석판을 채워 넣어보세요.”

그러더니 교실을 나가 버렸다.

“…….”

아주 잠깐, 아이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교수가 시킨 이거, 꼭 해야 하나? 무시해 버리면 안 되나?

어쨌거나 어색한 침묵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생도들은 누군가 나서서 침묵을 깨주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때.

“안녕? 내 이름은 클로이 위더스푼이야. 넌 이름이 뭐야? 미리 말해두지만, 나한테 편하게 말해도 돼. 카포티니 교칙에 따르면, 학교에 있는 동안 나는 제국귀족이 아니니까.”

클로이가 옆에 앉은 남자애한테 말을 걸었고, 모두들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남자애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침을 꿀꺽 삼키곤 힘겹게 두 입술을 떼었다.

“나는… 제이크라고 해. 저, 정말로 말을 놓아도 되는 거지?”

“당연하지. 내가 너한테 존댓말 할 순 없잖아.”

“으, 어, 으응?”

“풉! 농담이야, 제이크.”

이후로 두 사람은 몇 가지 일상적인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른 쪽에서도 조심스레 대화가 시작됐다. 이번엔 오스카였다. 오스카 특유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괴상한 질문 내용은, 옆에 앉은 생도의 정신을 뒤흔들 정도였다.

“넌 좋아하는 냄새가 뭐야?”

“으응? 내, 냄새?”

“내 이름은…….”

“뭐? 진짜? 나는 어렸을 때…….”

하나둘씩 생도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피어나고, 교실이 시장 한복판처럼 시끄러워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담임교수가 의도한 대로였다.

최소한 열 마디의 대화가 오간 다음에야 석판에 이름을 적어 넣을 수 있지만, 한번 대화가 시작되면 목적이 달성된 뒤에도 죽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생도들은 빠르게 친해졌다. 우선 자기 옆에 앉은 생도에게 말을 걸고, 그 대화가 끝나면 또 다른 생도한테 다가갔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끝끝내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는 생도도 있기 마련.

“달리아 델린?”

달리아는 자기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거는 남자애를 빤히 쳐다봤다. 조금 전, 함께 계단을 걸어 올라왔던 흑발의 생도였다.

“네 이름은 알아, 루든 포이넨.”

달리아의 머릿속에 지난 무도회에서 있었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카포티니의 대표 음료, 카포닐리아를 루든의 몸에 흘렸던 그 일 말이다.

“그때 그 무도회복은 어쨌어? 버렸어?”

“응. 버릴 거라고 했잖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신경 안 써. 처음엔 네가 가난한 줄 알아서 찝찝했는데, 인제 보니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네. 게다가 대단한 인맥을 숨겨두고 있는 것 같고.”

클로이를 말하는 것이다.

달리아는 무도회 때는 귀빈들을 의식해 상냥한 모습을 가장했지만, 이제는 본래 모습에 더 가까웠다. 냉담하고 까칠했으며, 오만함을 풍겼다.

‘주인공 자리를 빼앗겨서 아직도 화가 났나 본데.’

루빈은 속으로 웃었다. 달리아가 클로이를 의식하는 게 빤히 보였다. 무도회 때도 느꼈지만, 이 아인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편인 것 같았다.

“내가 클로이랑 어떻게 알게 됐는지 궁금하면, 물어봐도 괜찮아.”

“뭐?”

“다들 나한테는 그걸 물어볼 것 같거든. 똑같은 얘길 반복해야 해서 난 좀 지루하겠지만, 덕분에 과제는 엄청 쉬워졌지.”

의외로 루든은 무덤덤했다. 거만을 떨거나 자랑하는 태도가 전혀 아니었다. 그 덕에 달리아의 심기는 온전할 수 있었다.

“뭐, 그걸로 이 과제를 때울 수 있다면, 나도 나쁘지 않겠네. 말해 봐.”

“특별할 거 없는 우연이었어. 배를 같이 탔고…….”

모든 걸 말하지는 않고, 남들의 궁금증이 해소되는 딱 그 정도. 루빈은 그렇게만 말했다.

이미 생도들 사이에서는 허구가 덕지덕지 붙은 소설 같은 이야기가 떠도는 중이었는데, 그에 비하면 시시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기대하던 게 바로 그런 결론이었던지, 이야기의 말미쯤엔 달리아의 흡족한 미소까지 볼 수 있었다.

“역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네. 에릭이 들으면 좋아할 이야기야.”

“에릭이라면, 그 주황색 머리?”

“그래, 주황색 머리. 근데 이엘로스 가문의 적자를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니, 좀 놀랍네. 어쨌든, 걘 널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라.”

“그래? 몰랐네.”

“잠깐, 왜인진 안 궁금해?”

“별로.”

“아, 아니. 어째서?”

“내가 왜 궁금해야 하는데?”

정말 모르겠다는 듯한 루든의 표정에, 달리아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대뜸 오기가 생긴 그녀는 진지한 눈빛으로 경고했다.

“네가 마법사 사회를 잘 몰라서 그러는가 본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삼휘 마법사로 살아갈 거라면 굳이 그 가문에게 미움 사서 좋을 건 없어. 위더스푼이 나서서 보호막을 쳐줄 게 아니라면 말이지. 너랑 클로이, 그런 사이까진 아니잖아?”

“응.”

“흥, 딱 봐도 그렇게 보여. 아무튼, 다음에 보면 에릭한테 거슬리지 않게 잘 굽실거리도록 해. 같은 반… 친구로서 충고해 주는 거니까.”

“글쎄. 학교에 있는 동안 더 얽힐 일이 있을까. 졸업 후라면 모를까.”

루빈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런 루빈의 모습이 답답하다는 듯, 달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간단히 생각하지 마. 경쟁수업이란 것도 있고, 좀 더 과격한 방식으로 사람을 사주할 수도 있지. 이엘로스 가문은 그런 곳이니까.”

그때, 깃펜이 부르르 흔들렸다. 두 사람이 각각 열 번씩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다.

“저기…….”

때마침 한 여자 생도가 루빈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잔뜩 긴장한 채였다. 클로이와의 일들로, 루빈은 제국귀족 못지않은 위상을 얻게 된 것이다.

“나, 나랑 얘기하지 않을래?”

“얼마든지.”

역시나 화두는 위더스푼 가문과의 관계. 루빈은 달리아에게 해주었던 그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저벅저벅.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흘러간 한 시간. 이제 첫 수업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자, 다들 조용히 하세요! 곧 수업 시작합니다. 오늘 C반의 첫 수업은, 에겔러 교수님의 ‘설계마법학 입문’입니다. 다들 착석해 주세요!”

우직해 보이는 조교가 교수보다 앞서 들어와 소리 높여 말했고, 왁자지껄 떠들던 생도들은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귀족 출신이든 평민 출신이든, 에겔러 교수의 악명을 다들 한 번씩은 들어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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